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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민속보고서

가르침과 배움, 그 아름다운 이름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다. 배움의 길은 숭고하기도 하지만 가난한 현실에서 보면 눈물겹기도 하다. 대학이나 대학의 연구실을 상아탑이라 칭하기도 한다. 이 말의 반대어로 우골탑이란 말이 회자된 적이 있다. 우골은 학비 마련을 위해 학부모가 내다 판 소의 유골을 뜻한다. 학생의 등록비를 재원으로 하여 건물이 섰다 해서, 대학을 빈정대어 이르는 말이다. 한국의 부모들은 끼니를 굶고 허리띠를 졸라매면서까지 자식들의 교육에 전념하였다. 그 때문에 우골탑 신화를 통해 ‘개천에서 용이 나는’ 일도 허다했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개천에서 용이 날수 없다는 신념이 화석처럼 굳어져 버린 사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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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교육헌장 그림책, 1971년 _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사회생활에 필요한 지식이나 기술 및 바람직한 인성과 체력을 갖도록 가르치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활동을 교육이라고 한다. 인간이나 사회는 이 교육을 통해 끊임없이 발전해왔다. 교육의 3요소를 말하라면 선생님, 학생, 교과서교육과정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전시도록 『선생님, 학생, 교과서』 – ‘가르침과 배움의 역사’를 보면 우리나라의 교육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도록을 통해 전통 사회의 교육, 근대교육, 일제 강점기의 교육, 미 군정기와 전쟁기 교육, 현대의 이념교육 등을 살필 수 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에는 책상이 부족하여 교실 마룻바닥에 엎드려서 공부한 적도 있었다. 교과서도 부족하여 책을 필사하여 배운 적도 있다. 소풍을 갈 때에는 메뚜기나 멸치 볶음 같은 반찬으로 양은도시락을 가져갔으며, 물통에 보리차를 끓여 갔던 기억이 새롭다. 쥐들이 많아, 쥐잡기 운동을 벌여 죽은 쥐꼬리를 잘라오라는 숙제를 내주기도 했고, 파리를 박멸하겠답시고 죽은 파리를 성냥갑에 담아가는 숙제를 하기도 했다. 그 시절 곤충채집과 식물채집은 여름방학 지정 필수 과제였다.

추석이 지나고 열린 가을운동회는 그야 말로 마을의 잔칫날이었다. 운동장 둘레에는 과자, 군밤, 엿, 장난감 등을 파는 장수들이 진을 치고 공중에는 만국기가 펄럭였다. 운동복을 차려입은 학생들은 확성기 구령에 맞춰 보건체조를 하고, 집단 행진을 하고, 마스게임을 했다. 기마전과 줄다리기, 조립체조, 차전놀이는 운동회의 필수 경기였다. 나도 달리기를 잘하는 편이어서 계주 선수로 나갔는데, 구경꾼들의 떠나갈 듯한 함성소리를 들으며 달리던 기억이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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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회 때 사용되었던 체육복, 바톤, 응원도구, 모자 _김영준‧김덕현‧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우리 군에서는 매년 군내 초등학교를 순회하며 학교대항 체육대회를 열었다. 내가 4학년 때 우리학교에서 군 체육대회가 열렸었다. 그 때 처음으로 첨성대처럼 만든 성화대에서 불타는 성화를 보았고, 우리학교 선수들을 목이 터져라 응원했던 기억도 잊히지 않는다. 6학년 때인 10월 하순에는 서울로 수학여행을 갔던 일이 새롭다. 창경궁과 경복궁도 구경하고, 기차를 타고 인천 자유공원에 가서 늠름한 맥아더장군의 동상도 보았다.

중학교에 진학할 때에는 시험을 보아서 들어가던 입시제도가 있었다. 그 때문에 6학년 1년 동안은 열심히 뛰놀던 생활을 청산하고 공부에 매진해야 했다. 나는 면소재지에 있는 학교를 다녔는데,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시골이라 호롱불 밑에서 공부를 해야 했다.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불철주야 우리를 열심히 지도해주었다. 당시에는 교과서에서만 문제를 출제했기 때문에 교과서를 달달 외웠다. 심지어는 음악교과서의 음표 가락까지 줄줄 외워야 했다. 뿐만 아니라 체력장 시험도 있어서 달리기, 멀리뛰기, 턱걸이, 던지기 등 네 종목의 시험을 보아서 만점을 맞지 못하면 일류중학교에는 합격을 할 수 없었다.

나는 코피를 쏟아가면서까지 열심히 공부하여 전라북도 지방에서는 소위 일류학교로 통하는 전주북중학교에 합격하였지만, 중학교 입시제도는 1년 후배까지만 실시되었고 무시험 전형으로 바뀌었다. 전주북중학교는 일류 중학교 폐지 방침에 따라 폐교가 되었다.

중학교 1학년 때 고향 마을에도 전기가 들어오고, 중학교 3학년 때에는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어 농촌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중학교 때에는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많이 읽었다. 고등학교 때에는 소설을 쓰기도 했고, 교지 편집위원으로 교지 활약하기도 했다. 1974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에 교육대학에 진학하였다. 교대를 다니면서 학보사 기자와 편집국장을 맡았는데, 후에 현장에 나와 동화 작가가 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1977년 3월부터 교직에 몸담고 있으니 40년 동안 교육자의 삶을 살아왔다. 새내기 교사 7년 동안은 전라북도의 산촌인 순창 쌍치와 어촌인 김제 심창에서 교사로 있었다. 순창에서 근무할 때부터 동화를 써서, 여러 신문에 투고 형식으로 동화를 발표했다. 아이들에게 동요를 많이 가르쳐 주고 내가 쓴 동화도 많이 들려주었다. 학예회 때에는 합창을 지도하여 부르게 했고, 운동회 때에는 조립체조를 가르치기도 했다. 내가 교직 40년을 돌아볼 때 그 때가 가장 보람 있고 열정적인 시절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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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급문고 설치를 권장하는 포스터 _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이렇게 산전수전을 다 겪고 1984년부터 서울에서 근무하였다. 1984년 서울에서 교사로 있을 때만해도 반 학생수가 60명 가까이 되었고, 2부제 수업을 하는 학교도 있었다. 일제고사를 치러 반별로 성적을 비교하기도 하던 시절이었다.

1980년대만 해도 집이 가난하여 도시락을 못 가져오는 학생들도 있었고, 학교급식비를 내지 못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돈이 없어 수련활동이나 수학여행을 못가는 학생들도 많았다. 지금은 무상급식에, 대부분의 학습 준비물들도 학교에서 무상으로 준다. 장작난로에 몸을 녹이며 거친 마분지에 몽당연필로 글씨를 쓰고 자란 우리 세대와는 격세지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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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걸어온 학창시절과 40년 교직의 길을 되돌아보니 참으로 변화무쌍했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추억은 아름답고, 노력은 쓰나 그 열매는 달콤한 법이다. 쓴 열매를 먹지 않으려는 요즘 아이들을 어떻게 달래가며 교육할 것인가? 때로는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지만, 지난 학창시절과 교직생활이 아름다운 추억과 보람으로 다가온다.

| 전시도록 <선생님, 학생, 교과서 – 가르침과 배움의 역사> PDF
글_ 박상재 | 서울당중초등학교 교장 / 아동문학가
단국대학교 대학원에서 현대문학을 전공하고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40여 년간 초등학교에 근무하며 아동문학가로 활동해 왔다. 1984년 한국일보신춘문예에 동화가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왔으며, 《원숭이 마카카》, 《달려라 아침해》, 《개미가 된 아이》 등의 동화집 80여권과 《한국창작동화의 환상성 연구》, 《한국동화문학의 어제와 오늘》 등을 펴냈으며, 방정환문학상, 남강교육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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