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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그랬지

영화 〈접속〉

97년 가을, 영화 ‘접속’이 개봉했다. 신선하고 세련된 멜로 영화라는 평이 따랐고, 관객도 283만 명이 들어 그해 최고 흥행 영화가 되었다. 2015년에 제작사, 명필름이 진행한 ‘창립 20주년 기념으로 다시 보고 싶은 명필름의 영화’에서 사람들은 한석규, 전도연 주연의 ‘접속’을 가장 많이 꼽았다.

사진 제공 명필름

남자 주인공 권동현한석규 분은 라디오 방송국 PD다. 사랑했던 여자는 6년 전, 이유도 밝히지 않고 그를 떠났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동현은 여전히 그녀를 그리워하며 과거로부터 나오려 하지 않는다. 이런 동현을, 함께 일하는 작가, 은희가 좋아한다. 그녀는 동현과는 매우 다른 세계에 사는 인물이다. 유능하고 적극적이며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고 대담하게 밝힌다. 이런 여자에게는 동현의 영혼이 공명할 것 같지 않은데, 아닌 게 아니라 그녀의 적극적인 구애에도 불구하고 동현은 마음을 주지 않는다.
여자 주인공 이수현전도연 분은 홈쇼핑의 상담원이다. 수많은 고객의 사연 하나 하나를 정성을 다해 듣고 응대하는 마음 따뜻한 여자다. 친구의 애인을 좋아하며 힘든 사랑을 하는데, 만나야 할 사람은 언젠가는 만나게 된다고 믿는다.
서로 알지 못하는 이들이 어느 날 PC 통신을 통해 연결된다. 수현이 벨벳 언더그라운드The Velvet Underground의 ‘Pale Blue Eyes’를 동현의 프로그램에 신청하면서다. 동현은 신청자인 수현이 혹시 그녀일지도 모른다 생각하고 서둘러 수현에게 대화를 신청한다. 그 곡은 동현의 그녀, 영혜가 즐겨 들었던 음악이었다.
한데 몇 차례의 접속 후 수현은, 영혜를 알지 못하며, 아는 척 거짓말을 했다고 털어 놓는다. 수현이 영혜를 알지 못하는 이상 동현은 더 이상 수현에게 접속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수현이 이 일회성 접속을 만남으로 이어지게 만든다. 계기는 수현이 진심을 다해 거짓말을 사과하면서다. 그 때의 대사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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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현: 사과하려고 애쓰지 말아요.
누군지도 모르는데 사과하는 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수현: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만나게 될지 모르잖아요.

사진 제공 명필름

 

수현의 진실한 마음에 굳어 있던 동현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한 걸까? 소통은 이후로도 계속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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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현: 찾고 있는 그 분 말이에요, 아마 만나게 될 거예요.
어느 쪽이든 애타게 찾고 있다는 건 인연이라는 증거거든요.
만나야 될 사람은 반드시 만나게 된다고 들었어요. 저는 그걸 믿어요.

동현: 끝내 어긋나는 만남도 있어요. 하지만 나도 그 말을 믿고 싶군요.

수현: 우리는 서로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죠? 저는 전화로 물건을 팔아요…. <중략>

동현: 당신은 상품을 팔고 난 음악을 팔고…. 비슷한 데가 있군요.

두 사람은 PC통신에서 오갈 법한 가볍고 피상적인 화제를 넘어 차츰 자기 자신을 이야기한다. 아직 얼굴도 모르는, ‘해피엔드’와 ‘여인2’라는 ID 사이의 소통이지만 이들의 대화는 진짜 대화를 향해 간다. 이런 사람이라면 한 번 만나도 좋겠다는 마음이 든 듯 둘은 함께 영화를 보기로 약속한다. 하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 하필이면 그 날, 동현은 영혜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되고, 절망한 동현은 아예 이 땅을 떠날 결심을 한다.
하지만 수현은 그만둘 수가 없다. 만나야 할 사람은 꼭 만나게 된다는 그 얘기, 그러니까 바로 그 얘기가 자신의 운명이 될 거라는 것을 수현이 불현듯 알아 차린 걸까. 동현이야말로 그녀가 꼭 만나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감지한 걸까. 방송국에까지 찾아가 동현의 전화 번호를 알아낸 수현은 동현에게 연락한다. 꼭 만나고 싶다고. 그리고는 필사적으로 기다린다.

사진 제공 명필름

당시 관객들은 두 사람의 거듭된 엇갈림을 보며 이 둘이 만나게 될지 아닐지 끝까지 마음을 졸였다. 하지만 동현은 결국 그녀 앞에 자신을 드러내고 그 순간, 사라 본의 ‘A Lover’s Concerto’가 터진다. 경쾌한 음악은 동현의 ID인 해피엔드와 더불어 둘의 해피엔드를 예고하는 듯 하다.
만나야 할 사람은 언젠가는 만난다는 수현의 믿음은 어떻게 현실이 될 수 있었을까? ‘PC통신’이라는 사이버 공간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익명의 가벼운 접속에 그칠 때 두 사람은 소통을 거듭하며 서로가 닮은 영혼이라는 걸 알아 본다. 한데, 이 과정이야말로 남자, 여자가 사랑에 이르는 바로 그것 아닌가? 처음 만나 서로를 알게 되고 차츰 마음을 열며, 결국 닮은 영혼임을 느끼면서 사랑에 이르는… 최초의 접속은 컴퓨터를 통했지만 이들 역시 결국은 마음이 마음에 가 닿는 보편적인 사랑의 과정을 거친다. 닮은 영혼들이 서로에게 감응해 마침내 햇빛 아래 서는 거다.
편지에서 전화, PC통신, 그리고 SNS까지 소통 방식은 계속 변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그러나 우리가 영혼을 지닌 존재인 한, 한 남자와 여자 사이의 온전한 만남이란 영혼이 닮은 사람들 간에 일어난다는 점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것 같다. 또, 한 마음이 또 다른 마음에 가 닿는 길은 진심, 정성을 다한 두드림이라는 것도 여전한 것 같다. 최초의 접속은 시니컬한 동현이었으나 그것을 둘 사이의 만남으로 바꿔 놓은 것은 수현의 진심이었다. 자신의 인연을 감지하고 정직하게 감당한 수현이 있어 끝내 둘 사이에 길이 생길 수 있었다. 그러니까 예나 지금이나 상대의 마음을 여는 것은 이런 것들인 거다. 진심이나 정성 같은 것.
영화 <접속>을 통해 우리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동시에 만난다. 소통의 방식은 변했으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선명하게 확인한다. 접속의 방식은 매우 달라져서 컴퓨터가 그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그러나 인간들 사이의 온전한 사랑은 이 SNS 시대에도 여일하다. 영혼과 영혼의 만남, 마음과 마음의 만남이라는….
사족같지만 하나 더. 영화 속 수현의 대사다. “여자 혼자 극장에 가면 힐끔 힐끔 쳐다보잖아요 그게 얼마나 싫은지 아세요?” 하하, 20년 만에 세상이 이렇게 변했구나. 나는 종종 혼자서 극장엘 가지만 아무렇지 않다. 그리고 요즘은 나 말고도 혼자 온 여자들이 극장에 많다. 이런 면에서는 우리 사회의 풍경이 꽤 많이 변했다.

영화 <접속>

1997년 개봉한 장윤현 감독의 영화로 한석규, 전도연이 주연을 맡았다. PC통신으로 만난 남녀의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은 그 해 최고 흥행 기록을 세운 흥행작이며 멜로 영화의 틀을 새로 짰다는 평을 들었다. 메인 테마 곡이었던 사라 본의 A Lover’s Concerto가 크게 인기를 얻으면서 OST 앨범 판매량 80만 장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도 함께 세웠다. 작년, 명필름 창립 20주년 기념 온라인 설문 조사에서 다시 보고 싶은 명필름 작품 1위로 선정되었을 만큼 아직까지 많은 이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출처: 명필름 홈페이지
글_ 최인아
“그녀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 “당신의 능력을 보여 주세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 아무 것도 안할 자유” 등의 카피를 쓴카피라이터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전 제일기획 부사장. 지금은 ‘알랭 드 보통 인생학교 서울’ 등에서 강의를 하며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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