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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그랬지

식민지 시대 경성과 백화점, 그리고 신경증

해가 들지 않는 방이 있다. 창문이 없나? 그건 아니다. 해가 드는 것을 ‘그들’이 모른 체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누군가? 33번지의 18가구에 사는 남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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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33번지라는 것이 구조가 흡사 유곽이라는 느낌이 없지 않다.
한 번지에 18가구가 죽 어깨를 맞대고 늘어서서
창호가 똑같고 아궁이 모양이 똑같다.
게다가 각 가구에 사는 사람들이 송이송이 꽃과 같이 젊다.

 

이상의 단편소설 <날개>의 도입부다. ‘나’는 33번지에 산다. 이곳의 낮은 조용하고, 밤은 화려하다. 밤이 되면, 시무룩해 있던 18개의 방에 생기가 도는 것이다. 그렇다. 집이 아니라 방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집은 아니다. 집은 없다.” 모르긴 몰라도, 이 18가구에 사는 사람들도 이곳을 집으로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다. 이상은 실제로 33번지에 산 적이 있다. 1934년 그는 ‘비밀리에’ 종로구 관철동 33번지 -18가구가 살고 있는- 나가야長屋에 살림을 차린다. 대항권번大亢券番 근처였다. 상대는 금홍이라는 기생이었다. 33번지에 모여 사는 이들은 ‘대항권번’과 관련이 있는 남녀들이라고, 그래서 33번지를 임시거처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었을 거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상은 1933년 3월 각혈한 후 화가 구본웅과 함께 요양하러 갔던 황해도 백천온천에서 금홍을 만난다. 금홍을 마담으로 삼아 다방 제비를 운영하고 그녀와 동거하기 시작한다.그녀가 대항권번에서 일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후 금홍은 여러 번 가출한다. 1936년 6월봄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상은 신여성 변동림과 결혼한다. <날개>는 1936년 9월 《조광》에 발표됐다.

 

이색적이지 않나? 새로운 여자와의 생활을 ‘설계하는’ 시점에 자신의 지난 연애의 상대–그것도 여염집 여자가 아닌 기생–와의 생활을 모티프로 한 소설을 발표한 것이다. 어쨌거나 자랑스러운 상대가 아니었을 테니 ‘비밀리에’ 살림을 차렸겠으나 얼마 후 자기 스스로 자신의 비밀을 폭로하는 이런 글쓰기라니. 작가는 작정하고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를 자기 자신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나’는 이런 남자다. 아내를 생각해서 이웃들과 왕래하지 않으며 방에서만 지낸다.이웃에도 이런 생각을 하는 남자가 살고 있을 것만 같다. 이부자리는 그의 몸의 일부이며, 이불 속의 ‘사색 생활’을 즐긴다. 방은 윗방과 아랫방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윗방은 남자가 아랫방은 아내가 쓴다. 그는 아내가 외출하면 아랫방으로 건너 와 이런저런 놀이를 한다. 빛을 거울에 반시시킨다든가 휴지에 돋보기를 대고 불장난을 한다든가. 이 남자는 명색이 남편이라면서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잠을 잔다. ‘아내’라고 부르니 아내이기는 하겠지만 아내라고 부르기도 뭣한 여자의 옆방에서 말이다. 아내가 없는 방에서만 아내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아이러니다.

 

아내는 어떤 사람인가? 하루에 두 번 세수를 하며, 저녁 일곱 시에 하는 두 번째 세수를 더 공들여 한다. 그리고 낮보다 밤에 더 좋은 옷을 입고, 진솔버선만 신는다. 외출을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내객이 있다. 내객이 오면 남자에게 오십 전짜리 은화를 준다. 그러면 그는 저금통에 돈을 넣는다. 남자는 아내의 직업이 무엇인지 “좁은 시야와 부족한 지식”으로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아내에게 매달려 사는 이 남자는 근심이 없단다. 그의 말을 그대로 믿는다면 그렇다. 그리고 모든 건 아내 때문이다. 돈이 없는 것은 아내가 돈을 조금밖에 주지 않기 때문, 옷이 코르덴 양복 한 벌 밖에 없는 것도 역시 아내가 옷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집을 지키고 있는 고양이 같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을 하고 글을 쓸 줄 아는 고양이. 좀 슬프지만 내색하지 않는 고양이. 이 남자는 딴청부리기의 명수다. 해를 모른 체하고, 이웃들을 모른 체하고, 아내를 모른 체하고, 자신을 모른 체하는 남자라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픈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래서 이 남자는 어느 날인가는 저금통을 변소에 갖다 버린다. 돈은 필요 없고, 은화가 모일수록 그는 슬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남자는 그렇게 말하지 않지만. 갑갑해진 남자는 밖으로 나간다. 경성역 일이등 대합실 티룸에서 커피를 마시고 금붕어를 본다. 오월의 금붕어. 그러고는 미쯔코시 백화점 옥상으로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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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뚜우 하고 싸이렌이 울었다.
사람들은 모두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 것 같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찰나,
그야말로 현란을 극한 정오다.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 그리고 지폐와 잉크는 남자가 미쯔코시 옥상에서 볼 수 있는 풍경들이었을 것이다.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으로 지어진 건물이 있고, 그 안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지폐와 잉크를 다뤘을 것이다. 저축은행, 조선은행지금의 한국은행, 상업은행, 경성우체국이 있었다. 미쯔코시 백화점은 1930년대 당시 경성에서 가장 높은 건물 중 하나였다.

 

현재의 신세계백화점 자리가 옛 미쯔코시 백화점이다. 미쯔코시 경성점은 지상 4층, 지하 1층의 근대적 건물로 지어졌다. 6•25전쟁 때에는 미군의 PX건물로 사용되었는데, 작가가 되기 전 박완서는 이곳에서 일했었다. 그리고 후에 이곳을 등장시켜 「나목」을 쓴다.

 

도시라고 할 수 없을 도시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을 과거의 백화점에 대해 생각한다. 골방과 광장, 전근대와 근대, 어두움과 밝음, 그 낙차에 대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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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쯔코시 백화점이 찍힌 엽서들. 조선은행에서 바라본 미쯔코시 백화점을 찍은 사진이 인쇄되었다. 흑백 사진은 경성일지출상행[HINODE-SHOKO SEOUL KOREA] 발행.
이상李箱

시인이자 소설가. 본명은 김해경. 1910년 서울 통인동에서 태어나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했다. 조선총독부 건축과 기수로 근무하면서 문학과 미술을 창작했다. 1933년 건강이 악화되어 총독부 기수직을 그만두고 다방 ‘제비’ ‘쓰루’ ‘69식스나인’ ‘맥’ 등을 경영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을 발표한다. 1936년 도일하여 동경에서 지냈으며, 1937년 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병 보석으로 나온 뒤 한달 뒤 사망한다.
조광
《조광朝光》은 1935년 11월 1일에 『조선일보』 출판부에서 발행했다. 주로 국제문제, 경제, 국학, 생활, 소설 등을 실었다. 1940년 8월 『조선일보』가 폐간되면서 주식회사 조광사로 독립했고, 일제의 압력으로 1942년 1월호부터 일문이 섞이기 시작했다. 1945년 봄에 전시 사정으로 폐간하고 1946년 3월 25에 속간을 냈으나, 1948년 12월 15일 통권 3호로 종간되었다. 창간호에는 신석정‧백석‧유치환‧김기림‧김동환‧임화 등의 시와 주요섭‧이태준‧박화성‧함대훈 등의 소설, 그리고 함상훈‧신태악‧홍종인‧유치진‧이헌구 등의 논문이 실려 있다.
글_ 한은형
소설가. 2012년 문학동네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 2015년 장편소설 《거짓말》로 한겨레문학상 수상. 소설집으로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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