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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터의 추천

강경남 큐레이터가 추천하는
<한국우편절수첩>

<한국우편절수첩韓國郵便切手帖>은 1905년 7월 1일 한일통신업무 합병을 기념하기 위해 일본정부에서 제작하여 발행한 기념우표집이다. 이 우표집에는 1884년 우정국 개국을 기념하는 우표 5종과 대한제국에서 발행한 태극 보통우표, 독수리 보통우표, 이화 보통우표, 어극40주년 무공우표 등 역사적으로 중요하고 가치 높은 우표들이 담겨있다.
 
당시 이 우표첩은 소량만 제작되었고, 황실의 측근이나 주요 인사, 귀빈 등의 몫으로만 돌아갔을 만큼 귀한 자료이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는 지난 2014년, 이 중에서도 특별한 것을 특별한 절차로 소장하게 되었다. 이창실 선생의 기증 덕분이다. 강경남 학예연구사가 추천하는 유물, <한국우편절수첩>이다.
 
 

한 사람의 인생이 박물관을 찾아오다

 

이창실 선생은 한국말이 서툴다. 가족이 일본에서 터를 잡았던 어린 시절에는 일본말을 못했다. 동급생들에게 미움을 받기도 했고, 쉬이 어울리지 못했다. 그때 한국에서 친척으로부터 편지가 도착했다. 그리고 한 쪽에 곱게 붙은 우표를 발견했다. 그리운 한국으로부터 먼 길을 날아온 우표. 이창실 선생은 봉투에서 우표를 조심스레 떼내어 소중히 보관했다. 그의 우표 수집 인생의 시작이 되었던 순간이다.
 
“<한국우편절수첩>을 기증하신 이창실 선생님은 현재 일본 오사카에 거주하시는 재일교포 이십니다. 선생이 국민학교 시절, 태평양전쟁에서 패하고 세계 각국에서 돌아온 일본군들에게서 외국의 우표를 처음 접하셨다고 해요. 그리고 한국에서 아버지의 조카가 보낸 편지에 붙어있던 한국 우표를 보고, ‘아, 우표를 모아야겠다’고 생각하셨던 모양입니다. 좀처럼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의 시간을 보내던 선생이 마음을 쏟고 위안 받을 곳이 생긴 거죠.”

이창실 선생

 
그렇게 한국의 옛 우표를 모으는 일에 집중하게 된 이창실 선생은 꾸준히 우표를 수집하는 일에 몰두했다. 의미있는 우표가 있다면, 경매를 통해서라도 구해보고자 했지만 높아지는 가격 경쟁 앞에서 언제나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택시 운전을 하며 근근이 생활을 하는 선생의 입장에서 높은 금액을 지불하면서까지 우표를 구입하기에는 가족들에게 미안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이것만큼은 반드시 내 손에 넣어야겠다’는 의지로, 저축해놓은 적금을 깨면서까지 구입한 것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한국우편절수첩>이다.
 
당시 이창실 선생이 구입한 <한국우편절수첩>은 흰색 리본으로 묶인, 귀한 것이었다. 황실이나 황실의 친인척, 주요 인사 등 특별한 이들에게 건네진, 기타 다른 우표첩보다 더욱 희귀한. 그것이 더욱 강렬하게 이창실 선생의 마음을 붙들었으리라.
 
“몇 달 동안 저금한 돈을 인출해서 지불하고 돌아오는 길 내내 선생의 마음에 가장 걸렸던 것은 아내 분이셨던 모양이에요. 그럴 수밖에 없었겠죠. 넉넉한 살림도 아닌데 그렇게 모아놓은 돈을 한번에 다 쓰고 오셨으니 마음이 어떻게 편할 수 있었겠어요. 그래서 귀가하시는 길에 브로치를 하나 사서 아내에게 선물하며 ‘미안하다’고 사과하셨대요. 선생의 아내 분은 별 말 않고 넘어가 주었지만, 사실 마음이 얼마나 복잡했을지, 왜 모르겠어요.”
 
강경남 학예연구사는 자신 역시 한 남편의 아내로서 이창실 선생 아내 분의 심정이 짐작 되면서도, 남편의 취미 생활을 존중하고, 이해해 주었던 그 마음이 참 대단하다고 했다. 생각해보면 역사적으로 기록되어야 할 이 귀한 우표첩이 박물관에 발을 들일 수 있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도 선생의 아내 분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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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토록 어렵게, 한편으로는 절절한 가슴으로 지키고 있어야 할 우표첩을 흔쾌히 박물관에 기증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기증 당시 이창실 선생과 나눈 인터뷰의 일부를 여기 옮긴다.
 

“나이가 드니 내가 죽으면 이것들이 어찌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값어치 있는 물건이니 팔아서 맛있는 거라도 사 먹으면 끝이지만, 그것은 그른 일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이 물건의 가치와 나의 노력을 인정받는 방법이 ‘기증’이라고 생각했다. 중략 우표는 원래 한국의 것이니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한국에 이것으로 세금을 내었다 생각해도 좋다. 단지 이것을 수집하기 위한 나의 노력만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일본서 나 자라고, 이제는 한국말조차 가물해진 이창실 선생은 이 기증을 ‘세금’이라고 했다. 기증자 정보에는 자신의 출신지를 일본이 아닌 아버지의 고향인 ‘제주도 모슬포’라고 적어달라 했다. 이 모든 것은 한때는 설움으로, 그러나 항상 그리움으로, 언젠가는 자랑스러움으로, 가끔은 자신감이 되어주었던 굳건하게 성장한 조국에 대한 고마움이 아니었을까.

 
 

‘기증’, 개인의 소소한 일상이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가 된다

 
이창실 선생은 2014년 <한국우편절수첩>을 기증하고, 이어 2015년에는 독도 소인이 찍힌 우편 봉투 등을 기증했다. 선생과 같이 한차례 기증을 한 기증자는 이후에도 기증을 이어가는 편이라고, 강경남 학예사는 설명했다.
 
“기증이란 자신이 가진 것을 ‘공유하기 위해’ 내놓는 것이에요. 자신이나 소수의 사람들만 향유할 것들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그 자료의 가치와 역사, 문화를 공유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다른 기관과 다르게 국립민속박물관의 기증의 벽이 낮은 이유는 ‘생활사’와 ‘근현대’를 다룬다는 것에 있다. 우리가 생활하며 사용하고 매만지는 모든 것들이 기증의 대상이 될 수 있고, 또 그만큼의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반세기 넘게 써온 가계부도, 열심히 저축했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저금 통장도, 아버지의 졸업앨범도, 새나라의 어린이 레코드판도 모두 기증할 수 있는 소중한 역사적 자료가 된다.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문화재는 물론이고 생활에 사용했던 물품도 기증 대상입니다. 찍어둔 사진도 기증할 수 있어요. 자신이 가진 것 중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는 확신이 서면 국립민속박물관 기증 담당자에게 연락을 주시면 됩니다. 기증하실 자료를 사전조사 한 뒤 수증심의위원회를 통해 박물관에서 기증받을만한 자료라고 결정되면 정식으로 박물관 관인이 찍힌 자료수증증서를 발급해드리고, 기증품을 박물관에서 자료등록하게 되죠. 이로써 한 개인의 소장자료가 모든 국민이 공유할 수 있는 자료로 거듭나게 되는 겁니다.”
 
지금 내가 애지중지 아끼는 물건이라 해도, 그 물건의 생명은 결국 내 손에서 끝나기 쉽다. 내가 소중하게 여긴 만큼 가치 있게 보존하길 원한다면, 박물관의 문을 두드려보는 것도 좋은 결정이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국가가 그 누구보다 고귀하고 안전하게 나의 것을 보존해 줄 것은 말할 것 없고, 시간이 흘러도 나의 이름이 역사의 한 획으로 남아 기증품과 함께 살아갈 것이니.
 
“박물관은 항상 열려있습니다. 이걸 기증해도 될까, 하는 염려와 박물관이라는 이름이 만드는 문턱도 선뜻 기증을 결심하기에 장애물이 되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도 그 문턱을 낮추기 위해 애쓰고 있고, 기증자를 위한 예우를 잘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소소한 역사가 모여 후에는 우리 문화를 대표하는 자료가 된다는 것과 공유의 기쁨에 동참해 주셨으면 합니다.”
 
지금 국립민속박물관 상설전시관에 2015년에 기증된 다양한 기증품들이 전시 중이다. 한번 걸음해 보셨으면 한다. 당신의 서랍 속에 있는 그 물건 또한 그것들에 뒤지지 않을 만큼 훌륭한 역사가 될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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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민속박물관 기증자의 벽. 재일교포 이창실 선생은 자신의 출생지를 ‘제주도 모슬포’라고 적었다.

 

| 국립민속박물관 기증담당자 연락처: 02-3704-3256 (유물과학과)
| 자료 기증 – 바로가기
| 공유의 미덕, 2015년도 기증자료전 – 자세히 보기
인터뷰_ 강경남 학예연구사 | 국립민속박물관 유물과학과
글_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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