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대중음악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 1920년대 이후의 일이지만 이때까지도 대중들이 가장 선호하는 음악은 판소리 같은 예술음악이었다. 대중매체가 등장한 이후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를 꼽으라면 이른바 ‘국민 스타’의 탄생인데, 당시 유성기와 라디오의 등장과 더불어 대중들에게 그야말로 혜성과도 같이 등장한 소리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임방울1904~1961, 본명 임승근이었다.
조선 시대의 오디션 프로그램 ‘조선명창대회’
임방울 우승하다
임방울 우승하다
사실 일반 대중이 집에서 혼자 음악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유성기가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것이 19세기 후반의 일이고, 경성방송국이 처음 시험전파를 발사한 것이 1926년의 일이니, 일반 대중의 경우 20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개인적으로 음악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유성기와 라디오 수신기 등장 초기에 사람들은 이것이 어떤 파급효과를 불러일으킬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듯하다. 이내 이 새로운 장치들이 음악 분야와 연결되면서 이전에 없던 ‘신기한 물건’ 정도라 여겼건 것들이 대중문화의 장을 여는 사건의 중심이 되었다.
임방울은 1929년 매일신보사가 주최한 ‘조선명창대회’ 무대에 올라 판소리 춘향가의 한 대목인 ‘쑥대머리’를 불렀고 연이어 경성방송국에 출연하여 전국에 임방울이란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명창대회’ 무대에 설 정도면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상당한 실력의 소유자였겠지만, 이 무대를 통해 임방울은 전문가들 사이에서만 이름 있는 소리꾼이 아니라 대중들이 좋아하는 소리꾼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임방울은 1929년 매일신보사가 주최한 ‘조선명창대회’ 무대에 올라 판소리 춘향가의 한 대목인 ‘쑥대머리’를 불렀고 연이어 경성방송국에 출연하여 전국에 임방울이란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명창대회’ 무대에 설 정도면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상당한 실력의 소유자였겠지만, 이 무대를 통해 임방울은 전문가들 사이에서만 이름 있는 소리꾼이 아니라 대중들이 좋아하는 소리꾼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신문에 실린 유성기 광고.
나팔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가 두배 가량 된다. 없는 것이 더 비쌌다.
나팔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가 두배 가량 된다. 없는 것이 더 비쌌다.
더 많은 대중이 임방울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데는 라디오보다 유성기 음반의 힘이 컸다. 경성방송국이 개국한 1927년도에 우리나라에 있는 라디오 수신기 숫자가 총 1,400여 대에 불과했고, 좋아하는 음악을 두고두고 다시 듣기 위해서는 유성기가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음악을 원하는 만큼 다시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신기함 이상의 놀랄만한 경험이었다.

임방울이 사람들 앞에서 공연하는 모습
임방울은 이때부터 유성기 음반을 취입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알려진 독집만 무려 130면 이상에 이른다. 이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춘향가의 ‘쑥대머리’이며 이 음반만 일본, 만주 등지를 합쳐 20만 장 이상이 판매된 것으로 알려졌고, 항간에는 100만 장 이상이 판매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인구가 두 배 이상 늘어나고 모든 사람이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지금과 비교해도 이 수치는 많은 것이지만, 1930년대까지도 유성기 소유를 ‘가진 자의 사치’로 여겼던 것을 생각하면 실로 엄청난 수치이다. 모르긴 해도 당시 우리나라에 있는 유성기 숫자보다 몇 배 더 많은 음반이 판매된 셈이니 말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흔히 임방울의 이름 앞에는 국창國唱이란 별호를 붙인다. 나라를 대표하는 소리꾼이란 의미일 것이다. 공식적으로 아무도 임방울에게 국창이란 호칭을 붙여주지 않았지만 임방울을 국창이라 부르는 것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글_ 위철 |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