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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민속보고서

삶, 밤의 세계로 확장하다

평소 조명을 세부전공으로 연구하며 후학을 지도하고 있는 직업 특성상, 지인의 권유로 민속박물관에서 발행한 <빛 / Light - 燈, 전통과 근대>라는 국립민속박물관 전시도록을 읽어 보았다. 우리나라에서 조명을 주제로 많은 연구가 있어왔지만, 이렇게 체계적이고 방대하게 자료들을 꼼꼼하게 모은 책은 처음 대한다.
 

‘빛’으로 바라다
선조들의 바람과 믿음

 

우리들은 빛을 떠나서 생활할 수 없다. 지구 인류의 탄생이 태양계의 오묘한 섭리에 힘입은 바 크고, 인간의 발달된 시각 덕분에 다른 흉폭한 맹수들을 미리 보고 피하면서 생명을 연장했고, 시각에서 얻어진 방대한 정보처리를 위해 점점 더 지능이 발달하게 되었으며, 만물의 영장이 되었다는 것은 정설이라 여겨진다.
 
142만 년 전쯤 모닥불의 흔적에서 알 수 있듯이 인류가 처음 불을 사용한 것은 추위와 조리를 위한 것이었는데, 이것이 발전하여 조명의 역할로 발전하게 되었고, 처음 기름등잔을 사용하면서 ‘심지’의 기술이 나타났다. ‘심지’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균일한 불꽃을 처음 인류에게 선사했다는 점에서 획기적 인공조명 기술이라 평가된다.
 
보고서에 맨 처음 등장하는 주제는 “빛으로 바라다”라는 것으로, 조명이 단순하게 어두움을 극복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많은 부분에서 선조들이 마음의 염원을 상징화 해 소원을 비는 목적으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었다. 빛은 하나님의 상징이거나 부처님의 광배이거나, 여타의 종교에서 중요한 상징이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 인간의 마음에 직접적으로 작용한다. 때문에 우리 조상들도 다양한 제사와 종교의식, 결혼과 같은 중요한 시점에서 항상 등구를 사용하여 왔다. 감동적인 것은 우리 선조들이 사용해 온 등구의 디자인이 서양의 어떤 디자인 사조에 못지 않게 조형적으로 뛰어나고, 또한 독창적인 아름다움을 준다는 점이다. 완벽한 형태의 모습보다는 소원을 비는 마음처럼 어딘가 부족해 보이지만 간절함이 배어있는 디자인이라는 점에서 또한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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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 쓰인 등구들 _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선비들이 사용했던 등잔에서 받는 교훈도 빼 놓을 수 없다.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지만 밀랍으로 제작된 초는 매우 고가로 거래된다. 왕실과 사대부, 상인 등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선조들은 초를 이용하여 밤에 책을 읽고 문화생활을 즐겼을 법 하지만, 사실 청빈을 좌우명으로 삼아 살아가던 조선 시대의 선비들에게는 쉽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모습으로 생활했을까? 밀랍초보다는 등잔이 더 현실적이었으리라. 등잔의 광량으로 풍족하지는 않았겠지만, LED조명이나 형광등처럼 풍족한 빛 환경 아래서 요즈음을 살아가는 우리들보다 더 생각이 깊고 감성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10와트에 밤을 얻은 사람들
삶이 달라지다

 
보고서에서 조명등구의 사진이나 관련 자료의 충실함은 탁월한데 반해 그 등기구들이 어떤 조명 효과를 주었는지 실질적인 검증과 이를 통해 조상들의 밤의 생활을 그려보는 부분은 조금 아쉬웠다. 물론 이에 대한 연구가 턱없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조명은 밝히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빛과 어둠을 적절히 섞어서 만드는 것이고, 어둠과 그림자야 말로 우리 문화가 가진 최대한의 특질이 아닐까 생각한다. 근대의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원하는 만큼 언제 어디서나 빛을 가질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지만, 정작 우리들은 빛의 홍수 속에서 감성적인 사유는 부족해져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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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무렵, 서양의 영향을 받은 등구들 _국립민속박물관 소장

 
보고서에서는 또한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석유石油와 전기電氣가 새로운 조명의 시대를 열었다”고 하면서 이후 달라진 생활의 변화와 관련 자료들을 정리하고 있다. 전기의 도입과 처음으로 밝혀진 전기불이 켜졌던 1887년 밤으로부터, 1900년 4월 10일 종로에 거리조명용 첫 민간전등이 켜지고, 1901년 8월 17일 진고개와 본정통명동, 충무로에 일본인 상가 주택가에 10촉광燭光의 600등으로 첫 영업용 전등이 밝혀졌다. 한 촉 촛불에, 익숙한 당시 조선인들에게 10촉광의 불빛은 형언 할 수 없는 밝음이었다. 10촉광은 대략 지금의 10와트인데, 보통 가정에서 사용하는 전구가 60와트인 점을 감안하더라도 매우 약하게 생각되겠지만, 칠흑 같은 어둠에 익숙해져 살아가던 선조들에게는 엄청난 문화적 충격이었을 것이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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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4년 창경원 야간 전기 조명, <빛 / Light - 燈, 전통과 근대> 수록 사진
1920~1930년대 각종 신문, 잡지들은 경성의 야경에 대한, 당시 사람들이 가진 전등에 대한 각 가지 다양한 세태를 풀어냈다. ‘수만의 전등불이 사람 없는 거리종로를 비추면 어떤 몽환경 같이 아름답고 찬란’『별건곤』1929년 9월호 하다거나, ‘천만 촉의 휘황 전등불과 아울러 불야성을 이룬 것을 볼 때 실로 별천지에 들어선 느낌’『별건곤』1929년 9월호 이라고 하는 것처럼, 환히 비추는 거리의 가로등, 형형색색의 네온 싸인, 상점내의 진열장의 화려한 조명들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생활을 창조한 기적으로 포장되어 근대에 대한 강렬한 매혹을 불러 일으켰다.
 
이처럼 조명은 근대를 가장 강렬하고 직접적으로 느끼게 하는 프로파간다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또한 밤은 보이지 않는 불안으로부터 가정 내에 은거하여 생활하던 시민들을 거리고 끌어내는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매년 4월경 창경궁의 벛꽃놀이는 새로운 진풍경이 되었으며, 연인들과 호사가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밤의 시간적 체험을 가능케 하였다.
 
 

지금 우리들은 삼천리 방방곡곡 빛조명이 넘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기술의 발전이 이를 가능케 한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 이 민속보고서는 우리들에게 역사를 되돌아보게 하고 빛의 의미를 살펴보게 한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들이 조명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얻은 것과 잃은 것은 각각 무엇인지, 중요한 점은 무엇인지 되돌아 보아야 할 때이다. 양적인 발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둠과 같은 문화적 유산들을 생각해보면서 질적인 조명문화를 만들어가야 할 때이다.

 
 

| 전시도록 <빛 / Light - 燈. 전통과 근대> – PDF
글_ 정강화 | 건국대학교 예술디자인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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