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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한 민속

조선 시대에도 과학수사대가 있었다?

1512년중종 7, 추위가 가시지 않던 음력 1월 어느 날, 서울 종각 근처에 한 여성이 쓰러져 있었다. 이 여성의 머리에는 큰 상처가 있었다. 한성부지금의 서울시청는 그녀를 집에 데려다 주고, 딸인 돌덕을 잡아왔다.

돌덕, 엄마를 버리다

 

조정은 이 사건에 주목하였다. 의금부는 조사에 착수하였고, 사건의 전모가 드러났다. 원래 종각에 버려진 여성은 불치의 병으로 죽기 전이었다. 돌덕과 그의 남편은 오작인仵作人에게 베 2필을 주고 이 여성을 업어다가 버리라고 시켰다. 그런데 오작인은 여성이 아직 죽지 않았으므로 의뢰를 받지 않겠다 했다. 돌덕은 수구문 밖에 천막을 치고 병을 구하려 한다면서 오작인을 회유하였다. 아마도 엄마의 병은 전염병이 아니었을까 싶다. 결국 업혀간 그녀의 엄마는 수구문 밖에서 머리를 구타를 당한 후 버려졌다가 살아 돌아왔다. 중종은 오작인이 이익만을 탐하는 사람들이기에 이런 일이 가능하다고 의심하였다. 그러면 중종이 싫어했던 오작인이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오작인, 조선의 CSI

오작인은 시신을 다루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지금도 누군가 사망하면 의사가 사망진단서를 쓴다. 사망 원인이 분명치 않으면 검시를 해야 한다. 조선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의문스러운 죽음에 검시가 필요했다. 자살과 타살 여부를 가려야 하고, 사망 원인도 찾아내야 한다.

조선 시대의 검시는 2번을 기본으로 하였다. 서울은 형조가, 지방은 수령이 이를 맡았다. 형조의 관리는 법률을 맡은 율관, 의사인 의관, 그리고 한성부의 서리와 오작인을 데리고 현장에 출동하였다. 이때 오작인은 시신을 뒤집거나 만지는 일을 하였다. 사실 관리들은 시체를 보는 일도 기피하는 경우가 많아서, 서리와 오작인의 말을 믿고 그대로 검시보고서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때 오작인의 요령 없는 보고 때문에, 검시보고서가 엉망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심지어 권력과 돈이 있는 사람이 실수로 가난한 사람을 죽였을 때, 오작인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가난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장례식에 드는 돈이 만만치 않고, 검시할 때는 적당한 뇌물과 대접을 요구하기도 하여 얼마 되지 않는 재산을 날릴 수도 있으니 억울하지만 부자집의 돈을 받고 사건을 은폐하는 것이 좋다고 여겼던 것이다. 이를 개인간의 화해라는 뜻으로 ‘사화私和’라고 불렀다. 물론 오작인의 경우에는 돈을 받고 타살을 자살로 꾸며 보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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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비녀는 시신의 사인이 음독인지 여부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도구였다.
은비녀를 입에 넣어서 변색이 있으면 음독 확률이 있음을 《무원록》에서 적고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원래 검시에는 《무원록》이란 법의학서와 함께, ‘검시장식’이라는 검시방식과 보고형식이 있었다. 《무원록》은 ‘억울함을 없애는 기록’이라는 뜻으로, 중국 원나라의 왕여라는 사람이 만들었다. 이 책에는 당시 과학적 방식으로 알려진 모든 것들이 집약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독약을 먹고 죽은 시신은 그의 입 속에 은비녀를 넣어 보면 색깔이 변한다거나 물건으로 구타를 당했다면 상처가 비스듬하면서 길게 나타난다고 하였다. 때로는 현재의 과학적 시각에서 보면 황당한 것도 있었다. 특히 사망한 사람과 자식 관계를 알아내는 방법은 그러하였다. 지금과 같은 DNA테스트가 불가능하기에 독특한 방법을 사용하였는데, 자식의 피를 부모의 해골 위에 떨어트렸을 때 스며들면 친자식이고 아니면 반대라는, 터무니없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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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의 왕여가 지은 《무원록》을 보태고 고쳐 펴낸 《증수무원록》왼쪽,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이를 다시 보완하고 한글로 번역한 것이 《증수무원록언해》오른쪽, 필자 제공이다. 그림을 보면 신체의 앞 부분에 해당하는 이름을 표시하고 있다.

 

오작인, 그들의 이야기

 

한양의 오작인은 ‘동서 활인원’일종의 병원에서 일했다. 전염병이 돌거나 큰 흉년이 들어 거리에 시체가 생기면 오작인들이 이를 처리하는 역할을 하였다. 남들이 꺼리는 일을 하기 때문에, 이들도 거리낌의 대상이었다.

이런 오작인을 이용하는 인간이 있었다. 무인 출신이라 글을 모르던 세조의 공신 봉석주는 오로지 오직 재물을 모으는 일만 알고 살았다. 봉석주는 봄에 마을사람들에게 억지로 바늘 1개씩을 나누어 주고, 가을에 이자까지 쳐서 닭 1마리로 갚게 하였다. 권력을 이용한 짓이었다. 그런 그가 오작인들에게는 술과 안주를 갖추어 먹이면서 극진하게 대접했다. 물론 이유는 있었다. 오작인들을 시켜 죽은 사람의 옷을 벗겨오게 한 후에 이를 팔아먹기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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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은 종로의 원각사를 기생들의 거주지로 바꾸었다.
사진 속의 비가 원각사비의 모습이다.
끔직한 범죄에 오작인이 이용되기도 하였다. 연산군은 흥청興淸에 예쁜 여성들을 모았다. 이곳은 운평運平과 더불어 기생을 길러내는 곳이다. 그런데 여성 가운데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임신한 경우가 있었다. 연산군은 임신한 여성들이 아이를 낳으면 오작인에게 이를 버리도록 지시하였다. 실제 윤석이란 사람은 운평에 있는 여성과 간통해서 임신케 했는데, 이 일이 발각되자 윤석은 국문을 당했고, 아이는 오작인에게 맡겨지게 되었다. 이런 연산군의 유아 살해는 그가 왕위에서 축출되면서 사라졌다.

한편 16세기부터 조선 사회에 성병이 크게 유행하였다. 이때 사람의 간, 쓸개와 손가락이 성병에 좋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리고 관찰사를 지냈던 유세침의 집에서 10살 된 아이종이 실종되었다. 이 아이는 유괴되었고, 산 속에서 발견되었다. 다행히 이 아이는 죽지는 않았지만, 손가락을 잃었다.

수사를 맡았던 사헌부는 사건의 용의자로 오작인 아니면 걸인을 지목하였다. 범인이 잡혔다는 기록은 없지만, 이런 사건이 터지면 오작인이 의심 대상 1호였다. 대부분의 오작인들은 용의자로 몰릴 때마다 속이 터졌을 것이다.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과 차별 속에서 오작인은 조선 사회 속의 또 다른 섬이었던 것이다.

글_ 김인호 | 광운대 인제니움학부대학 교수
연세대학교 사학과에서 고려시대 지식인들의 국가개혁론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2년부터 2년 반 동안 KBS KOREA의 《시간여행 역사 속으로》의 진행과 자문을 맡았다. 현재 ‘한국역사고전연구소’ 연구원이며, 광운대학교 교양학부의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미래를 여는 한국의 역사 2》 《조선의 9급 관원들》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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