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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한 민속

우리에게도 ‘백작’, ‘남작’이 있었다?

지금 읽어보면 사건의 전개나 등장인물들의 생각과 행동이 영 엉성하지만, 어쨌든 김동인이 1919년에 발표한 소설 <약한 자의 슬픔>에서 주인공 강엘리자베트는 K남작의 집에 입주 가정교사로 있다. 배경이 대혁명 전의 프랑스도 아니고 분명 1910년대의 경성서울인데, ‘엘리자베트’는 기독교 신자라서 얻은 이름이라 쳐도, 난데없는 ‘남작’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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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일본 간의 조약을 조선 내에 홍보하기 위해 인쇄된 문서. 오른쪽에 메이지 일왕의 조서詔書와 순종황제의 조칙詔勅, 칙유勅諭가 인쇄되고 왼쪽에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의 유고諭告가 인쇄되어 있다. 같은 글이 상단에 국한문 혼용체로, 하단에 한글로 인쇄되어 있다. 1910년 8월 29일 발행되었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겉으로는 국민 평등을 외치며
사실은 왕가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일본의 ‘화족’

 
그것은 1910년 식민지화와 동시에 식민지기 내내 지속된 ‘조선귀족’ 제도에 따른 작위다. 조선귀족 제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대 일본의 ‘화족華族’ 제도와 조선의 ‘왕족·공족’ 제도를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
 
1868년 메이지유신 이래 일본은 개항과 근대화의 큰 걸음을 내디뎠다. 근대의 사회적 기획이란 출생에 따른 차별적 신분을 철폐하고,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인정된 개개인을 ‘국민’으로 모으는 데 있다. 일본에서도 종래 사무라이 이상만 칼을 차고 성을 가질 수 있었던 특권은 철폐되었지만, ‘사족’과 ‘평민’의 구별은 호적에 계속 남게 되었다. 게다가, 1884년에 이르러 ‘화족’이라는 새로운 귀족제도가 만들어졌다. 화족은 천황 조정의 최고 관직을 역임한 ‘공가公家’, 막부幕府의 실권자였던 도쿠가와德川 집안과 지방 제후들인 대명大名을 아우른 ‘무가武家’, 그리고 메이지유신의 공훈자를 묶어 400여 명에게 공작·후작·백작·자작·남작의 작위를 수여한 것이다. 이 작위는 맏아들에게 상속되었다.
 
근대화를 추진하던 일본정부가 새롭게 귀족신분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종래의 지위와 권력을 잃게 된 봉건지배세력을 일정하게 체제 내로 포섭할 필요가 있었다. 또 화족은 제국의회 귀족원의 의원으로서 정치적으로 천황을 보좌하는 한편, 천황가나 황족 집안과의 결혼을 통해 천황가의 혈통의 순수성을 유지하는 기능을 했다. 그러니까 화족은 당시, 천황·황실과 국민 사이의 일종의 완충장치였고, 그런 점에서 ‘황실의 울타리藩屛’라고 일컬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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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황제왼쪽와 일본 황태자오른쪽,
통감부의 사진중앙이 인쇄된 우편엽서.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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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황태자가 대한제국에 온 것을 기념하는 우편엽서.
왼쪽은 이완용, 오른쪽은 이토히로부미이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일제, 조선을 섭렵하기 위해
‘조선귀족’ 계층을 만들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일본은, 1910년 조선을 식민지로 삼으면서 대한제국 황제와 황실에 대한 처리와 처우를 설계했다. 그것은, 서로간의 합의에 기반한 ‘조약’으로 순종황제가 메이지천황에게 조선의 주권·영토·국민을 평화적으로 ‘양도’하는 형식을 취한 그들의 표현대로 ‘일한병합’의 모양새를 유지하고, 조선 국민의 반발을 최대한 무마하기 위한 조치였다. 일본 황족에 준하여 순종황제는 ‘창덕궁 이왕’, 고종은 ‘덕수궁 이태왕’이라는 칭호를 얻어 ‘왕세자’ 이은과 함께 ‘왕족’이 되고, 고종의 서자인 이강과 고종의 형인 이희는 각각 ‘공’의 칭호를 얻어 ‘공족’이 되었다.
 
이와 함께 일본은 공족 외에 조선왕실과 가까운 혈연·척족戚族성이 다른 일가인 사람, 대한제국의 고관, ‘병합’에 공로가 큰 사람을 뽑아 76명을 일본의 화족에 준하는 ‘조선귀족’으로 임명했다. 화족과 마찬가지로 옛 조선왕조와 식민지지배 사이의 연속성을 상징하는 동시에 조선민족 내부에서 식민지지배에 적극 협력하면서 그 정당성을 선전할 완충장치가 필요했던 것이다. 공작은 없고, 이재완 등 종친 4명과 순종의 장인인 윤택영, 철종의 부마인 박영효 등 6명이 후작, 이완용 등 3명이 백작, 22명이 자작, 그리고 45명이 남작이었다. 작위와 함께 그들은 최저 2만 5천 원, 최고 50만 원이 넘는 국채증권을 ‘은사恩賜’로 받았다. 1910년 당시 조선총독부의 조선인 고등관의 연봉이 최고 2천 5백 원이었고, 조선 전체의 주세酒稅주류에 대하여 매기는 간접 소비세로 수입이 1910년 16만여 원, 1911년 26만여 원이었으니까, 이들이 받은 ‘은사금’이 얼마만큼 큰 돈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귀족의 선발은 비밀리에 진행되었고, ‘병합’에 기여한 대표적 친일파인 일진회 회장 이용구가 배제되는가 하면 본인도 예상치 못하고 있던 인물이 선정되는 등의 파행이 빚어졌다. 한규설 등 7, 8명은 애초부터 작위와 ‘은사금’의 수령을 거부하거나 반납했고, 1913년에는 남작 윤웅렬의 작위를 이어받은 윤치호, 1915년에는 남작 김사준이, 또 1919년에는 자작 이용직과 김윤식, 남작 김가진 등이 ‘독립운동’이나 시국관련 사건과 관련되어 작위를 잃기도 했다.

 
 

돈 잃고, 명망 잃고
조롱거리로 기록되어버린
남작, 백작, 후작 ‘조선귀족’들이여

 

나머지 대부분의 인물들은 기꺼이, 감사하면서 작위와 ‘은사금’을 받아들였지만, 이후 많은 조선귀족들의 행보는 애초 일본정부가 기대했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일본 시찰을 다녀오거나 총독부의 각종 단체나 행사에 들러리로 꼬박꼬박 출석하면서 조선사회에 대해 총독부의 새로운 ‘시정施政’을 선전했지만, 의회 따위가 없는 식민지 조선에서 반대로 조선사회의 목소리를 모아 총독부에 전달하는 역할은 전혀 하지 못했다. 또 그들은 조선사회의 대표나 모범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왕․공족’이라는 형태로 잔존한 조선왕실의 ‘울타리’도 되지 못했다. 나라가 망한 뒤에 조선왕실에 남은 길은 일본 황족․화족과의 정략결혼뿐이었다. 왕세자 이은은 일본 황족인 나시모토노미야梨本宮 집안의 마사코方子 여왕과 혼인했고, 덕혜옹주는 쓰시마對馬島의 소오 집안으로 시집을 갔다.
 
게다가 많은 조선귀족들은 물려받은 가산이나 ‘병합’과정에서 축적한 재산에 ‘은사금’까지 더해 부를 축적했지만, 근대적 경제환경에 적응해서 성공적으로 자본가로 변신하지도 못했다. 그들은 무모한 투자와 ‘귀족’다운 사치스런 생활로 빠른 시간 안에 몰락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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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복제요람>. 오사카매일신문의 1911년 1월 1일자 부록으로 발행.
당시 일본의 각종 제복 및 예복이 도해圖解된 문서로 군인, 공무원, 귀족 등의 복장이 수록되어 있다. 가장자리에 당시의 훈장이 돌아가며 도해되어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그러다 보니 조선귀족은 총독부가 기대한 것처럼 조선사회의 모범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총독부의 골치거리이자 조선사회의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물론 식민지기 내내 큰 부를 축적․유지하거나 사회사업을 거든 자들도 일부 있었지만, 경제적으로 몰락해서 귀족으로서의 품위 유지는 물론 생계유지도 힘들 지경이 되고, 총독부의 지원으로 근근이 살아가야 하는 자들도 많았다.

 
투자·투기의 실패로 거액의 부채를 지거나 파산에 이르기도 하고, 마약과 도박에 손을 대거나 강도행각을 벌인 자들도 있었다. 축첩과 복잡한 여성관계로 이후 친자확인이나 상속을 둘러싼 추잡한 집안싸움이 일기도 했다. 이런 추문들이 낱낱이 신문에 보도되면서 이들은 당대의 사회적 조롱거리가 되었다. <약한 자의 슬픔>의 K남작도 그렇지만, 이광수의 <무정>에서 영채를 겁탈하는 김현수 역시 자작이자 경성학교 주인인 김 남작의 아들인 것으로 되어 있다. 나라를 팔아넘기는 데 협력한 공으로 외세로부터 부여받은 ‘귀족’의 작위란 그런 것이었다. 해방 이후 조선귀족 대부분은 당연히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고, 그들 중 ‘은사금’ 등을 기반으로 식민지기 축재에 성공했던 몇몇의 경우는 지금도 이른바 ‘친일파후손의 재산 환수’ 문제로 뉴스거리가 되고 있다.

 
 

글_ 서호철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
서울대 대학원에서 역사사회학/사회사를 전공했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책 〈식민권력과 통계〉공저, 2003을 썼고, 〈시마 상, 한국 길을 걷다〉2013, 〈대지를 보라〉2016 등의 책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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