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면 이 소설을 읽는다. 윤대녕의 ‹January 9, 1993. 미아리통신›. 나만의 소박한 세시풍속 같은 것이다. 크리스마스트리에 반짝거리는 구슬을 달고 캐럴을 듣는 일과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다. 1993년의 어느 겨울날 하루가 배경인 이 소설을, 1990년대 후반부터 읽어 왔다. 그러면 어김없이 ‘겨울비가 주름져 내리는’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나는, 여러 가지 캐럴이 순환해서 울려 퍼지는 도심의 카페에 앉아 윤대녕의 이 소설을 다시 한 번 읽는다.
뚜생과 베티, 세종이라는 세 인물이 나오는 소설이다. 다 본명이 아니다. 별명 같은 것. <욕조>라는 소설을 쓴 프랑스 소설가 장 필리프 투생을 닮아서 뚜생, 영화 <베티 블루>의 여주인공 베아트리체 달을 닮아서 베티, 주머니 가득히 백 원짜리 동전을 넣어 다닌다고 해서 세종이다. 가만. 백 원짜리 동전에 양각된 인물이 세종대왕이 맞나? ‘미아리 통신’의 화자인 세종은, 자기를 세종으로 부르는 베티와 뚜생이 백 원의 인물이 세종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고 한다. 문화적이고 문학적인 인물들이다. 이들은 예술을 꿈꾸지만, 예술은 요원하고, 현실은 녹록지 않다. 먹고사는 일은 고달프다. 어느 토요일 오후, 이들은 점을 보러 가기로 한다. 하지만 이들은 점을 본다는 게 썩 내키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들 셋은 자신들을 푼수로는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절망의 경험과 용기가 충분치 않으며, 수치심도 충분히 제거하지 못했으며, 삶에 대해 충분히 겸허해지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탈진하거나 몰락하기는 했으되 ‘완전히’ 하지는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충분하거나 완전하지 못한 이유로 이들은 망설이고 있다. 이럴 때는 누군가 먼저 나서야 한다.


뚜생이다. 잡지사를 때려치우고 전업 작가로 나선 서른넷의 남자. 책은 잘 팔리지 않고, 처자식도 있다. 베티는 시를 쓰다가포기하고 방송국 스크립터로 일하고, 세종은 예술 사진 대신 상업 사진 ‘나부랭이’들만 찍고 있다. 살고 싶었던 대로 사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이쯤 하면 궁금해지는 것이다. 이렇게 ‘거지같이’ 사는 게 나한테 지워진 운명이라는 것인가? 이게 팔자라는 건가? 그렇지 않다는 말을 듣고 싶다. 그런 말을 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렇게 거지같이 사는 게 나의 운명이라는 걸 확인받는다면?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지? 이들이 점을 보고 싶으면서 동시에 보고 싶지 않은 이유다. 그런데… 재미… 재미로 보는 거라면 좀 다르다. 교양 있고 충분히 체념하지 못한 이들을 설득하는 게 ‘재미’라는 명분이다. 그래서 이들은 점을 보러 가기로 ‘결행’한다.
이들은 미아리 점집 골목을 굽이굽이 올라가며 점집의 이름을 읽는다. 운명과 철학, 역학과 점술, 거북, 희망, 백암, 송학, 대산 같은 거창하고 원대한 명사들이 간판에서 창궐한다. ‘미아리통신’을 다시 읽으며 신년에는 미아리에 가서 신년운수 같은 것을 봐도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찾아본다. 그런데 YTN의 리포트에 따르면, 1980년대에는 점집이 100개가 넘었으나 ‘현재’는 18곳이 남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리포트의 게시일이 2009년 9월이다! 미아리에 간다면, 나는 몇 개의 점집 간판을 읽을 수 있을까?
이 소설의 제목에 대해 생각한다. 작가는 왜 ‘1993년 1월 9일’이라고 한국식대로 적지 않고, ‘January 9,1993’이라고 적었을까? 1993년보다 January를 앞에 두고 싶었던 게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매해 1월이 반복되므로 이런 제목을 썼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1993년은 가면 오지 않지만 1월은 가도 또 오므로.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인생의 ‘시시함’에 실망하고 동시에 안도하게 된다. 그리고 짐작하게 된다. 나의 올해가 그랬듯이 나의 새해 역시 그러리라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대를 갖고 1월을 맞이하고 실망으로 12월을 보내리라는 것을. 점을 보기도 하리라는 것을. 이런 일을 여러 번 반복하게 되리라는 것을. 그리고 바란다. 이런 일을 더 여러 번 반복할 수 있게 되기를.
소설가. 2012년 문학동네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 2015년 장편소설 《거짓말》로 한겨레문학상 수상. 소설집으로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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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을 본다는 것, 젊어서는 한두 번 해봤었나? 원래 그런일 믿을게 못돼 안하던 짓인데… ,
보아야 별 볼일 없는 삶이라는 무의식같은 습관이었나? 이젠 아주 잊고 산지도 수십년,
앞으로도 그런건 잊고 살아야 남은 생이 마음 편할 일 아닐까…?
스스로에게 이건 학문이야 라고 위장(?) 혹은 포장(?)한다. 그러면 마음이 좀 편해진다. 그리고 결과는 운명이라는 것으로 끈을 묶는다. 하지만 그 끈도 종류가 많으니까 가끔은 궁금해지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