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민속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유물 중에는 일반인에게 낯선 유물이 한 점 있다. 바로 ‘규문수지여행지도閨門須知女行之圖’인데, 일종의 보드게임Board game이라 할 수 있는 조선 시대 놀이판이다. 주로 조선 시대의 특정 사대부가士大夫家 여성들이 즐겼던 것으로, ‘규중의 여성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閨門須知 여성의 행실에 관한 판女行之圖’이라는 비교적 긴 이름을 가졌다. 이름에 ‘圖도’자가 붙은 것은 ‘그림’이라는 뜻보다는 승경도陞卿圖, 승람도勝覽圖, 성불도成佛道처럼 놀이판Board이라는 개념이 반영된 결과이다.
보드게임 ‘규중의 부녀가 알아야 할 행실’
이름이 길기에 ‘규중의 부녀가 반드시 알아야 할 행실’이라는 주제를 염두에 두고 ‘여행도女行圖’ 또는 ‘여행도 놀이’라 줄여 부르고자 한다.
여행도 놀이는 현재 놀이판만 전해지고 있지만, 실제로 놀이를 하려면 놀이판은 물론, 말men, horses과 주사위dice가 반드시 필요하다. 놀이기구를 주사위로 단정하는 것은 놀이기구를 던졌을 때 나와야 하는 끗수사위가 여섯 종류이고, 주사위가 우연의 수를 찾아내는 가장 기본적인 도구이기 때문에 ‘주사위’라 통칭해 표현한 것이다. 현행의 일반적인 윤목輪木, 일명 승경도알은 1부터 5까지가 대부분이고 윷가락을 던져 나오는 끗수가 도·개·걸·윷·모 다섯 종류이기 때문에 여행도의 놀이기구로 쓸 수 없다. 다만 눈이 여섯 개이고, 따라서 끗수 또한 6인 윤목이면 가능하다. 실제로 이런 윤목은 더러 있고 국립민속박물관도 한 점을 소장하고 있다. 6이라는 끗수를 강조한다면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주사위다.
이런 불편을 줄이려면 아예 ‘肆, 僞, 才, 行, 敬, 誠’을 정육면체 주사위나 직육면체 윤목에 새길 수도 있다. 실제로 승경도를 놀 때 특정 글자를 새긴 육면체 문자 주사위를 쓰기도 했지만 ‘肆사, 僞위, 才재, 行행, 敬경, 誠성’을 새긴 주사위는 아직 찾지 못했다. 그래서 국립민속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肆사, 僞위, 才재, 行행, 敬경, 誠성’을 쓴 육면체 윤목은 매우 소중하다.
_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신분 따라 달라지는 여정
여행도를 어떻게 놀았는가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는 없다. 놀이판의 구성을 보고 놀이방법을 짐작할 따름이다. 이는 다른 판놀이의 방법 내지 원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놀이판을 구성하는 칸은 모두 119칸이다. 칸마다 제각기 다른 이름을 부여했고, 하단의 여섯 칸에는 ‘肆, 僞, 才, 行, 敬, 誠’을 적었다. 이는 주사위를 굴렸을 때 나온 끗수에 따라가야 할 출발지를 지정하는 칸이다. 물론 이는 놀이의 시작점 구실을 한다. 칸이 여섯이니 놀이자도 최대 여섯 명까지 가능하고, 편을 짠다면 그 이상도 가능할 것이다.
놀이를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놀이꾼의 신분을 정하기 위해 교대로 주사위를 던져야 한다. 주사위를 던져 肆사가 나오면 ‘악녀惡女’ 칸으로 들어가고, 僞위가 나오면 ‘할녀黠女’ 칸으로 들어간다. 마찬가지로 才재는 ‘재녀才女’ 칸에, 行행은 ‘정녀貞女’ 칸에, 敬경은 ‘현녀賢女’ 칸에, 誠성은 ‘성녀聖女’ 칸에 각각 들어가 놀이의 출발지로 삼는다. 이때, 앞선 사람의 끗수를 얻으면 무효가 되고 다시 던져 새로운 숫자를 얻어야 한다. 이런 규칙은 여행도 놀이판에 따로 적혀있는 것은 아니고 모든 판놀이에 상용되는 규칙이다. 신분과 신분에 따른 출발지를 특정하는 것은 놀이판 하단부에 기재되어 있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게다가 ‘사, 위, 재, 행, 경, 성’이 지닌 뜻까지 친절하게 풀어놓아 의미를 알 수 있게끔 했다.
출발지가 정해지면 처음부터 다시 차례로 주사위를 던지고 주사위의 끗수에 따라 지시하는 칸으로 이동한다. 예컨대 현녀 칸에서 출발하는 사람이 주사위를 굴려 肆사를 얻으면 말을 치가治家 칸으로 이동하고, 僞위를 얻으면 수행修行 칸으로 이동하는 방식이다.
지시어를 적어놓았다.
각각의 칸에는 한자 이름과 한글로 풀어쓴 뜻이 적혀 있고, 칸의 하단에는 시위에 따라가야 할 곳을 뜻하는 지시어를 열거해 놓았다. 보기를 든다면 ‘독서’라는 칸에는 ‘讀書’라는 놀이판의 이름과 ‘글 읽으미라’는 뜻이 적혀있고, 하단에는 ‘사 음영, 위 치가, 행 교린, 경 화유, 성 변통’처럼 사위와 가야 할 칸이 병기되어 있다. 이 경우 ‘재’에 해당하는 지시어가 없으니 갈 곳이 없어 이른바 ‘꽝’이다. 이처럼 한글을 읽을 수 있다면 누구나 놀이를 쉽게 할 수 있고, 한자까지 안다면 뜻까지 되새길 수 있을 것이다.
놀이판 가득 적힌 여성의 행동 지침
놀이 방법이 적혀 있지 않으니 이런 방식이 아닐까 짐작되는 데, 궁금한 것은 윷놀이처럼 상대방의 말을 잡을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다만 ‘여성의 행실에 관한 놀이판女行之圖’이라는 성격을 감안할 때 잡고 잡히는 놀이방식은 아닌 것 같고, 각자의 여정을 홀로 간 것 같다. 그러나 놀이의 긴박성이나 놀이성을 높이기 위해 상대방 말을 잡았을 개연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놀이밭은 119칸이지만, 놀이의 유래를 적은 중앙의 2칸과 출발지를 적은 하단부의 6칸을 제외하면 놀이와 직접 관련된 놀이밭은 모두 111칸이다. 이들 칸마다 한자 이름과 한글 이름이 적혀 있는데, 칸의 이름은 여성이 마땅히 본받거나 꺼려야 할 인물들이고, 때로는 여성들이 멀리해야 할 행동이나 적극 본받아야 할 행동을 늘어놓았다. 인물의 경우 품격이 각각 다르고, 위로 갈수록 마땅히 본받아야 할 인물들이다.
놀이를 할 때 변수가 많을수록 재미있기 마련이다. 여행도의 경우, 이 점을 감안하여 몇 개의 장치를 두었다. 우선 주사위의 끗수 가운데 ‘才재’가 무효인 경우를 많이 설정했다. 놀이밭을 이루는 칸 중에 ‘才’에 해당하는 지시어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마도 ‘才’가 나오면 한번 쉬는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 ‘肆, 僞, 才, 行’을 무효로 치는 칸도 있다. 그리고 특별히 ‘금수’ 칸에는 별다른 지시어를 두지 않았다. 이는 금수 칸에 들어갈 경우, 놀이에서 탈락하는 것이니 ‘Out’ 또는 ‘game over’를 뜻하는 것 같다.
이와 달리 여러 경로를 거쳐 맨 위의 ‘太任태임’ 칸으로 가면 이긴다. 태임은 주문왕의 어머니를 가리키는데, “여편네 중 성인이라”고 설명했다. ‘태임태교太任胎敎’로서 이름을 떨친 태임을 닮고자 했던 여성들의 지향성을 담은 것이다. 사족으로 신사임당申師任堂이라는 택호가 ‘태임을 스승으로 삼는다’는 데서 비롯되었으니, 태임이 얼마나 여성에게 모범적인 인물인지 알 수 있다.
교육용 여성 놀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런 놀이를 누가 만들었을까. 다행스럽게도 놀이판의 중앙에 덧붙인 해설을 참고할 만하다. 이에 따르면 놀이를 만든 이는 인현왕후1667∼1701이다. 인현왕후는 숙종의 계비인데, 1689년에서 1694년까지 폐서인이 되어 사가私家인 감고당感古堂에 거처한 비운의 인물이다. 바로 이 시기에 여행도 놀이를 만들어 ‘여성 교육용으로 쓴 것’이 아닌가 한다. 아울러 복권되어 입궁할 때, “궐에 들어간 뒤에는 내 얼굴을 대신하도록 하라.”는 말을 덧붙였는데, 이를 동생인 단암丹巖 민진원閔鎭遠이 적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1792년으로 비정되는 임자년에 외현손인 모某씨가 기록했다고 씌어 있다.
조선 시대의 사대부가 여성을 위한 교육용 도서는 꽤 많은 편이다. 《내훈內訓》, 《여훈언해女訓諺解》, 《우암선생계녀서》를 비롯하여 《삼강행실도》까지 다양하다. 이를 통해 여성의 자질과 부덕을 함양하였는데, 문자를 통해 학습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여 부도婦道를 좀 더 쉽게 체득하기 위하여 놀이화한 것이 바로 ‘여행도 놀이’다. 때문에 여행도의 내용과 등장인물이 이들과 유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교육적으로 규범적이고 문화사적으로 보수적인 내용을 더욱 쉽고, 재미있게 판놀이로 만들어 보편화했다는 것은 놀이가 지닌 효용성을 꿰뚫어 본 것이 아닌가 한다. 새삼 인현왕후의 혜안이 탁월한 빛을 발한다.
*이 글은 《민속소식》 165호국립민속박물관, 2009에 수록된 「조선시대 사부가의 여성들, 이런 놀이도 즐겼다」를 수정·보완한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