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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한 민속

우리는 어떻게 목욕했을까?

역사가 기록하고 있지 않아도 목욕은 문명 발생의 초기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다만 기록이 없으니 고대의 목욕 문화는 추측에 근거할 수 밖에 없다. 냇물이나 샘에서 씻거나 물을 길어와 집 뒤뜰에서 목욕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 운 좋게 근처에 온천이 있다면 푸근하게 몸을 담갔으리라.

『삼국사기(三國史記)』권 제17 - 고구려본기 제5 서천왕 17년
<삼국사기三國史記>권 제17 – 고구려본기 제5 서천왕 17년.
붉은 색으로 표시된 부분에 온탕溫湯이라고 적혀있는 것이 보인다.
궁금함을 풀어주는 건 고대의 역사서들이다. 남아있는 가장 오랜 역사서인 삼국유사에는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BC 69~AD 4를 동천東泉에서 목욕시켰다는 기록이 있는데, 후에 진평왕은 이곳에 동천사東泉寺라는 절을 지었다고 한다. 중국이나 일본에는 온천 기록들이 다수 보이는데 서주시대 주유왕BC 777년경이 만들고 양귀비가 목욕했다는 화청지華清池가 있고 일본에는 성덕태자?~622가 즐겨 찾았다는 도고온천道後溫泉이 지금도 그 자리에서 영업을 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온천이 많지 않은 한반도에서는 <삼국사기>에 “왕의 동생인 일우逸友, 소발素勃이 모반하였을 때 질병을 사칭하고 온탕에 가서 온갖 무리들과 어울려 유락遊樂을 즐겼다.”서천왕 17년, 286년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목욕이 좀 더 문명적인 행위가 되는 것은 청결이나 미용, 건강과 같은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자연을 단순히 이용하는 것이 아닌, 목욕을 위한 구조물이나 도구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부터일 것이다. 우리는 도구들을 통해 목욕이 문명적 행위로 재해석되는 정황을 그것들에서 살펴볼 수 있다. 로마 제국 카라칼라 황제의 목욕탕220년 무렵 설립은 1,600명을 수용했다고 하는데 열탕· 온탕·냉탕은 물론이고 노예들의 시중, 마사지사, 올리브 기름칠, 스트리질strigil이라는 때밀이 금속도구 등이 목욕 문화를 구성했다. 로마인들에게 목욕은 정복을 통해 쌓은 부에 기반한 향락적 행위였음이 목욕 문화에 고스란히 나타난다.

그렇다면 한반도의 역사에서 나타난 목욕 문화들은 어땠을까? 오늘날 증거가 남아있는 몇 가지 대표적 사료들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자.

신라의 공중목욕탕

근대식 공중목욕탕은 1924년 평양에 처음 생겼다고 한다. 서울에 등장한 것은 그 이듬해였다. 공중목욕탕은 비록 동성끼리라고 해도 낯선 이들에게 알몸을 보여줘야 하는 곳이다. 조선의 유교문화에서 몸은 함부로 남에게 보여주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에 공중목욕탕은 상상도 하기 힘든 것이다.
그러나 시대를 건너뛰면 신라시대에 공중목욕탕이 등장한다. 신라의 공중목욕탕은 몸을 씻는 행위를 종교적으로 해석하는 문화에 따른 것이다. 바로 불교의 몸을 씻는 것이 마음을 씻는 것이라는 ‘목욕재계’의 가치가 널리 퍼졌고, 절에서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몸을 씻어야 하니 절 안에 공중목욕탕이 생긴 것이다. 즉 한반도에서 목욕 문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불교 덕분인 셈이다. 이와 함께 조두澡豆팥과 녹두 등을 갈아 만든 가루비누, 향유와 향수와 저장용 병, 칸이 나눠져 있는 화장품 저장함土器化粧盒 같은 도구들이 사용되어 목욕이 청결뿐만 아니라 미용과도 만났음을 보여준다.

고려의 남녀혼욕

“남녀 구별 없이 모두 의관을 언덕에 두고 물굽이에 따라 벌거숭이가 되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실려 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저자 서긍徐兢은 애당초 삽화를 넣었다는데, 전해지는 것은 그림이 없는 부본뿐이라는 것이다. 목욕 장면을 그림으로 그렸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있었다면 고려 시대의 개방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이 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고려 시대는 조선 시대보다 개방적인 사회였다. 부인이나 승려도 남자처럼 절을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남녀 재산 균등 상속은 무려 17세기 즉 조선 시대 중후반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이런 개방성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이 바로 남녀 혼욕 문화인 셈이다. 그것도 몰래 하는 혼욕이 아니라 모두에게 공개된 시내에서 했다는 것은 오늘날의 한국 문화에서도 상상하기 힘든, 서구의 누드비치nude beach에서나 볼 법한 자유로움이다.

조선의 이벤트탕 ‘향초탕’

대중탕에 가면 있는 ‘이벤트탕’은 우리 모두에게 친숙할 것이다. 그런데 소위 말하는 ‘이벤트탕’에 준하는 비법이 조선시대에도 존재했다. 동의보감에는 ‘몸에 향이 나게 하는 방법’의 일환으로 목욕물에 향초를 넣는 방법이 쓰여 있다. 모향茅香/香茅의 잎을 다진 물이나 영릉향零陵香을 넣은 물에 목욕을 하면 나쁜 냄새가 없어지고, 몸에 향기가 난다고 한다. 이 밖에도 건강을 위한 인삼탕, 마늘탕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목욕은 대중목욕탕이 없던 조선시대에는 양반 일부의 전유물에 불과했고, 더구나 알몸을 꺼렸으므로 옷을 입은 채 부분 목욕을 하는 것이 풍습이었다. 그래서 발달한 것이 커다란 함지박이었다. 물론 사람이 들어갈 만큼 큰 함지박이 아니라 그 옆에서 물을 끼얹으며 쓸 용도였을 뿐이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목욕도구는 함지박이 아닐까?

조선시대 한증소

찜질방에 한 번이라도 가본 사람은 사방이 벽돌로 막히고, 뜨거운 ‘한증막’에 대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한증汗蒸/汗烝’이란 특수하게 만든 탕에 높은 열을 보장하고, 그 속에 일정한 시간 들어가 있으면서 몸에 땀을 내어 병을 치료하는 방법이다. 한증을 이용한 시설이 최초로 기록에 등장한 것은 세종 때이다. 세종실록과 문종실록에 실린 바에 따르면 관의 보호와 감독을 받는 ‘한증소’라는 시설이 존재했으며, 질병의 구료에 이용되었다고 한다. 드라마 <왕의 얼굴>2014년 방영, KBS은 최초로 한증소를 드라마 속에서 보여줬는데 왕선조과 왕자광해군로 분한 배우들이 소위 식스팩을 자랑하고 있기도 했다. 그런데 통일신라 시대에 이미 돌에 물을 끼얹어 증기를 내서 목욕하는 증기욕이 발달했고 이것이 일본에까지 건너가 일본 서민들이 한증탕을 공중목욕탕으로 이용했다고 한다. 한증의 역사도 천 년을 기록하는 셈이다.

이렇게 보니 목욕 문화란 그 시대의 정치, 경제, 문화, 그리고 가치관과 제도가 버무려진 물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이 아닌가 싶다. 목욕에는 숨겨진 문명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요즘 중국에는 ‘아란그룹’이라는 회사에서 시작한 한국식 찜질방 프랜차이즈가 전국으로 퍼져나가며 무려 3,000개의 대리점을 두고 있다고 한다. 찜질방 한류다. 신라의 한증막에 이어 천 년 만에 두 번째로 한국의 독특한 목욕 문화가 외부 세계와 만나고 있다. 한국의 성장을 상징하는 셈이다.
축하라도 하는 의미에서 독자 여러분도 근처의 찜질방을 찾아 한 번 가보는 건 어떨까? 거기엔 현재의 목욕 문화, 아니 한국문화 전체의 축약본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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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 김경훈 | 한국트렌드연구소 소장
서울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2005년 한국트렌드연구소를 설립했다. 메가트렌드 및 로컬트렌드 조사를 토대로 한 맞춤 리포트를 주요 기업 및 기관에 제공하고 있으며, 예측전문가 양성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이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우리나라의 역사에 관한 조사를 진행하였으며, <뜻밖의 한국사-조선왕조실록에서 챙기지 못한 이야기>를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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