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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그랬지

1990년대 아파트 풍경

 

경부고속도로 주위에 늘어선 아파트 곁을 달리다가 한국민속촌에 들어갔을 때, 완전히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오랜 시간 이어져 내려온 민속에 관한 이야기 속에 빠져 있다가 갑자기 ‘아파트’를 이야기하는 이 글을 읽을 때 느끼게 되는 이질감이 그와 비슷한 느낌이 아닐까.

 

‘민속’과 ‘아파트’가 만들어 내는 낯선 조합만큼, 푸근하고 정겨움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고향’이라는 단어 역시 아파트와는 어색하고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하지만 외래에서 들여온 낯선 집이 이 땅에서 솟아난지도 벌써 수십 년이 지났고, 그 사이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들은 아파트를 자신의 고향이라고 이야기하는 어른이 되었다. ‘아파트가 고향이라니….’ 어딘지 모르게 안쓰럽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아파트에 대한 온갖 부정적인 시선들을 다 걷어내고 나면 ‘보통 사람들이 일상을 살아가는 집’이 남는다. 그리고 ‘집으로서의 아파트’에서 보낸 나의 유년 시절은 참으로 행복했다는 놀라운 이야기를 오늘 전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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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반포에서 시작된 주공아파트 건설 붐은 잠실을 거쳐 서울의 동쪽 끝까지 이어졌고, 그 덕분에 나의 고향 둔촌주공아파트가 만들어졌다. 서울의 변두리에 새로 지어진 동네인 만큼, 살림을 꾸린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고만고만한 가정들이 몰려들었고 온 동네에 또래 아이들이 넘쳐났다. 6,000세대 가까이 되는 초대형 단지로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 살았고, 놀이터만 12곳을 품고 있는 참으로 거대한 세상이었다. 집 밖으로 나가면 언제라도 동네 아이들을 만나 놀 수 있었다. 조금 지루해지면 작은 오솔길로 연결된 다른 놀이터로 ‘원정’을 떠났다. 동과 동 사이에 펼쳐진 잔디밭 위에서 야구를 하고, 잠자리도 잡았다. 겨울이면 경사진 언덕에 모여 눈썰매를 타고 눈사람도 만들었다. 함께 놀던 동네 아이들을 학교에서도 계속 만날 수 있었고, 함께 등하교하며 우정을 이어나갔다.

 

또래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끼리도 쉽게 친구가 되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옆집 아이와 아주머니가 우리 집에서 다과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자주 있었다. 음식을 나누기도 하고, 필요한 물건을 빌려 쓰기도 하는 등 자잘한 일부터 가정의 대소사까지 서로 챙기며 의지했다. 무더운 여름이면 마주 보는 대문을 열어놓고 맞바람을 즐겼고, 마음이 맞는 이웃끼리 함께 피서를 떠나는 경우도 있었다. 복도나 엘리베이터에서 이웃을 마주치면 인사를 나누는 것이 당연한 예의였다. 함께 살아가며 생기는 문제들을 조율하기 위해 반상회에 모였고, 떠나는 이웃을 배웅하고 새로운 이웃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리고 매년 가을이면 한 번씩 온 단지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다같이 ‘둔촌 축제’를 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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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흐름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현재의 둔촌주공아파트의 가정 풍경 _촬영 라야

정 없는 삭막한 동네로 아파트를 바라보던 세상의 차가운 시선과는 달리 내 기억 속 어린 시절은 참 따뜻한 일상으로 가득했다. 회색빛 삭막한 도시를 만드는 주범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정작 내가 살던 아파트의 창밖으론 푸른 나무들이 가득했다. 세상에 알려진 아파트의 모습과 그 안에서 자라난 우리가 바라본 아파트의 모습은 달랐다. 아파트에 살았던 사람들이 바라보는 아파트는 추억이 가득한, 언제 가도 따뜻하게 품어주는 고향일 수 있다.

가장 최근에 작업한 네 번째 책 <안녕, 둔촌X가정방문>에서는 둔촌주공아파트에 지금 사는 열두 가정을 직접 방문해서 집을 촬영하고,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기록했다. 한 집에서 30년 넘게 살아온 가정도 있었고, 살림을 꾸린지 이제 막 두 달 밖에 안 된 신혼집도 있었다. 어릴 적부터 자랐던 집에서 다시 자신의 어린 딸을 키우고 있는 집도 있었고, 집주인이 요양병원으로 자리를 옮긴 지 반년이 지나 쓸쓸함이 묻어있는 집도 있었다. 그야말로 열두 집의 삶의 단면을 고스란히 담은 작업이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서 바라본 그들의 삶은 참 다채로웠다. 이 동네에 오게 된 사연도 달랐고, 살아온 이야기와 집안의 풍경이 다 달랐다. 유일한 공통점이라면 자신의 집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다 다른 이야기들이 모일 수 있었던 건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어쩌면 우리들의 삶은 깊이 들여다보면 모두 다 다르다는 것을 얘기해주는 것이 아닐까?

 

재건축을 코앞에 두고 있는 지금, 동네에는 이번 여름부터 주민들의 이주가 진행될 거라는 소문이 가득하다. 건조한 표정으로 침묵하고 있는 아파트는 비록 아주 낡았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여전히 반짝인다. 밤이 되면 하나둘 켜지는 불빛이 건물 한 면 가득 펼쳐지면서 각기 다른 색으로 다채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부디 이 많은 사람의 삶이 이곳에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름답게 빛날 수 있길 바란다. 그리고 재건축 후에 이 터전에서 살게 될 이들의 삶도 아름답고 다채롭게 빛나게 되길 바란다. 그리고 그때에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다양한 삶의 모습을 좀 더 편견 없는 눈으로 편안히 바라볼 수 있는 세상이 오길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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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촌주공아파트의 다양한 삶의 풍경들 _촬영 라야

 

글_ 이인규
서울의 동쪽에 위치한 둔촌 주공아파트를 ‘자신의 고향’이라고 이야기하는 아파트 키드. 재건축으로 사라지게 될 아파트 단지의 풍경과 이야기들을 기록하는 프로젝트 <안녕,둔촌주공아파트>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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