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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그랬지

영화 <사도>

다들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일이 힘든 건 참아도, 사람 때문에 힘든 건 견디기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 스트레스를 주는 사람도 처음부터 나쁜 마음을 먹고 괴롭히지는 않는다. 잘 해보려는 건데 그것이 스트레스가 되는 거다. 관점, 태도, 성격. 이런 것들이 맞지 않으면 같은 일을 해도 몇 곱절 힘이 든다. 아랫사람만 힘든 게 아니라 윗사람도 힘이 든다. 관계란 쌍방의 문제니까.

사람들이 함께 할 때 잘 맞고 안 맞는 건 무엇 때문일까. 기질이라는 것이 적잖은 역할을 하는 것 같다. 타고 나는 것인지 만들어지는 것인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람마다 기질은 다 다르며 유난히 서로 잘 맞는 사람들도 있고 잘 맞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기질이 다른 사람들이 한 운명으로 얽히게 되면 스트레스를 넘어 비극으로 나아간다.

이 대목에서 영화 ‘사도’가 생각난다. 기질이 다른 사내 둘이 아비와 아들의 운명으로 만나 인간사에 흔치 않은 비극으로 치달았던 이야기 말이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사도’는 2015년 추석에 개봉했다. 추석 극장가는 전통적으로 가족 영화가 강세를 이룬다. 한데 작년 추석엔 영화 ‘사도’가 많은 극장에서 가족 관람객을 맞았다. 비극적인 사도세자의 죽음이 권력 투쟁으로 말미암은 게 아니라 아비와 아들의 엇나감, 결국은 가족의 이야기였음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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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도> 포스터 ⓒ쇼박스

 

이준익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 때 서울대 정병설 교수의 ‘권력과 인간’이란 책을 많이 참고했다고 한다. 정교수는 이 책에서 사도세자 죽음의 이유를 사도의 ‘광증狂症’을 기본으로 꼽되 당시 조선의 권력 관계를 촘촘히 들여다 본다. 그러나 감독은 영조와 사도세자, 부자지간에 초점을 맞춰 영화를 만든 것 같다. 그러니 내가 이준익 감독의 ‘사도’에서 아비와 아들을 본 것은 지극히 당연했고, 그 속의 기질 차이가 가져온 비극이 크게 보였다.

유유상종이라 했던가? 비슷한 사람끼리는 쉽사리 어울린다. 특히나 아버지들은 아이가 자신을 닮으면 무척 좋아한다. 그런데 사도는 아비, 영조와 기질이 매우 달랐다. 달라도 너무 달랐다. 출생에 콤플렉스가 있었던 영조는 매사 완벽주의자였고, 늦게 본 자신의 아들 역시 학문에 매진하기를 바랐다. 어릴 때의 사도는 영조의 바람대로 총명했고, 그래서 더 아들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아들은 엇나가기 시작한다. 아니, 사도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엇나간 것이 아니라, 사도세자의 자기다움, 기질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리라. 그는 아버지의 바람과는 딴판으로, 학문이 아니라 예술과 무예를 즐기고 유희에 더 마음을 두었는데, 이런 자신을 대하는 아비의 시선이 차가움을 넘어 무시와 경멸로 일관하자 그는 광증마저 드러낸다.

이 두 남자는 만나지 말아야 했다. 아버지와 아들로는 더더욱 만나지 말아야 했다. 결정적으로, 조선에서 가장 힘이 센 남자인 ‘임금’과 그의 아들 ‘세자’로는 만나지 말아야 했다.

물론 둘 사이가 그렇듯 엄청난 비극으로 치닫기까지는 노론과 소론 등 당시의 권력 지형도 영향을 미쳤을 테고, 영조와 사도세자 간에도 많은 사건과 그로 인한 앙금이 쌓였겠으나 내게는 이 비극의 정수精髓가 그 무엇보다 아비와 아들의 기질의 차이로 다가왔다. 다른 기질의 아들에게 아비가 가하는 압박과 그에 반하는 아들의 행태, 그런 것들이 켜켜이 쌓여 치달은 비극으로.

이런 비극은 스케일은 다르나 지금도 집집마다 진행 중인 것 같다. 극장에서 나와 카페에 들어가 앉자 영화를 같이 본 친구가 말을 꺼냈다. 자기 집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그녀의 남편은 제법 유능한 대기업 임원이고, 아들은 서울 소재 대학을 다닌다. 그런데 얼마 전 그 아들이 학점 미달로 제적을 당했다. 명문대를 나와 대기업의 잘 나가는 고위 임원으로 살고 있는 그녀 남편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거다. 온갖 사교육 끝에 대학엘 들여 보냈는데 제적이라니. 남편에게는 아직 알리지 못했다며 그녀가 울먹였다.

여고 시절엔 친하게 지냈으나 오랜만에 만난 터라 그녀 집안의 세세한 사정은 알지 못했다. 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들이 남편의 성에 차지 않은 것은 아닌지. 아들이 아버지와 기질이 많이 다른 것 같다고. 그녀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공부보다 다른 것에 더 관심을 두는 아들을 남편은 마뜩잖게 여겼고, 이를 느낀 아들은 아버지가 어렵고 무서워 아버지 앞에서는 늘 말도 잘 못하고 주눅이 들어 있었다고 했다. 그런 아들이 어찌어찌 대학은 잘 갔는데 결국 그것도 탈이 되었던 모양이다. 대학 이름만 보고 적성에 맞지 않는 학과를 고른 것이 결국은 흥미를 잃고 진도를 쫓아가지 못하게 된 사유가 된 것 같다고. 친구는 이 이야기를 도무지 남편에게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며 눈물을 보였다.

한 세상 살다 가는 우리에게 무엇이 행복일까. 아마도 으뜸은, 기질이 잘 맞는 사람을 만나 가족을 이루거나 운 좋게 친구나 동료, 동지가 되어 오래도록 좋은 관계를 이어 가는 게 아닐까. 큰 스트레스가 사람으로부터 오는 거라면 행복도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일 테니. 운명이 있다면 이런 게 운명이지 싶다. 누군가는 기질이 잘 맞는 상대를 만나 평생을 서로 의지하며 유순하게 살아가고, 누군가는 결코 같이 하기 어려운 기질의 상대와 깊숙한 관계로 얽히는 것. 사도세자는 극단적인 경우지만, 기질의 차이가 가져 온 크고 작은 비극은 지금도 반복되고 있을 것이다.

나도 한 번 살펴봐야겠다. 나와 한 운명으로 얽힌 사람들을. 그들과 내 기질의 같고 다름을. 그로 말미암아 내 인생에도 비극이 손을 뻗쳤는지를.

 

영화 <사도>

1762년, 영조송강호 분가 아들, 사도세자유아인 분를 뒤주에 가둬 죽인 비극적 실화임오화변를 영화로 옮겼다. ‘왕의 남자’를 연출한 이준익 감독의 영화로 600만 이상의 관객이 든, 흥행작이다.
글_ 최인아
“그녀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 “당신의 능력을 보여 주세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 아무 것도 안할 자유” 등의 카피를 쓴 카피라이터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전 제일기획 부사장. ‘알랭 드 보통 인생학교 서울’ 등에서 강의를 하거나 글을 쓰며 올해 8월, 강남 선릉 역 부근에 ‘최인아책방’을 열고 책방 주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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