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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민속보고서

잊힌 영웅을 위한 애틋한 노래,
소 블루스

전공이 농업기술과 농민사회이다 보니, 발간자료 중에서도 소띠 해 특별전 〈소와 함께 세상이야기〉 전시 도록에 눈길이 갔다. 전공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울 정도로 미처 몰랐던 많은 소 관련 도상과 물건을 볼 수 있었다. 국립민속박물관의 역량을 느낄 수 있었다. 십이지 동물 중 한국인과 가까운 짐승으로 개, 돼지, 닭, 고양이, 호랑이, 쥐이 경우 다소 ‘부정적’ 의미이나 등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역시 소에 미치지 못할 것으로 본다.

한국사의 진정한 영웅 ‘소’
굳이 아쉬움을 찾자면 두 가지 정도를 들 수 있겠다. 우선 사소한 것부터 농담 삼아 적자면, 도록 안에 건국대의 학교 상징인 소에 대해서는 많은 이미지가 있었던 반면, 역시 소를 교수校獸―다소 어감이 이상하지만 실제 이 표현을 쓴다―로 삼는 홍익대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었다. 사정은 알 수 없으나, 추정컨대 이중섭의 〈흰 소〉를 소장하고 학교 뒷산이 와우산臥牛山인데 무슨 별도의 조형물이 필요하냐고 생각했을 홍익대 측 잘못이 클 것이다. 여하간에, 그만큼 한국사회에 소 상징이 만연함을 나타내는 한 사례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다.

조금 더 진지한 아쉬움으로는 ‘죽은 소’나 거기서 나온 재료고기, 가죽, 뿔 등로 만들어진 전시자료는 많고 그 설명 또한 상세하고 아기자기했던 반면, ‘산 소’와 인간의 직접적인 ‘동행’―도록 중 한 장의 제목이었다―을 보여주는 전시자료는 옛 사진 위주이고 또 설명 역시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무엇을 하는 장면물건인가’ 외에 별로 없었다는 점이다. 소를 ‘한국사의 진정한 영웅’ 중 하나로 여기며, 그래서 소가 다른 십이지들과 같은 수준에서만 다루어지는 점에 아쉬움을 느끼는 입장에서, 이는 상당한 불만 거리였다. 국립민속박물관 관계자분들의 분발, 그리고 영웅에 대한 영웅다운 대접을 촉구하며, 몇 자 적어서 나름의 ‘소를 위한 블루스’로 삼아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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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대학교의 상징 ‘소’ 동상
농업사뿐 아니라 한국사 전체에서 소를 우경牛耕, 즉 쟁기질과 관련하여 가장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상식이다. 그렇다면 전통시대 농업에서는 어디에서나 소로 논밭갈이를 했던 것일까? 한반도 권역에서 따비를 사용하던 일부 도서 지역을 논외로 하더라도, 이웃한 일본만 해도 19세기 중엽까지 논밭갈이의 대세는 괭이를 사용해서 인력으로 하는 방식이었다. 19세기 후반 들어 일본 전역에 메이지 농법 또는 후쿠오카 농법이라고 불리던 근대농법의 바람이 휘몰아쳤을 때 그 기술체계의 양대 핵심 중 하나가 건전우마경乾田牛馬耕이었는데, 이는 곧 배수시설을 만들어 논에 물을 빼서 말릴 수 있게 하고, 소나 말을 이용하여 축력으로 경운 작업을 하는 일이었다. 즉, 그 전까지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인력으로 논밭갈이를 하던 곳에서 축력으로 이를 대체하게 되었다면, 그 역축들은 대체 어디에서 났을까. 한 말 개항장의 주요 수출품을 보면, 쌀과 콩에 이어 소가죽과 ‘산 소’가 인삼과 함께 3위 그룹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미 우마경 보급이 상당히 진전된 1920년대 중반에도 조선산 소는 일본 전체 사육두수의 약 15%를 점했고, 지역에 따라 50〜60%를 점하는 곳도 적지 않았다. 지금도 일본에 가면, 조선에서 소가 들어오면서 비로소 우경을 하게 되었다는 구전을 듣게 되는 일이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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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농가의 삶, 현대의 시민사회까지, ‘소’로부터

조선 소는 가격이 저렴할 뿐 아니라 일을 잘하고 사육이 쉬워서, 전에 소를 먹이고 부려본 일이 없는 일본 농가에서도 쉽게 다룰 수 있었다. 조선의 것이라면 폄훼하기 바빴던 한 말·일제강점기의 일본인들도, 소에 대해서만은 감탄하는 글을 많이 남겼다. 까마득히 가파른 비탈밭에서 두 마리 소를 메워 마치 대화라도 하듯이 부리며 쟁기질을 시키고, 쟁기의 회전반경을 줄이기 위해 안쪽에 선 소가 무릎을 꿇고 바깥 소와 보폭을 맞추는 등 그 경이의 기록은 지금 우리가 읽어도 생생하다.

사실 대일수출과 일본인의 평판 문제는 한국사회에서 소가 차지하는 비중에 비기면 아무것도 아니다. 한 해의 농사와 농가의 삶에서 소가 차지하는 비중은 새삼 더 말할 나위도 없겠다. 그 밖에도, 조선 후기 이래 현대에 이르기까지, 소를 빌려 일을 시키고 노동이나 곡식으로 대가를 치르는 삯소·도짓소, 주인 대신 일을 가르치거나 시키며 먹이고 길러줘서 대가로 송아지를 받는 배냇소·얼이소, 마찬가지로 소를 키워준 뒤 소를 팔아서 이익을 나누는 병작소·이반소 등은 부농과 빈농이 함께 짝을 지어서 농사를 짓고 부를 키워가는 주요한 수단이었다. 기실 현대 한국 주택경제의 핵심인 전세제도 역시 그 기본형은 이들과 같은 원리에 속하는 일이다. 이에 부수되어, 우시장 풍경은 물론, 장과 장 사이에 소를 몰아다 주는 채꾼이나, 이들을 재워주는 마방馬房과 관련한 민속·구전도 다양하다.

근대 농가에서 소를 부릴 줄 아는 머슴은 상머슴이라 하여 머슴 중에도 따로 대접을 받았다. 농촌에서 집단으로 모내기할 때도, 다른 일꾼들이 논바닥에 쭈그리고 모를 심는 동안, 소를 몰아 번지질을 하는 농군은 ‘신 일꾼’이라 불리며, 먼저 일을 끝내고 논두렁에서 담배 물고 앉아 기다리는 특권을 누렸다. 이들은 일이 시작되기 한참 전부터 미리 두둑한 선자先資를 주고 맞춰 두어야 품을 쓸 수 있었다. 물론 수완이 떨어져 일이 더딘 ‘신 일꾼’은 모내기꾼들에 쫓기면서 “소꼬랑지혹은 ‘상투’에 모춤 올라간다!”고 놀림을 받아야 했다. 반대로 소가 없는 농민은 소를 빌려 하루 일을 시키고 소와 ‘신 일꾼’ 몫까지 사흘씩 일을 해서 갚았다. 일 년에 열흘 소를 빌리면 머슴도 아니면서 한 달은 남의집살이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모두 소가 있는지 없는지, 소를 부릴 줄 아는지 모르는지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일이었다.

목돈이 필요할 때 농가에서 가장 의지할 수 있는 것도 소였다. 모두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대학에 대한 지배적인 이미지는 상아탑象牙塔이라기보다는 우골탑牛骨塔이었다. 형님·오빠 대학 가면 소를 팔고 장가가면 논을 팔고, 오늘날 우리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시민市民들의 한국사회가 만들어진 비결도 여기에 있다. 한국의 시민사회가 갈비탕이나 라면 수프로 소에게 빚지고 있는 바와는 비교도 안 될 일이다. 혹시 이 글을 끝까지 읽은 이가 있다면, 함께 잠시 소에게 바치는 음울한 블루스 가락이라도 웅얼거리고 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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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남 송석하 선생이 찍은 1930년대의 소시장 모습 _국립민속박물관 소장
| 전시 도록 <소와 함께 세상이야기> – PDF
글_ 안승택 |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인류학박사) 지역문화연구소 연구원, 전북대 쌀·삶·문명연구원 HK교수 등을 역임했다. 식민지시기를 중심으로 조선후기부터 현대까지를 오가면서, 농업기술과 농민사회의 변화와 지속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면접·관찰, 유물·유적, 문서·문헌 등을 자료로서 아우르는 역사인류학적 접근을 기본 방법으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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