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우리가 알고 있는 해녀는, 까만 고무 잠수복을 입고 커다란 물안경을 쓰고 허리에 두툼한 납이 달린 허리띠를 두른 모습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고무 잠수복이 들어온 것은 불과 40여년 전의 일. 그 전까지 해녀들은 그 차가운 물에 광목으로 만든 옷을 입고 들어갔다. 그들을 한층 더 강하게 한, 고무 잠수복의 이야기를 김창일 학예연구사에게 들어보았다.
“고무 잠수복이 들어오기 전까지 해녀들은 ’물적삼’이라고 하는 윗도리와 ‘물소중이’라고 하는 아랫도리를 입었습니다. 말이 그렇지 결국 광목으로 만들어진 옷이니 얼마나 추웠겠어요. 여름에도 추운데 겨울에는 아예 작업을 할 수 없었습니다. 기록에 보면, 1702년에도 이 옷을 입었다는 것이 발견되는데, 심지어 그때에는 물적삼 없이, 물소중이만 입고 물에 들어갔다고 해요.”


“이걸 입으니 수확량이 기존의 몇 배에 달하는 겁니다. 그럴 수밖에 없죠. 추워서 한 시간 만에 물 밖으로 나오던 것을 이걸 입으니 3시간, 4시간도 버틸 수 있게 됐으니까요. 게다가 부력 때문에 수영이 자유롭고, 물에 떠있기도 편하니 힘도 덜 들고, 날카로운 바위에 부딪혀도 5mm 두께의 고무 덕에 웬만해서는 다치지 않으니 안전하기까지 했죠.”
고무 잠수복은 해녀들의 작업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고무 잠수복으로 인해 해녀들은 더 깊은 곳에서, 더 오랫동안 머물기 시작했고, 도전할 수 없던 곳까지도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수확량이 많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옷이 준 그림자도 있었다. ‘잠수병’이다.
잠수병은 특히 깊은 곳에서 일하는 남자 잠수부 ‘머구리’에게 더 많이 발병했고, 잠수병과 합병증으로 인해 사망하는 잠수부도 생겨났다. 비교적 얕은 곳에서 작업하는 해녀들도 잠수병을 앓는 이가 생겼고, 약을 먹지 않으면 고통을 이길 수가 없었다.

울산, 포항에 설립되다
1970년대, 제주도에 정식으로 고무 잠수복이 수입되긴 하였으나 그 값이 어마어마해 사 입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한 벌에 23,000원. 당시 공무원 월급보다도 비싼 금액이었으니 입는 사람보다 못 입는 사람이 더 많은 형편이었다.
“결국 제주도 해녀들이 의견을 모아 누구도 고무 잠수복을 입지 못하게 하자고 어촌계에 건의합니다. 그래서 모두들 여전히 광목 잠수복을 입고 작업을 하죠. 하지만 이렇게 정해둔 규정 때문에 오히려 육지에서 더 빠르게 보급되었고, 제주도는 훨씬 늦게 입기 시작했어요. 출가 해녀 중 77% 정도가 고무 잠수복을 입을 때, 제주도 해녀는 30% 정도만 입을 만큼 차이가 벌어졌죠.”
그리고 드디어 국내에도 고무 잠수복을 제작하는 업체가 등장했다. 고무 잠수복의 수요가 저러하니 제작사 역시 제주도가 아닌 육지에 설립됐다. 1971년 포항과 울산에 들어선 다음에야 제주도에도 업체가 등장한다.
“특히 울산의 ‘해왕잠수복사’와 ‘울산잠수복사’는 자매가 운영하고 있어요. 우리나라 최초의 잠수복사로, 여전히 잠수복을 만들고 있습니다.”
몇 해 전 울산의 제전마을을 조사하면서 이 고무 잠수복 제작사를 알게 됐고, 지금까지 자신이 조사했던 모든 잠수복이 여기에서 만들어졌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으며, 그래서 좀 더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 제작과정을 살펴보면서 해녀들의 삶의 변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라고 김창일 학예연구사는 말했다.
그런데 해녀가 제주도가 아닌 육지에도 있다는 것은 꽤 낯선 정보다. 현재 제주도에는 4,377명, 육지에는 대략 4천여 명의 해녀가 활동한다고 한다.

출가해녀는 일제강점기, 개화기 때에도 존재했다. 당시에는 일본으로 보낼 우뭇가사리, 천초 등을 채취하기 위해 제주도의 해녀들을 남해안 등지에 배치했고, 그들이 채취한 수확물들은 일본에서 산업, 공업, 식료품의 재료로 쓰였다. 정작 제주도에서는 일본에서 들어온 수백 척의 머구리 배로 인해 해녀들이 일자리를 잃고 먹고 사는 일이 힘들어져 너도 나도 돈을 벌기 위해 스스로 출가해녀의 길을 택하는 일이 많았다.
3년째, 김창일 학예연구사는 대부분의 생활을 조사 나간 바다에서 살고 있다.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아들이 어느날 그러더라고요. ‘우리 아빠는 어부지요?’ 맨날 바다에서 영상통화만 했더니.”
김창일 학예연구사는 남해 바다 출신이다. 수영도 수준급이고 작은 배도 문제없이 잘 탄다. 바다를 조사하기에는 최적의 조건을 갖춘 셈이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도 그를 반긴다. 새벽부터 배를 태우고 나가 그물을 드리우게 하고, 은퇴하면 내려와서 같이 배를 타자고 설득한다. 이 이야기를 하는 김창일 학예연구사의 표정이 썩 나쁘지 않아 보였다. 확실히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10월 말에 다시 울산에 내려가서 ‘기세 작업’을 해야 해요. 바위를 깎는 일인데요, 이걸 잘 해야 미역이 많이 붙습니다. 울산은 옛날부터 진상품으로 미역을 올렸을 만큼 미역이 좋은 곳인데 그만큼 손이 많이 필요합니다. 다 이유가 있죠.”
내년에는 인천 지역을 조사하려고, 사전 조사 중이다. 만일 인천 조사까지 진행하게 되면 동해안과 남해안, 서해안을 모두 조사한, 작지만 위대한 기록을 세우게 된다.
“제 전공은 민속신앙이었지만, 바다 조사를 더해갈수록 어로민속으로 전공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기존에 제주도 해녀를 중심으로 조사되었던 것도 육지 해녀로 확대하고, 나아가 동해안 남해안 어촌 사람들의 삶과 변화 등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발굴해 내고 싶어요. 저에게 그럴 책무가 있다고 생각하고요. 조건이 완비된 상태에서 저의 의지와 열정만으로 현장에 들어가 조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은 저에게는 정말 감사할 일이죠. 조사보고서와 전시를 통해서도 이런 결과를 공유하게 되지만, 더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창일 학예연구사의 아들 이름은 ‘아라찬’이다. 빛나는 바다라는 뜻을 가졌다. 바다에서 태어난 것이 운명이었다면 바다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은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는 셈이다.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이 이렇게 바다의 민속을 연구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눈에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 바다 속, 그 어둠을 가르는 해녀들의 물질까지도 이렇게 알 수 있으니.
글_ 편집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