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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민속보고서

기생의 뒷모습을 읽다

어릴 때 살던 동네에 기생이 나온다는 요정이 있었다. 저녁 무렵이면 머리를 만지고 예쁘게 화장한 누나들이 높은 돌담장으로 둘러쳐진 집을 바쁘게 드나들었다. 높은 담장 너머에는 큰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어서 바깥에서는 집이 온전히 보이지 않았지만, 문틈으로 보이는 정원은 멋지게 굽은 나무들과 기이한 바위들이 썩 잘 어울렸다. 어둠이 내리면 정원 곳곳과 방방이 불이 훤히 켜졌다. 주로 정치인이나 사업가들이 벌인 술판에서 기생은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른다고 했다. 부산 동래의 온천장에 있는 동래별장이라는 곳이다. 지금은 한정식집이 되어 결혼식장으로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

 

화려한 기생들의 초라한 뒷모습

어린 내 눈에 비친 기생은 해질녘 살짝 나타났다 자기들만의 세계로 사라지는 별세계에 사는 선녀와 같았다. 옛날에 동네 기생을 여우로 보고 잡으려 한 우활한 선비가 있다더니 기생은 정말 보통 사람과 달랐다. 기생은 죽어도 볼품이 있다는 ‘기생 죽은 넋’이라는 말이 공연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본 1970년대의 기생이야 전통적 관념에서 보면 기생이라고 말을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양인과 천민을 나누는 신분제로 인해 기생이 된 것도 아니고, 기예妓藝의 측면에서도 제대로 배우기나 했을까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양만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조선시대 기생들도 뽐내고 자랑할 때는 스스로를 선녀에 비겼다. “우리 근본 생각하면, 아득한 옛날 옛적, 하늘에 죄를 입어, 인간 세상 쫓겨 오니, 적강 신선 아니라면, 정한 남편 뉘 있으리. 왕손으로 벗을 삼고, 호객으로 이웃하여, 고루거각 비단 장막, 비단옷 좋은 음식, 신선이 아닐진대, 호화를 이다지 할까.”라고 뻐겼다. 기생은 스스로를 하늘나라에서 쫓겨 내려온 선녀에 비기면서, 자기들과 같은 처지의 훌륭한 신선이 아니라면 남편으로 삼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귀족이나 부자들과 사귀면서, 좋은 집, 좋은 옷, 좋은 음식으로 호화롭게 산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화려하고 호화로운 기생 생활에도 이면이 있다. 빛의 반대쪽 그늘이다. ‘기생의 자릿저고리’라는 말이 기생의 그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자릿저고리란 잠잘 때 입는 저고리, 즉 잠옷이다. 기생이 머리와 얼굴을 꾸미고 손님들이나 청중들 앞에 있을 때는 아름답지만, 일이 끝난 다음 속옷 바람으로 잠이 들면 머릿기름과 화장 분으로 더 지저분하다. 보통 사람보다 예쁜 모습을 보였다가 더 더러운 모습으로 추락하는 것이다.

 

기생이라는 이름을 벗으면 서글픈 인생

젊고 예쁘거나 자신의 예술적 능력을 인정받을 때는 기생의 자랑이 허세로 보이지 않지만, 사람이 늘 젊고 예쁠 수 없고 늘 잘할 수도 없다. 나이 들어 기생 일에서 물러난 퇴기야 아무 곳에도 의탁할 수 없는 불쌍한 신세일 것을 누구나 알지만, 운 좋게 귀인의 첩이 되어도 그 인생은 가련하기 그지없다. 첩이 스스로의 인생에 대해 탄식하며 부른 노래를 보면 “집 정한 첩 좋다 하나, 첩 구실 극난이라. 처첩이 부부지정은 동시 일반이나, 위계가 현격하니, 분한 일 많고 많다.”고 하면서, 어떻게 행동해도 욕을 먹는 첩의 처지를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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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일 박사가 기증한 기생 엽서 속 조선 시대 기생들의 모습
1990년대 초 나는 시골의 고향 마을에 가서 일가 할아버지의 기생첩을 본 적이 있다. 그 분은 ‘파리보다 기생이 셋 더 많다’는 속담이 전하는 진주의 기생이었다고 하는데, 첩이 되어 집안에 없던 아들까지 낳았지만 집으로 들어오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본부인이 죽자 중풍이 들린 남편의 병수발을 핑계로 집으로 들어왔다. 아흔을 바라보는 늙은 남편의 간병을 위해 여든이 다 된 노구를 이끌고 집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첩 할머니는 아들이 없는 집에서 집안의 후사를 낳은, 어찌 보면 귀한 몸이었다. 그런데도 손자뻘인 내가 하는 절을 한사코 받지 않았다. 스스로 그럴 자격이 없다고 여긴 것이다. 첩은 본처와 그 주변에서는 가정 파괴자로 여겼지만, 기실 그 자신이 피해자였다.

 

함경도 북청에서는 딸을 셋 낳으면 하나는 농가에 시집 보내고, 하나는 교방에 집어넣고 하나는 무당에게 팔았다고 한다. 이유원1814~1888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 나오는 말이다. 교방은 기생이 기예를 배우는 학교니 딸 셋 가운데 하나는 기생을 만들었다는 말이다. 19세기 북청 기생의 수가 삼사백 명에 이르렀으니 당시 북청 인구를 감안하면 이 말을 과장으로 돌릴 수는 없다. 진주 기생의 수도 북청과 비슷했는데, 진주의 민가에서 기생 이모, 기생 고모를 안 둔 사람이 없다는 말이 나온 것도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기생은 일차적으로 가난의 희생이었다.
전근대에는 가난만이 기생을 만들지 않았다. 신분 때문에 그렇게 정해질 수도 있었다. 조선 시대 기생은 기본적으로 관청에 딸린 관비를 가리킨다. 관비 가운데 허드렛일을 맡은 무자리水汲婢 외에, 기생은 공식적 행사에 동원되거나 사신을 접대하는 일을 맡았다. 관노비의 자식이 기생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천한 노비인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했다. 기껏해야 반인반물半人半物의 존재였다. 그러니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도 다반사로 일어났다.

 

너무 일찍 세상을 알아가는 기생들의 삶
기생은 지금 나이로 보면 미성년인 경우가 많았다. 옛날에는 이팔청춘이라고 열여섯 살을 한창 때라고 보았으니, 기생의 전성기도 미성년 때였던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일을 부리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에 기생이 되었다. 교방에 들어가는 나이가 7~8세, 더 어린 경우는 5~6세도 있었고, 12~13세가 되면 남성을 받기도 했다. 19세기 황해도 해주의 기생 명선은 자기 인생을 서술한 노래에서 열두 살 때 남자를 받고는 “금수와 일반이라”고 했다. 상대 남자가 짐승이라는 것인지, 자기 처지가 그렇다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비참한 심정을 ‘짐승과 같다’고 표현했다. 이런 기생의 아픔을 세상 누구도 알지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조선 후기에 민중의 아픔을 가장 잘 이해한 학자로 알려진 연암 박지원조차 자신이 안의 현감으로 있을 때 벗 박제가가 자기 고을에 오자 열세 살 어린 기생을 데리고 자게 했다.

 

기생의 삶은 이처럼 겉과 속이 크게 달랐다. 기생의 겉만 보고 기생이 밖으로 내뱉은 말만 들으면 결코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 기생을 보는 시선은 남성의 것도 있고, 기생 아닌 여성의 것도 있지만, 기생 스스로의 것도 존재한다. 그들의 시선에서 보지 않으면, 또 그들의 속마음을 담은 말을 듣지 않으면, 그들의 삶도, 그들이 남긴 문학도 예술도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이 기생은 물론 한 인간을 온전히 이해하는 길이다.

 

*이 글의 인용은 필자의 책 <나는 기생이다>문학동네, 2007에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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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일 박사가 기증한 기생 엽서 속 조선 시대 기생들이 기생양성소 등 기생 학교에서 교육 받는 모습

 

글_정병설 |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글소설을 중심으로 주로 조선시대의 주변부 문화를 탐구했다. 기생의 삶과 문학을 다룬 <나는 기생이다 – 소수록 읽기>, 그림과 소설의 관계를 연구한 <구운몽도 – 그림으로 읽는 구운몽>, 음담에 나타난 저층문화의 성격을 밝힌 <조선의 음담패설 – 기이재상담 읽기>, 사도세자의 죽음을 통해 조선 정치사의 이면을 살핀 <권력과 인간-사도세자의 죽음과 조선 왕실>, 조선 후기 천주교 수용을 다룬 <죽음을 넘어서 – 순교자 이순이의 옥중 편지> 등의 책을 펴냈으며, <한중록>과 <구운몽>의 번역서를 출간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소설 유통에 대한 연구와 아울러 한국문화의 위상과 성격을 언어, 종교, 사상 등의 여러 측면에서 바라본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필자는 전시도록 <기생 100년 엽서 속의 기생읽기>를 살펴보고, 자신의 조사 내용과 개인적인 추억을 토대로 이 글을 썼다. 전시도록 <기생 100년 엽서 속의 기생읽기>는 2008년 6월 18일부터 2008년 7월 10일까지 개최한 박민일 기증 특별전 <기생 100년 엽서 속의 기생읽기>에 전시한 자료를 수록한 것으로, 전시는 박민일 박사가 기증한 270여점의 기생엽서와 관련 자료를 통해 기생의 기원부터 20세기 패션리더 기생까지 살펴볼 수 있는 자리로 구성되었다.

| 전시 도록 <기생 100년 엽서 속의 기생읽기> – 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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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댓글이 등록되었습니다.
  1. 김준희 댓글:

    좋은 자료를 공유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늘 우리 역사에 관심이 있습니다만.. 자주 찾지를 못하고 ..ㅜㅜ
    생각난 김에 국립민속 박물관에 들러 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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