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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민속보고서

숫자로 보는 6.25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한반도에는 전쟁이 발생했다. 3년 1개월 그리고 2일 동안 계속된 전쟁은 땅과 이념을 반으로 가르고 나서야 끝이 났다. 아니, 잠시 멈춘 듯 보인다. 이제 그 날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는 오늘 ‘기억’이 아니라 ‘기록’을 통해 6.25 전쟁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숫자로 남은 기록을 통해 숨막히던 그 전쟁 속으로 들어가 보자.
 
 

‘1948년’ 남한과 북한의 시작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을 양축으로 하는 동서 냉전 질서 속에 남북으로 나뉘었다. 한반도의 38도선은 남한과 북한뿐만 아니라, 미국과 소련의 힘과 이념이 맞선 경계선이었다.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 아래 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같은 해 8월, 북한에서는 공산당의 단일후보만 출마시킨 소련식 흑백선거를 실시하고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했다.
 
이후 날로 심각해져 가는 남·북한 불균형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한국군의 현대화 및 군사력 증강 요구에 소극적 태도를 보였는데, 이는 북한의 군사력을 현저하게 증강시킨 소련의 군사 정책과는 대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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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의 유력 지방지 〈San Francisco News〉에 ‘공산 세력의 서울 진입!’“Reds at seoul gates!”이라는 제목으로 한국 전쟁 발발을 알리는 기사를 실었다. 전쟁 발발 직후 나온 보도로 생각된다.

 
 

‘6일’ 열악한 상황 속 막아낸 한강도하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이 38선 전역에서 공격을 시작했다. 개전 당시 북한의 총병력은 188,297명, 남한의 총병력은 103,827명이었다. 북한군은 압도적인 전투력으로 곳곳에서 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했다. 6월 26일 13시경 서울의 북쪽 관문인 의정부가 함락되었고, 6월 28일 01시경 북한군의 선두부대가 미아리고개를 넘어 들어와 우리는 불과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내어 주었다.
 
그러나 국군은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이 서울에서 지체하는 사이 병력을 재편성하여 한강방어선을 구축, 6일 동안 북한군의 한강도하를 막아 부대 수습 및 재편성과 미 지상군의 지원에 대한 시간적 여유를 확보할 수 있었다.

 
 

‘21개국’ 유엔군의 참전, 상황이 반전되다

미국은 지체 없이 참전을 결정하였으며 미국의 요청에 따라 6월 26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긴급 소집되었다. 이들은 북한군을 침략자로 규정, 철수할 것을 권고했으나 북한군이 이를 무시하고 군사행동을 계속하자 28일, 군사적 제재를 결정하였다. 유엔의 이러한 결정에 따라 미국을 포함한 21개국이 6.25 전쟁에 참전하였다.
 
한편, 1950년 10월 1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소련과 북한은 중국에게 공식적으로 지원을 요청하였다. 결국 10월 8일 마오쩌둥은 ‘항미원조抗美援朝 보가위국保家衛國’, 즉 미국에 대항하여 조선을 돕고, 나라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우리나라에 출병하였다.

 
 

‘3,000,000명’ 6.25전쟁이 남긴 상처

1651년 6월, 유엔군과 공산군은 더 이상 무력에 의해 전쟁이 종결될 수 없다는 인식을 가지고 7월 10일, 휴전회담을 열었다. 이후 회담은 중단과 휴회, 재개 등을 반복하며 1953년 7월 27일까지 진행되었다. 마침내 1953년 6월 8일, 공산군과 유엔군이 포로교환 관련 합의문에 서명했고, 7월 27일 10시, 정전협정이 정식으로 조인되었으며 같은 날 22시, 협정이 효력을 발휘하며 전투가 중지되었다.
 
6.25전쟁은 수많은 인명손실과 사회적 기반의 파괴를 가지고 왔다. 남한과 북한, 전체 인구 3,000만 명 중 최소 300만 명 이상이 희생되었고, 개인의 가옥과 재산은 물론, 대규모 국가기반 시설에서부터 미미한 수준의 국가기간산업시설과 공공시설마저 송두리째 파괴하였다.

 
 

‘66년’ 전쟁, 그 후

6.25전쟁이 끝난 후 66년이 흘렀다. 그동안 북한은 사회주의 정권 아래 3명의 지도자를 겪었고, 우리나라는 민주주의 속에서 급격한 산업화를 지나 18대 대통령을 맞이했다.
 
전쟁 후 분단 체제는 고착화되었다.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던 두 나라는 1970년대 이후 국제 관계의 변화 속에 이산가족 상봉이나 개성공단을 통한 경제 협력 등 화해와 협력의 길을 걷기도 하였으나, 여전히 분단국가로 남아있다.
 
약 3년의 전쟁 기간. 막대했을 인명과 물자 피해. 그리고 황폐해진 땅에 남겨졌을 사람들. 막연하게만 떠오르던 6.25전쟁을 되짚어 보았다. 6.25전쟁 이후 한반도는 가늠되지 않을 만큼 많은 것을 잃었고, 또 잊었다. 이미 많은 이들에게 전쟁의 아픔은 할머니의 옛날이야기처럼 멀기만 하다. 그러나 더 먼 미래가 되어도, 여전히 기록은 6.25전쟁의 그 날을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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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0년 개최된 6.25전쟁 60주년 기념 특별전 <굳세어라 금순아!>의 전시도록을 바탕으로, 2014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발간한 <통계로 본 6·25 전쟁>의 자료를 통해 쓰여졌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는 2010년 <굳세어라 금순아!> 특별전 당시, 전쟁 기간 동안 월남한 전국의 ‘금순’이라는 이름을 가진 어르신들을 모시고 회갑상과 위문잔치를 마련했다. ‘금순’ 어머니들은 국립민속박물관의 6·25전시 홍보 대사이자 교육자로서 전시를 더욱 특별하게 빛냈다.
 
| 전시도록 <굳세어라 금순아> – PDF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통계로 본 6.25 전쟁> – PDF

 

글_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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