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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민속보고서

사라져가는 소리의 추억

영화 ‘군함도’를 봤다. 지옥섬으로 묘사한 일본 탄광 ‘군함도’에 강제 수용된 조선인들이 집단 탈출하는 이야기다. 참혹한 상황에서 가슴 따뜻한 장면이 눈길 끌었다. 어린 소녀 ‘소희’가 탈출하다가 하늘에 껑충 걸린 구름사다리 앞에서 주저한다. 다리 하나 절단된 중년 사내가 소녀를 안심시키려, “다리병신 아저씨가 가는 거보고 따라와 볼래?”하며 앞서 건넌다. 겁에 질려 걸음 떼지 못하는 소녀에게 아저씨는 다시 전래자장가 ‘둥개둥개’를 불러준다. 자장가 소리는 한순간에 팽팽한 긴장을 누그러뜨렸다. 처참한 싸움터를 포근한 엄마 품으로 바꾸었다. 소리에 담긴 추억의 힘이다.

일생을 함께하는 다양한 소리들

우리 조상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소리와 함께 살았다. 엄마 품에서는 자장가 듣고 자랐고, 어린 시절에는 동요 부르며 놀았다. 일할 만큼 자라고 나면 노동요를 불렀다. 농사일에는 모심기 소리 같은 농요를, 고기잡이에는 그물 당기는 소리 같은 어로요를 불렀다. 여인들도 집안일을 하고 길쌈을 하며 소리했다. 홀로 부르기도 했지만 여럿이 일할 때는 함께 했다. 노동요는 일꾼들의 동작을 맞춰주고 힘을 돋궈준다. 신명나게 소리를 하다 보면 고단함도 덜게 되고 시름마저 잊게 된다.

의식을 올리거나 놀이를 할 때도 소리가 빠지지 않았다. 명절에는 농악대 앞세워 마을을 돌며 지신밟기 했다. 태평소, 징, 괭가리의 드센 소리는 사람들 마음을 휘어잡았다. 소리로 사람을 모으고 마음을 모아서 마을의 안녕과 저마다의 복을 빌었다. 액운이 닥치면 천지신명께 빌거나 무당을 불러 굿을 했다. 죽음에 이르러서는 상여소리 들으며 저승길에 올랐다.

악기가 없으면, 손에 잡히는 무엇이든 두드리며 흥을 돋웠다. 경상도 산간 마을에는 장가 못간 노총각 나무꾼의 신세타령 ‘어사용’이 전해 온다. 나무꾼은 지개 작대기로 지개 다리를 두드리며 처량하게 소리를 했다. 강원도에서는 물 항아리에 박을 엎어 띄우고 두드리며 ‘정선아라리’를 불렀다. 제주도에서는 해녀들이 물 허벅 장단에 ‘이어도 사나’를 했다. 한 때 술자리에서 젓가락 장단에 노래 부른 것도 이런 내력 때문일까. 우리 민족은 아주 오래 전부터 소리를 통해 즐거움과 위로, 그리고 삶의 원동력을 얻어왔다.

우리 소리를 찾아 떠났던 특별한 여행

민요는 조상의 삶의 모습과 지혜가 고스란히 담긴 귀중한 민속자료다. MBC 라디오에서는 지난 1988년부터 8년 동안 사라져가는 우리 소리를 찾아서 악보집을 만들고, 음반을 내는 ‘한국민요대전’ 사업을 펼쳤다. 필자는 ‘경상북도’ 편을 맡아 3년 동안 경상북도 마을을 다니며 소리를 찾아내어 그 당시 막 등장한 디지털 테이프 녹음기DAT에 담아냈다. 귀한 소리는 영구보전하기 위하여 따로 골라 CD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 CD는 악보가 들어간 해설서와 함께 민요를 연구하는 분들에게 나눠드렸다. 23년 전 일이니, 소리해준 어르신 중 적지 않은 분들이 이미 세상을 떠났을 게다. 소리를 통해 쌓은 추억들 때문에 소리는 나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최근 국립민속박물관과 국립국악원이 공동으로 기획한 ‘소리의 만남, 생각, 추억’ 도록을 만나게 되었다. 과거인의 소리에 대한 인식을 예악과 종교적 관점에서 뿌리부터 살피고, 그림과 악기로 남아 있는 소리의 자취를 학술적으로 정리한 10년 전 자료였다. 도록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마주한 악기, 그림, 악보, 책, 생활 물품들에서 소리 찾아 헤매던 옛 기억이 떠올랐다. 이 나라 구석구석 외진 곳 찾아다니며 그곳에서만 독특하게 들을 수 있는 소리, 그곳 사람들 생활이 짙게 배인 소리를 담아내는 라디오 다큐멘터리 ‘한국 기행, 고향의 소리’ PD로 꽤 오랜 시간 살아왔기 때문이다.

“PD라면 취재도 하고, 글도 쓸 줄 알아야지.” 1983년, 라디오 PD로 입사하자마자 ‘고향의 소리’를 맡았다. 6개월 수습을 마친 새내기는 녹음기를 하나 달랑 들러 매고 길을 나섰다. 가정이 넉넉하지 못해 변변한 여행 한번 못해 봤기에 꿈길 같았다. 첫 출장지로 강원도 정선을 골랐다. 청량리에서 밤기차 타고 새벽에야 정선에 다다랐다. 보태서 말하자면, 하늘이 우물 만해 보이는 첩첩산중. 애절한 정선아라리가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고장이었다. 그 후로도 주로 외진 곳에 갔다. 이런 저런 소리기행 프로그램 만드느라 산골, 들녘, 섬에 사는 사람 소리를 10년 넘게 찾아 다녔다.

소리에서 우리의 모습을 찾다

독특한 소리가 고파지면 으레 절을 찾았다. 사찰은 음향의 보고다. 산새 소리, 바람 소리, 계곡물 소리도 좋지만 불가에서 행해지는 의식 소리는 색다르다. 땅거미 질 무렵 구례 화엄사에 이르렀을 때다. 사물이 울렸다. 어둠이 내리는 산중에 울려 퍼지는 범종, 법고, 운판, 목어의 사물소리는 하늘과 땅을 흔들고 마음마저 뒤흔들었다. 만물이 그 소리에 잠기는 듯했다. 사물소리가 잦아들면서, 까만 하늘에 켜진 무수한 별빛 아래, 법당 예불 소리가 절 마당에 번져나갔다. 산사의 음악회였다.

‘소리’ 기획전 도록을 넘기다보니 사진 하나하나마다 소리가 울리는듯하다. 소리 작업을 오래하다 보니 그림이나 글자만 보고도 쉽게 소리를 떠올리게 된다. 음악가가 악보만 보고도 멜로디를 듣는 것과 같은 이치다. 방울, 말방울, 요령, 세월이 켜켜이 쌓인 유물에서 옛 소리 흔적이 느껴진다. 신사임당의 ‘초충도’에는 꽃과 곤충이 어우러진다. 나비, 잠자리, 베짱이 심지어 달팽이도 그려있다. 전래동요에도 그러한 동물들이 나온다. 달팽이 놓고 ‘하마하마 춤춰라’, 잠자리 잡아놓고는 ‘철갱이 꽁꽁, 앉은뱅이 꽁꽁’하며 놀려댔다. 민속학자 이보형은 전래동요는 우리 음악의 원형이라고 했다. 전래동요에는 그 시대 어린이들 정서와 살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다.

요즘 적지 않은 이들이 이어폰 끼고 산다. 자연의 소리를 막고 이웃의 소리를 닫고 달팽이처럼 소리 감옥에 갇혀 산다. 귀한 내 자식을 위하여 인공지능 스피커AI Speaker를 구입한 엄마 아빠도 늘어간다. 일하느라 바쁘고 지친 부모는 인공지능 스피커로 자장가, 동요, 동화를 들려준다. 엄마가 없는 자장가, 생활이 빠진 소리다. 앞으로 아이들은 자연도, 생활도, 따스한 마음도 사라진 메마른 소리만 듣고 자랄지 모르겠다. 소리에 담긴 추억도 사라질지 모른다. 그래서 소리를 찾는 일, 소리에 담기 추억을 되새기는 일이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일 테다.

| 소리 – 만남, 생각 그리고 추억
글_김승월 |인하대 언론정보학과 강사
전 MBC 라디오 PD로 한국민요대전 ‘경상북도’ 편, 한국기행 ‘고향의 소리’, 격동 50년 등 연출했다. 1993년 ABU 전통음악부문 대상, 1999년 라디오프랑스 소리창조 부문 최고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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