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충무로역의 플랫폼에서 시작된다. ‘나’는 그곳에서 그녀를 만난다. 그녀의 외모와 자세와 태도는 그를 매료시켰고, 그녀는 그가 자신에게 매료되었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같은 전철의 같은 량에 타게 된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그는 혜화역에서 내려야 한다. 세 정거장만 가면 혜화역. 그녀는 어디에서 내릴까? 혜화역에 내릴까? 내리지 않는다면? 아, 어쩌지?… 고민하던 이 남자가 택한 방법은 이렇다. 무선 호출기를 주고 내리는 것. 호출기, 그러니까 삐삐라고 불렸던 그것이다.
이 삐삐가 전면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1996년 발표된 김영하의 단편소설 「호출」이다. 이 소설은 1997년에 발간된 동명의 소설집에 실려 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의 배경은 1995년 전후가 될 테인데, 당시의 삐삐는 첨단 문물이었다. 핸드폰이 보급될 때와 비슷했다. 처음에는 그 존재만으로도 각광받았고, 그 다음에는 다른 삐삐들과 차별되는 기능이나 심미성으로 경쟁을 벌였고, 그 다음에는 모두가 알다시피 거의 사라져버렸다. 핸드폰이 삐삐를 대체하게 된 것이다.


믿기 어렵겠지만, 삐삐는 ‘혁신적’인 통신 기기였다. 위의 글에도 나와 있듯이 “이동 중에도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러니까 삐삐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이동하면서 커뮤니케이션하는 게 거의 불가능했거나 상당히 어려웠다. 집에 있는 전화로만 약속을 잡을 수 있었고, 약속 장소에 상대가 늦더라도 영문을 알 길 없이 그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집 전화는 지금의 핸드폰처럼 개인 기기가 아니었으므로 독립성(?)을 침해 당할 우려가 상당히 있었다.
다시 소설로 돌아와서, 이 남자는 어떻게 했을까? 정말 삐삐를 주고 내렸을까? 그리고 어떤 말을 하면서? 그는 삐삐를 주면서 무슨 말을 할지 고민했던 거다. 그래서 결과는? 아래에 나온다.
그러니까 남자는 여자에게 삐삐를 준 것이다. 그러고는 호출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여자는 이 남자를 궁금해 하고 있다. 어쩔 수 없다. 삐삐는 여자의 것이 아니므로 번호를 알 수 없고, 삐삐는 여자에게 있으므로 호출할 수 없다. 여자는 호출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삐삐를 둘러싼 이 관계에서 약자다. 기다릴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없다. 그렇다면 남자는 왜 호출하지 않는 걸까? 여자의 짐작대로 바로 호출하기는 좀 쑥스러워서 하루 정도의 말미를 두는 걸까? 아님 나름의 바쁜 일이 있었던 걸까? 정말 그는 오늘 호출할까? 그렇다면 오늘, 언제?
그러면서 여자는 별별 생각을 다 하게 된다. 공상과 망상, 상상, 그리고 추측과 분석. 울리지 않는 삐삐를 보면서 삐삐의 존재와 자신의 존재, 자신과 세상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한다. 그녀에 따르면, 삐삐는 “짐승의 암컷들이 풍기는 암내 같은 것”이기도 하고 “세상 어디선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을 눈동자들”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자신과 세상을 연결해주는 어떤 끈’이기도 하다. 그러니 여자는 일방적으로 건네 받은 이 삐삐를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불쾌하지만 – 그의 호출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이 – 이 불쾌함을 감내하면서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대체, 이 남자는 언제 호출을 하는 걸까? 라며 이 여자와 함께 안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 소설을 읽다 보면. 남자는, 정말, 언제?
남자는 호출을 한다. 소설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 여자의 계속된 기다림은 이제 그만 지연되어야 하고, 소설가의 입장에서 보자면 소설을 마무리 지어야 할 테니까.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되었나? 이런 소설의 결말을 이야기해주는 것은, 개인적으로 영업방해 행위라고 생각한다.
1995년 계간 《리뷰》에 「거울에 대한 명상」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살인자의 기억법》 《너의 목소리가 들려》 《퀴즈쇼》 《빛의 제국》 《검은 꽃》 《아랑은 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소설집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오빠가 돌아왔다》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호출》이 있다. 산문집으로 《보다》 《말하다》 《읽다》 등이 있다.
2012년 문학동네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 2015년 장편소설 《거짓말》로 한겨레문학상 수상. 소설집으로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