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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그랬지

커피

 

ee_말따옴표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그대 올 때를 기다려 봐도
웬일인지 오지를 않네
내 속을 태우는구려
8분이 지나고 9분이 오네
1분만 지나면 나는 가요
난 정말 그대를 사랑해
내 속을 태우는구려

불세출의 아티스트 신중현이 만들고 펄시스터즈가 부른 노래 ‘커피 한 잔’은 지금 들어도 전혀 낡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요즘 아이돌 그룹의 댄스곡들과 견주어 봐도 그 리듬이나 멜로디가 전혀 촌스럽지도 않다. 당시 이 노래를 부른 여성듀오 그룹 펄시스터즈는 끼와 매력이 철철 넘치는 자매 듀오그룹으로,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를 풍미했다.

다만 요즘 신세대들이 듣는다면 노랫말이 낯설 수밖에 없다. 왜 커피 한 잔을 놓고 하염없이 오지도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가. 바로 안 오면 카톡을 하면 되고, 전화를 해봐도 될 텐데 말이다. 하긴 요즘 같은 스마트한 시대를 사는 신세대들은 핸드폰은 물론 전화기가 귀했던 시절의 데이트 풍경을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약속장소를 잘못 알고 가서 썸 타던 상대를 기다리다가 끝내 이별하는 커플부터, 약속 시간에 늦어 허겁지겁 갔지만 간발의 차이로 애인을 바람맞히기도 했던 그 풍경을 어찌 알 수 있을까. 남자친구나 여자친구 집에 전화를 걸면 어김없이 부모님들이 받아서 매정하게 끊어버리던 시절의 연애담은 먼 얘기가 되고 말았다.

펄시스터즈 ‘특선집’ LP음반, ‘커피한잔’ 등이 녹음된 음반 _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커피의 첫 이름, 검고 쓴 탕약 ‘양탕洋湯국’

각설하고, 기껏해야 1세기밖에 안 된 대한민국의 커피문화는 가히 폭발적이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 봐도 우리나라처럼 커피숍이 많은 나라를 찾기 힘들다. 심지어 스산한 날씨 때문에 커피의 본고장으로 인식되고 있는 미국 시애틀에 가도 서울처럼 커피숍이 많지 않다.

우리가 외래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스펀지 같은 유연함이 있지만 커피의 확산은 실로 놀랄 만큼 빠르다. 그 시작은 어디쯤이었을까? 1890년대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유학생 신분으로 <서유견문록>을 쓴 유길준은 “우리가 숭늉을 마시듯 서양 사람들은 커피를 마신다”고 썼다. 유길준이 마셔보고 신기해했던 커피는 임오군란 이후 서양의 갖가지 문물이 들어오면서 함께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1910년 전후 종로통 시장상인들은 서양인들이 권하는 커피를 마셔본 뒤 ‘양탕국’이라고 불렀다. 마치 생긴 것은 한약을 달인 것처럼 검고 쓴 탕약을 닮았는데 서양인들이 주로 마신다고 하여 ‘양탕洋湯국’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처럼 재치 넘치는 양탕국을 대한제국 시절에 마시던 그 방법으로 재현하는 곳이 있다. 경남 하동의 지리산 자락에 있는 양탕국 커피 문화마을이 그곳이다. 지난해 여름 지리산 여행길에 그곳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사발에다 마시는 커피맛이 일품이었다. 커피값이 다소 비쌌지만 한옥에 앉아 커피를 마신 뒤 대한민국 커피의 역사를 정리해놓은 전시관들을 둘러보면서 여유를 즐길 수 있다. 또 단기 바리스타 과정도 운영하는 등 한국적인 방법으로 마시는 커피문화를 확산시키기 위해 애쓰는 공간이다.

양탕국 커피문화마을 카페 전경 _출처 양탕국 커피문화마을

 

영화 <가비>(2012년작)에서 고종은 “나는 가비의 쓴맛이 좋다. 왕이 되고부터 무얼 먹어도 쓴맛이 난다. 헌데 가비의 쓴맛은 오히려 달게 느껴지는구나”라고 가배咖琲, 즉 커피의 맛을 표현한다. 영화는 1896년, 고종(박희순)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해 대한제국을 준비하던 때를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러시아 대륙에서 커피와 금괴를 훔치다 러시아군에게 쫓기게 된 일리치(주진모)와 따냐(김소연)는, 조선계 일본인 사다코(유선)의 음모로 조선으로 온다. 고종의 곁에서 커피를 내리는 바리스타가 된 따냐, 그녀를 지키기 위해 사카모토(주진모)란 이름으로 스파이가 된 일리치, 그들은 사다코로 인해 은밀한 고종 암살작전에 휘말리게 된다는 스토리다. 이처럼 1세기 전 커피는 황족이나 양반이 마시던 귀한 음료였다.

다방문화부터 현대인들의 필수음료가 되기까지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면서 우리보다 먼저 커피를 즐겨온 일본인들의 영향으로 명동, 충무로, 종로 등에 다방이 생기기 시작했다. 시인 이상이 1933년 종로통에 <제비다방>을 열었고, 그 뒤에도 한두 곳의 다방을 열었지만 번번이 망했다는 기록도 있다. 또 한국전쟁을 전후해서는 명동을 중심으로 탤런트 최불암씨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다방 <은성> 등이 번창하면서 문인들의 아지트 역할을 했다. 예나 지금이나 가난한 문인들은 다방에 나와서 술 한 잔 마실 친구도 찾고, 시국토론을 벌이는가 하면 원고청탁을 하는 공간으로도 이용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급격한 산업화를 거치면서 커피가 일반 시민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특히 소위 속칭 ‘분당커피’파우더와 설탕을 섞은 커피로 불리는 인스턴트커피가 보급되면서 커피는 일상의 음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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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부터 커피는 다방의 확산을 통해 온 국민의 사랑을 받는다. 대학가에서는 DJ들이 팝앨범을 선곡하여 틀어주는 음악다방이 주류를 이뤘고, 시장통이나 직장인들이 밀집한 지역에서는 다방마담과 레지차 나르는 여성로 대변되는 접대용 커피숍이 성행했다. 대학생이라면 비틀즈나 밥 딜런, 퀸이나 딥 퍼플 등의 음악을 신청해놓고 커피를 한 잔 해야 폼 나던 시절이었다. 또 한 편에서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입은 마담과 야한 차림의 레지에게 커피를 한 잔 시켜주고 슬쩍슬쩍 농담을 던지는 중년들이 있었다.

요즘은 집에서도 커피메이커나 반자동 에스프레소 머신 등으로 원두에서 추출한 커피를 마시는 시대지만 다방이 존재하던 시절에는 커피맛 보다는 커피가 주는 ‘고급스러움’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지금은 훈련된 바리스타가 내려주는 커피를 마시면서 ‘신맛, 쓴맛, 단맛’을 구분해내고, 커피 원두의 원산지를 척척 알아맞히는 커피 애호가들이 즐비하다. 그만큼 커피는 이제 현대인들의 필수 음료가 된 것이다.

그러나 커피는 그 자체가 주는 맛과 향보다는 커피와 함께 쌓여온 우리네 장삼이사들의 역사가 더 재미있다. 지금은 중견연기자로 더 유명한 형제 그룹사운드 <산울림>의 맏형인 김창완이 만들고 노고지리가 부른 ‘찻잔’을 소개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ee_말따옴표너무 진하지 않은 향기를 담고
진한 갈색 탁자에 다소곳이
말을 건네기도 어색하게
너는 너무도 조용히 지키고 있구나
너를 만지면 손끝이 따뜻해
온몸에 너의 열기가 퍼져
소리 없는 정이 내게로 흐른다.

갑자기 한 잔의 커피가 마시고 싶어진다.

글_ 오광수 | 경향신문 부국장·기획위원 /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20여 년간 주로 문화 분야에서 기자로 일해 왔다. 1986년 동인지 《대중시》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으며, 대중음악의 노랫말에 얽힌 사연을 담은 에세이집 《톡톡 튀는 가수 이야기》와 시해설집 《시는 아름답다》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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