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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 不老口

상긋 쌉쌀하고 구수한 가을

나물은 산이나 들에서 채취한 식물 또는 채소로 만든 반찬을 통틀어 일컫는다. 먹을 수 있는 야생 식물의 재료를 총칭해서 부르는 말이기도 하다. 음식 재료로서의 나물은 크게 ‘남새’와 ‘푸새’로 나뉜다. 남새는 오이, 호박, 아욱, 가지, 토란, 무, 고춧잎 등 재배해서 얻을 수 있는 나물이다. 반대로 푸새는 산과 들에서 야생으로 자라는 것을 뜻한다. 이른 봄, 눈을 뚫고 올라온다는 울릉도 산마늘로부터 시작해 엄나무순, 두릅 등 봄이 무르익기 시작하는 시기에 나오는 갖가지 순, 봄이 절정에 달하는 시기에 산에서 채취할 수 있는 갖가지 나물 등은 따로 ‘산채’라고 불리기도 한다.

풍성한 산채만큼이나
풍부한 나물의 맛

산채를 식용하는 동아시아의 한국, 중국, 일본 가운데서 우리나라는 가장 많은 종류의 산채를 가장 다채롭게 요리해 먹는다. 덕분에 먹을 수 있는 산채를 식별해 내는 감식력이 일찍부터 발달했음은 물론이다. 먹을 수 있는 산채의 종류가 다양하니 나물맛에 대한 표현 또한 풍부함은 당연지사. 이는 이성우 선생이 지은 <한국요리문화사>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취나물은 상긋 쌉쌀하다, 씀바귀는 씁쓸하다, 더덕은 구수하다, 다래는 새콤 쌉쌀하다, 냉이는 달콤하다. 삽주와 물쑥은 상긋하다”라고 쓰고 있는 것이다.

조선 최고의 식도락가 중 하나로 꼽히는 허균이 1611년에 조선 팔도의 명물 토산품과 별미음식을 소개하며 쓴 <도문대작屠門大嚼>에서는 전라남도 장성 이남의 죽순, 의주 지방의 원추리, 지극히 크고 맛이 좋은 서울의 토란, 함경도의 파, 의성의 마늘 등에 대해 주산지와 맛의 특징을 서술하고 있다. 또한 고사리, 아욱, 콩잎, 염교, 미나리, 배추, 송이, 참버섯 등은 곳곳에서 나는 것이 모두 좋으므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고 쓰고 있다. 독특한 음식 조리법으로는 강원도의 사찰 음식인 방풍죽이 있는데 방풍을 끓여 우려낸 국물에 불린 쌀을 넣고 퍼지도록 끓이다가 건져낸 방풍을 채 썰어 넣고 같이 끓이면 향기로운 맛을 낸다고 쓰고 있기도 하다.

끓이고 볶고 데치고 삶고 무치고
다채로운 나물 조리법

나물은 조리법이 퍽 다양한 식재료이다. 죽을 끓이기도 하고 데쳐서 무치거나 삶아서 볶아 먹기도 한다. 충청북도 청주시에서 발견된 조선시대 조리서인 <반찬등속>을 보면 독특한 음식이 소개되고 있는데 ‘창통나모규슌토면쥬거리’참등나무순토면주거리가 그것이다. 참등나무순, 토면주거리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숨이 살짝 죽을 정도로만 말리고 밀가루를 얹어 기름에 조려 양념을 해먹는다는 것이다.

나물을 활용한 음식 중 역시 가장 흔하고도 화려한 것으로는 비빔밥을 빼놓을 수 없다. 계절과 지역에 따라 들어가는 재료가 조금씩 달라지지만 각 나물의 특성에 맞춰 조리법이 각양각색 다양하기 때문이다. <조선요리제법>에는 “무는 채쳐서 나물을 볶고, 콩나물은 꼬리를 따서 나물을 볶는 법대로 볶아 놓고, 미나리는 소금을 차사시로 하나만 뿌려서 절였다가 꼭 짜서 기름에 볶아놓고”라는 구절이 보이는데 가장 흔한 나물 조리법이 잘 나타나 있다. 비빔밥 위에 나물을 놓는 방법도 꽤 구체적이다.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가운데 장을 놓고 종류별 나물을 삼각뿔 형태로 놓아 원형을 만드는 방법과 나물을 동심원 형태로 두르는 방법이 그것이다. 도라지나 고사리는 밥 지을 때 썰어 넣기도 하고, 밥을 다 지은 후 미리 밥과 섞은 뒤 위에 다른 나물을 올리기도 한다.

조선시대 해먹었던 나물 음식 중에 꽤 화려한 것이 있다. 바로 ‘월과채’이다. <부인필지>에서는 “어리고 연한 호박을 얇게 썰고 쇠고기나 돼지고기를 잘게 다져 넣는다. 파, 표고버섯, 석이버섯을 넣어 냄비를 먼저 달구고, 기름부어 볶아 깨소금 뿌려 찰전병 돈짝엽전 같이 부쳐 섞어 술안주 하면 좋다”라고 적도 있다. 또한 <조선요리제법>에서는 “씨 없는 애호박을 곱게 채쳐놓고, 우육이나 제육을 곱게 다져서 호박 채친 것과 함께 놓고, 표고와 느타리도 채쳐서 놓고, 파를 적당히 썰어서 넣고 기름과 깨소금 간장을 넣고, 화로에 놓아서 잘 볶아서 놓고, 찰전병을 부쳐서 잘게 썰어서 볶은 나물에 섞어서 먹는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기도 하다.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서는 “어린호박을 얄게 써러 쇠고기나 제육을 난도하야 너코 파 호초 석이 등물을 너은 후에 몬저 통노구를 달우고 기름부어 복근 후에 깨소곰 호초가루 치고 찰전병을 둔짝갓치 붓쳐 석거먹으면 술안주에 조타하나니라”라고 설명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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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 아홉가지 나물 이름만 외면
굶어 죽을 걱정 없다”

나물은 예로부터 신분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즐겨먹은 식재료이기도 하다. 양반은 계절의 별미로 조리법을 달리해가며 먹은 반면, 서민들은 없는 살림에 없어서는 안될 구황식품으로서 나물을 활용하는 방법을 잘 알고 먹었던 것이 조금 다를 뿐이다. “아흔 아홉 가지 나물 이름만 외고 있으면 굶어 죽을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속담도 그래서 나온 얘기인 것이다.

해마다 나물철이 되면 전국 방방곡곡으로 나물맛을 보려 취재여행을 다녔던 시절이 있었다. 전라남도 구례에서 엄나무순, 다래순, 두릅, 재피잎 등을 채취해 그 자리에서 데치거나 삶아 조물조물 무쳐 먹거나 초고추장에 찍어 먹었던 기억은 항상 첫 번째로 떠오른다. 울릉도에서 만난 명이나물, 부지깽이, 전호나물, 엉겅퀴 등에 얽힌 추억도 항상 새롭다. 나물이 많이 나는 봄이면 울릉도의 삼겹살을 내는 식당들은 일제히 상추 대신 부지깽이나물 한바구니를 식탁에 올린다. 손으로 모다 잡아 한 뼘 길이가 되었을 때 맞춰 채취한 것이다. 손바닥에 맞춤하니 펼쳐놓은 부지깽이잎에 된장을 올리고 갓 구운 고기를 싸서 먹는 맛은 뭍에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신선놀음이다. 미나리와 쑥갓의 중간쯤 되는 모양새의 전호나물로 만든 겉절이는 고소하면서도 쌉싸름 한 것이 입맛을 돋우는 데는 더할 나위 없는 봄의 맛. 강원도 평창이나 정선 지방의 취나물도 쉽게 잊혀지지 않는 맛을 낸다. 그저 막된장 얹어 밥을 싸먹어도 별미려니와 살짝 데쳐 된장 혹은 집간장을 넣어 무쳐내면 그 향기가 오래도록 입안에서 맴돈다. 취나물은 나물밥 재료로도 좋은데 뜸들일 때 취나물을 얹어 밥을 지으면 다른 반찬 없이 참기름 친 양념간장만으로도 그릇을 거뜬하게 비울 수 있다. 나물국은 된장 엷게 풀어 끓이기도 하지만 사찰에서는 육개장 대신 얼큰하게 끓인 채개장을 즐긴다.

가을걷이의 정점은 역시 나물을 갈무리하는 것이다. 호박, 가지, 무 등을 얇게 썰어 말리거나 토란대, 고춧잎 등을 데쳐 말리는 것이다. 가을볕을 듬뿍 받고 보송보송하게 마른 묵나물은 긴 겨울 동안 요긴한 반찬거리로 역할을 하다 음력 정월 보름의 아홉 나물로 정점을 찍게 마련이다. 햇볕 볼 일이 흔치 않은 현대인들에게 비타민 D와 무기질이 듬뿍 든 묵나물은 기름지지 않으면서도 몸의 정기를 채워주는 보양식에 다름 아니다.

올 가을에는 바짝 말린 무말랭이에 고기 양념 더해 밥을 지어 먹으면 어떨까. 냉이와 쑥으로 대표되는 향그러운 봄의 맛에 못지않은, 구수하고도 진득한 가을의 맛을 제대로 보려면 말이다. 구수한 시래기국이나 달큼한 배추 속대국을 곁들인다면 더할 나위 없는 가을밥상이 마련될 것이다.

글_ 이명아 | 숙명여자대학교 한국음식연구원 객원교수
숙명여자대학교 전통예술대학원을 졸업하고 숙명여자대학교 한국음식연구원 객원교수로 있다. 전통 식문화와 한국의 농식품에 관한 글을 쓰는 매거진 에디터 출신의 음식 칼럼니스트이자 요리 연구가로 향토 음식에 바탕을 둔 외식 메뉴 개발과 농식품 마케팅 전문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그림_ 신예희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는다. 여행과 음식에 대한 무한한 사랑으로 〈배고프면 화나는 그녀, 여행을 떠나다〉, 〈여행자의 밥 1, 2〉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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