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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한 민속

20세기 충남 남부의 보부상은 어떻게 되었을까?

 

한국의 대표적인 상인집단으로서는 전국 광역 네트워크를 가졌던 개성상인을 들 수 있지만, 지역상인 집단으로 대표적인 존재는 보부상일 것이다. 한국의 서민 문화를 전시하고 있는 국립민속박물관 2관에는 ‘부보상과 객주’ 코너에 보부상의 물질문화가 일부 전시되어 있다. 전시품을 보면, 19세기 후반에 작성된 임명장 2점, 인장, 부상계첩, 대한제국상업빙표, 멜빵과 멜빵 고리 각 2점 등 총 9점이다.

 

최근 지역 정체성을 표상하는 문화의 하나로 보부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와 함께 그동안 간과되어 왔던 보부상 유품들이 경남 울산, 진주 등지에서 계속 공개되고 있다. 보부상은 19세기 중반 중앙정부가 지역 단위의 조직들을 전국 단위로 조직한 조직이기에, 사실 모든 지역에 관련 유품이 남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1992년 경남 고령과 창녕이 각각 추가되었을 뿐, 1980년대까지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된 보부상 유품은 모두 충청남도에서 발굴해 지정된 것들이다. 중요민속문화재 1973년 부여홍산유품, 1976년 예덕유품, 1980년 부여임천유품, 여기에 1992년 원홍주육군상무사유품 등 중요민속문화재 제30-1호부터 4호까지 모두 충남 남부와 북부 지역에서 활동하던 보부상들이 남긴 유품이다. 유독 충청남도의 유품이 관심을 받게 된 것은 1990년대까지 보부상에 대한 관심이 적었던 것과도 관련이 있겠지만, 충남 보부상 조직의 지역적 특성과도 밀접히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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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연구들에 따르면, 지방정기시를 돌아다니거나 물자를 육로로 운반해 판매하던 장돌뱅이들의 조직인 보부상단은 19세기 중반부터 국가로부터 공인을 받기 시작해, 대한제국기를 거치며 전국 단위 조직으로 급속히 확대되었다. 그러다 대한제국 이후 전국 조직은 점차 해체되었으나, 각 지역의 보부상단은 해체되지 않고 유지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러한 조직들의 존재양상은 어떠했는지, 각 지역의 보부상단의 지역적 특성이나 차이는 무엇이었는지 등 민속학적 논의는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보부상단의 지역적 존재양상이나 특성들은 그에 대한 충분한 자료가 축적되지 못해 앞으로 설명될 수 없을 가능성이 높다. 필자는 비록 완결된 조사는 아니지만, 앞의 물음에 단서를 제공하는 한 사례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이 사례는 2009년에 수집한 서천군 판교면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보부상단에 대한 것이다.

 

금강 하구에서 북쪽으로 약간 떨어져 위치한 충남 서천군 서면은 조선 후기 한반도의 서안에서 3번째로 큰 어촌이 있던 지역이다. 30명 이상의 선원이 “망선”이라고 불리는 배에 탑승해 수백 킬로미터를 이동하며 조업하는 어업 형태가 발전한 곳이다. 지금도 홍원항, 마량항 등 주요 항구가 위치해 있다. 또, 어촌뿐 아니라 서천 서면과 보령 남포 주변에는 염전이 발달해 소금 생산도 많았다. 보부상 중 부상, 등짐장수는 이러한 어촌이나 염전에서 물고기나 소금을 받아 ‘4일 비인장, 5일 판교장, 6일날 간치장’ 등 주변 정기시를 돌며 판매하는 상인을 의미했다. 이러한 장시 네트워크는 해안과 내륙을 연결했는데, 즉 서천 연안의 물자를 산 중의 시장에서 가져가거나 거기서 다시 더 내륙으로 이동해 부여 평야의 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부여 홍산장까지 가져다 팔았다. 이 과정에서 월명산298m과 천방산324m 등 직선거리로 25km 정도 펼쳐진 수많은 고개를 넘어야 했다. 이러한 거리를 극복해, 연안 어촌과 내륙 농촌 간을 연결하는 유통업자인 부상 혹은 등짐장수가 존재했다.

 

그런데 보부상 유품은 남긴 이들은, 적어도 일제강점기 이후로는 위에서 상상했던 장돌뱅이로서 보부상과는 전혀 다른 존재일 수 있다. 서천과 부여를 잇는 네트워크의 중심에는 서천군 판교면 중심의 판교장이 있었다. 여기서는 당시 판교장에서 만났던 몇 분의 이야기를 담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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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五万分一地形圖, 편찬자 조선총독부, 1917년 측정, 1919년 인쇄

 

광복 이후 상황을 보면, 이 보부상단은 본래의 등짐장수와 같은 존재는 아니었다. 조OO씨1928년생, 남에 따르면, 등짐장수는 실제 장사는 하지 않는 조직체만 남아 있었고 ‘양반’이었다. 이들은 ‘연락’을 해서 대표로 우두머리인 ‘시체영감’을 선출했다. ‘시체영감’ 임기를 마치고 나면, 나중에 고문처럼 ‘영우영감’을 했다. 박OO씨1934년생, 남는 이에 대해 실제로 어물을 짊어 나르던 이들도 등짐장수라고 부르긴 했지만, ‘등짐장수’ 조직에도 가입할 수 없었다. 그에 따르면, “주로 돈이 있고 지역에서 행세하고 싶은 사람들이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재산을 내놓고 가입을 해서 대우를 받는 것”라고 했다. 시체영감은 수입은 없지만, 재산이 있고 지식과 힘이 있는 사람이 많은 돈을 내어가며 ‘영감님’이라는 명예직을 얻었다. 그는 등짐장수가 ‘원래의 어른’이라고 말하며, 논 두 마지기를 팔아서 시체영감을 한 사례를 언급했다.

 

조OO씨는 이러한 등짐장수 외의 장돌뱅이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서천을 비롯한 충남 남부 지역에는 중요한 특산품이 있었다. 전국 유통이 활발해진 19세기 중반경이면 각 지역별로 특산품이 유명해지는데, 이곳의 특산품은 모시였다. 한산모시로도 유명하지만, 1970년대까지 모시는 이 지역의 가장 중요한 농촌수공업품이었다. 생산자인 여성들은 직접 모시를 가공해 완제품을 생산하기도 했지만, 일부 가공된 모시를 시장에서 구입해 완제품을 팔았다. 흔히 이러한 모시 가공품의 유통을 담당했던 이들을 ‘좌상’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진짜 장돌뱅이로 포목장사 등을 운영하며, ‘시체영감’과 조직원으로 ‘반수’, ‘총각대장’ 등을 두고 있었다. 모시 관련 업종은 늦게까지 상업조직으로 건재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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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OO씨1926년생, 남에 따르면, 이들은 시장의 자릿세와 관계하기도 했고 “예전에는 군수보다도 권력이 막강해서, 잘못한 사람이 있으면 총각대방이 집 앞에 데려와 볼기를 때리기도 했다.” 충남의 보부상은 알려져 있듯이 시장에서 ‘공문제’라고 부르는 큰 축제를 벌인다. 장돌뱅이들과 시체영감들이 돈을 내서 벌이는 “시체영감 행사는 축제 복장을 갖추어서 큰 행사”로 “시골에서는 그런 행사가 없다.” 반면, 등짐장수의 행사는 좌상들의 시체영감 행사와는 상당히 달랐던 듯 보인다. 1970년대 등짐장수의 시체영감을 역임했던 사람의 아들은 아버지가 큰 빚을 져서 열었던 시체영감 행사를 집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연 큰 잔치처럼 설명해 주었다.

 

요컨대, 보부상 중 등짐장수 조직은 양반과는 상이한 지역 유지들의 네트워크로서의 성격이 강했던 듯 보인다. 같은 해 필자는 서천 서면의 한 어촌에서 1910년 ‘비남좌지사소임책庇藍左支社所任冊’에 접장으로 올라와 있는 이의 손자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조부가 부상단에 대해서는 몰랐지만 ‘접장’이라는 직위를 역임했다는 점은 알고 있었다. 그는 조부가 한학을 가르치는 훈장이었고, ‘접장’ 역시 그와 관련한 직위였다고 설명했다. 비록 파편적으로 제시하기는 했지만, 이 같은 사례들은 조선 후기 상인조직의 특성이나 조선 왕조의 붕괴 이후 지역 상업 조직의 변화상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글_오창현 ㅣ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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