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선생丁若鏞, 1762~1836은 조선 후기 실학 사상을 집대성한 한국 최대의 실학자이다. 그의 삶을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유배 생활. 1801년 황사영 백서사건황사영이 베이징에 있던 프랑스 주교에게 조선의 천주교 박해를 막아달라고 편지를 보내려다 발각되어 처형된 사건으로 전라남도 강진으로 18년간 유배 생활을 했다. 긴 헤어짐의 시간을 아파한 정약용 선생의 부인 홍씨홍혜완은 혼인 때 입었던 치마를 정약용 선생에게 보냈고, 정약용 선생은 그 치마에 글을 새겨 아들에게 남겼다. 이것이 <하피첩>이다. <하피첩>의 특별전과 국역서 발간에 힘을 쏟은 권선영 학예연구사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권선영 학예연구사이하 권선영_ 정약용 선생이 강진으로 유배를 떠났을 당시 두 아들이 19세, 16세였고 막내 딸이 8세였어요. 아들들은 이제 새로운 삶을 시작할 나이였고, 막내 딸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스러울 때였죠. 이렇게 한창때의 아이들과 남편 없이 집안을 끌어가야 할 부인을 남겨두고 먼 길에 오르는 정약용 선생의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정약용 선생은 풍족하게 살았던 인물은 아니에요. 집에 먹을 것이 없어서 종 아이가 옆집 호박을 훔쳐다 죽을 쑨 적이 있어요. 사실을 알고 부인은 종을 크게 혼냈고, 정약용 선생은 그 모습을 보면서 민망하고 미안한 마음을 「호박넋두리南瓜歎」라는 시에 적기도 했어요.
가장이 있는 삶도 이러했는데, 하물며 긴 유배를 떠난 집은 말할 것 없이 궁핍했겠지요.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아내가 가재도구를 내다 팔거나 양잠 등을 했고, 두 아들도 농사를 지었던 모양이에요. 큰 아들이 수확한 마늘을 팔아 번 돈으로 아버지를 찾아 뵌 적도 있다고 해요.
권선영_ 가족에 대한 염려와 안타까움은 말로 다할 수 없었을 겁니다. 원래 정약용 선생과 부인 홍씨 슬하에 6남 3녀의 자녀가 있었다고 해요. 하지만 단 세 명만 살아남았죠. 그런 마음고생은 물론이고, 자신이 멀리 있는 동안 혼자서 아이들이 엇나가지 않도록, 없는 형편에도 대단히 애를 쓴 것만으로도 정약용 선생은 아내에게 큰 고마움을 갖고 있었을 겁니다. 정약용 선생이 남긴 글들 곳곳에 아내를 향한 미안함과 애틋함에 깊이 서려있어요.
권선영_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아이들에게는 엄격한 아버지였던 것 같아요. 가족에게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를 상황에서 <하피첩>을 통해 자식들에게 하고 싶은 훈계의 글을 남겼어요. 그 서첩을 썼을 때엔 이미 아들들은 장성해서 28세, 25세가 되었고, 장손도 태어난 상태였어요. 시집간 딸에게도 다정한 그림을 그려 보내 애틋한 마음을 전했습니다. 멀리서도 자식들이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도록 늘 걱정하고 염려하던 아버지였죠.
아빠와 엄마의 마음 <하피첩>
권선영_ 단 하나의 문장으로 축약하자면 ‘정약용 선생이 강진 유배 시절 부인이 보낸 치마에 두 아들에게 보내는 교훈을 남긴 서첩’입니다. 부인이 보낸 치마는 혼인 때 입었던 붉은 색 치마였는데, 색이 많이 바랜 상태였어요. 붉은 치마를 뜻하는 ‘홍군紅裙’ 대신 노을 하霞, 치마 피帔 즉, ‘노을빛 붉은 치마’라는 이름을 새로 붙였습니다. 남편을 그리워한 아내의 마음이 노을빛 붉은 치마로 아름답게 표현된 거죠.
권선영_ 총 네 개의 서첩이 쓰여졌는데, 현재 발견된 것은 세 개의 서첩입니다. 첫 번째 서첩에는 ‘가족공통체와 결속하며 소양을 기르라’고 적고 있어요. 효제孝悌가 인을 실행하는 근본이며 부모 형제간 화목을 당부했습니다. 두 번째 서첩에서는 ‘자아 확립을 통해 몸과 마음을 닦으며 근검하게 살아라’고 했습니다. 집안은 비록 풍비박산 났지만, 실망 말고 몸과 마음을 닦아 부지런히 살아가라고요. 세 번째 서첩에서는 ‘학문과 처세술을 익혀 훗날에 대비하라’고 했어요. 온 마음을 기울여 자신의 글을 연구하여 통달하기를 당부하는 내용이에요. 효를 가장 우선으로 하고, 나를 세우며 학문에 정진해야 한다는 정약용 선생의 가치관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시집간 딸에게 띄운 <매화병제도> 역시 아내의 치마에 그림과 글을 담았습니다. 화폭에 담긴 새 두 마리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어요. 저는 이것이 정약용 선생이 정말 꿈꾸던 부부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비록 네 부모는 그렇게 살지 못했지만, 너만큼은 그림 속 새처럼 한곳을 보며 살아가길 바란다는 아빠의 소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그림이 아닐까요.
권선영_ 2004년 수원에서 폐지 모으는 할머니 수레에 담겨 있는 것을 인근 공사장 인부가 발견하셨대요. 아마 정약용 선생의 후손이 보존하고 있다가 한국전쟁 때 분실하고, 여기 저기 세상을 돌아다니던 서첩이 그때 발견된 게 아닐까 싶어요. 2006년에 KBS 진품명품에 나와서 정약용 선생이 쓴 <하피첩>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고 당시 최고가인 1억 원의 평가를 받았다고 해요. 고려대학교박물관에 소장 중인 <매화병제도>과 비교하며 같은 치마 천임을 확인했고요.
그 후에 이 서첩을 부산저축은행 대표가 소유하고 있었는데, 파산과 함께 경매에 나왔고,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약 7억 5천만 원 정도에 매입했습니다. 박물관 1년 유물 구입 예산의 1/3 가량을 들여서 구입했어요. <하피첩>은 생활사 박물관인 우리 박물관에서 결혼 생활과 자식 교육 등에 대한 당시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 분명하니까요.
정약용 선생은 <매화병제도>에 <하피첩>을 총 네 개의 서첩으로 만들었다고 언급했지만, 남겨진 서첩은 세 권뿐이라 나머지 하나가 정말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는데, 우리 박물관에서 매입 후 진행한 보존처리 과정에서 서첩에 을乙, 정丁 이라고 적혀있는 것을 발견했어요. 갑을병정의 순서로 제작된 것이 아닐까 하는 추론도 세울 수 있었죠.
그의 말은 지금에도 통용된다
권선영_ 요즘 사건사고가 참 많잖아요. <하피첩>을 처음 구입하고 전시 준비를 하고 있던 무렵에는 부모의 아동학대 사건이 세상을 뒤흔들고 있었어요. 그 뉴스들을 보면서, 아 정말 이 시절에 꼭 필요한 전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책에 ‘어떤 사람이 우리 집에 와서 누가 누구의 어버지이고 누가 누구의 자식인지를 끝내 알지 못하게 할 정도가 되어야 화목한 가정이다.’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어요. 요즘은 친척간의 교류도 많지 않을뿐더러 가족간에 느긋하게 대화할 시간도 없잖아요. 가족 해체도 흔한 일이 되었고요. 정약용 선생은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가족끼리 정을 이루는 것이 우선이다’라는 메시지요.
너무 많은 정보를 받아 적어가는 것보다는 이런 유물이 있다는 것만 가지고 돌아가서 그 가족만의 에피소드를 만들어나갔으면 좋겠어요. 아이들이 이 유물에 특별한 관심이 생기면 그때 유물에 대해 좀 더 깊이 알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고, 아이들 스스로 생각하고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주었으면 해요. 이것이 바람직한 박물관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피첩>은 어른을 위한 책이기도 하다. 가족의 의미는 아이들이 글자로 배우고, 설명으로 이루어지는 수학 공식 같은 것이 아니다. 부모의 역할에는 아이들이 바르게 자랄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고, 이를 생활에서 보여주어야 할 의무 또한 담겨 있다.
정약용 선생이 자식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부모의 향기로운 은택’이란, 결국 부모가 바람직한 부모로서의 역할을 수행했을 때 자식들에게 전해지는 향은 깊어질 것임을 함께 말하고 있는 것일 거다.
특별전 <하피첩>은 6월 13일 막을 내렸지만, <하피첩> 국역서는 국립민속박물관 홈페이지를 통해 언제든 내려 받아 살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