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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전시

우리집 가계도家系圖, 내가 한 번 그려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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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쥐팥쥐 전, 장화홍련 전,
삼대, 감자, 압록강은 흐른다, 빈처, 무녀도, 수난이대,
김 약국의 딸들, 지리산 등.
대부분의 설화와 소설은 가족사에서 시작되고 가족사로 남는다. 

아버지와 할머니, 다시 그의 아버지는 누구였는가.
인간은 가족 안의 역사에 집착하고 또 집착해 왔다.
당신이 ‘이런 사람’인 이유를 우리는 가족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가족이 모여 나라가 되고, 가족의 이야기가 역사가 된다.
즉, 가족사를 탐문하여 들어가다 보면 그 시대의 살림살이를
낱낱이 살펴볼 수 있게 된다.

 

이번 기회에 당신 만의 가계도를 한 번 그려본다면
깊이 숨어있던 당신의 속 모습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내 핏줄의 역사를 대변하는 ‘족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족사’라는 개념은 희박해졌다. 어디의 무슨 성씨 정도로만 알고 있는 가계가 현재의 삶에 그다지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는 시절이기 때문이다. 족보는 집안 어르신들의 몫일 뿐, 사회활동이 활발한 세대에게는 큰 감흥 없는 정보로 여겨진다. 하지만 초등학교 시절, 내 조상 중에 어떤 유명인사가 있었으며 그 내용이 교과서에 실려있다고 자랑하던 아이들의 자부심을 생각하면 족보는 우리가 본능적으로 인정하게 되는 ‘이력서’와도 다름없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지금의 우리는 ‘족보’라는 단어에 은근한 반감까지 느끼곤 한다. 고리타분하기도 하고, 무형의 무언가로 옭아 매이는 듯한 기분도 떨치기 어려워 ‘그래서 지금의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를 되뇌게 한다. 그러나 불과 100여년 전만 해도 사회의 근간과 뿌리가 되던 것이 ‘가계계승’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립민속박물관의 상설3전시실은 ‘한국인의 일생’을 주제로 운영된다. 탄생과 죽음까지의 일생과 사후 제사에 이르기까지 전통사회에서 사람이 겪게 되는 일생의 중요 순간들을 주제로 전시가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 핵심은 ‘가족’이다.

 

“전시실은 입구부터 마을에 들어서는 느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풍산 류씨 세계를 한 눈에 살펴보고 나면, 류성룡의 형인 류운룡柳雲龍1539∼1601의 집이자 풍산 류씨 종가인 <양진당養眞堂>을 먼저 만나고, 이어 서애 류성룡西涯 柳成龍1542~1607의 집인 <충효당忠孝堂>을 둘러본 뒤, 류성룡의 8대손 류이좌柳台佐1763~1837의 <화경당和敬堂>까지 두루 살필 수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 풍산 류씨의 가학家學이 전승되는 과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전시를 담당했던 최순권 학예연구관으로부터 풍산 류씨 집안의 가족이야기 전시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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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풍산 류씨 가족 이야기' 전시의 기획을 맡은 최순권 학예연구관

 

“충효忠孝 이외에 힘쓸 일은 없다”

 

이번 전시의 제목이라 할 수 있는 “충효 이외에 힘쓸 일은 없다”는 말은 서애 류성룡이 후손들에게 남긴 유언으로 풍산 류씨 가문의 가훈과도 같은 말이다. 최순권 학예연구관은 이 주제를 이렇게 설명했다.

 

“사실 충효란, 단순히 임금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자는 의미보다 더 넓은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한 집안을 관통하여 지금까지 그 문중을 지탱하는 하나의 주제이기 때문이죠. 100명 이상이 참여하는 제사 등이 많은 풍산 류씨 집안의 문중행사가 지금까지 지속될 수 있는 힘이 바로 ‘충효’입니다. ‘충효’라는 가훈을 어떻게 계승하여 오늘에 닿았는지 그 의미를 되짚어 보는 자리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최학예연구관은 전시된 유물 가운에 특히 ‘충효당 현판’을 가장 애착이 가는 유물로 꼽았다. 현판에 적힌 글자는 ‘충효당’이라는 글자를 담고 있는지 한눈에 알아채기 어려운 필체였다. 이 현판은 남인의 핵심 인물인 미수 허목眉叟 許穆1595~1682 선생의 서체로 쓰여졌다. 이는 류성룡이 남인의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이 서체가 하나의 부적처럼 가문을 지켜주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담겨있다고 한다.

 

<분재기分財記>도 시선을 끌었다. 선조 27년인 1594년, 류중영柳仲郢1515~1573, 류성룡의 아버지의 아내 김씨부인징비록을 쓴 류성룡의 어머니이 5남매인 자녀에게 재산을 나누는 내용을 기록한 문서다. 정확한 명칭은 <류중영처김씨분급문기>로 충효당에서 소장해오고 있다.

 

“조선 시대라 하면, 유산은 모두 아들의 몫이고, 출가외인인 딸의 몫은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조선 전기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문서만 보아도 아들딸 구별 없이 5남매에게 재산을 균등히 분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지요. 또 이 분재기를 통해 우리나라가 매우 정교한 기록 문화를 갖고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초안 작성부터 최종 합의에 이르는 과정을 매우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시대의 공정과 합리의 정신이 무엇이었는지 잘 드러나 있지요.”

 

류성룡의 편지도 남겨져 있는데, 위대한 인물의 인간적인 됨됨이가 전해져 오는 듯 했다. 천하를 호령하던 류성룡이 아들에게 공부를 열심히 할 것과 건강에 유의할 것 등을 당부하는 흔한 아버지의 마음이 <선조필첩先祖筆帖>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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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에서 잘 돌아왔느냐. 고개를 돌려보니 의연할 뿐이다.
내 행차는 운암에서 하루를 묵고, 오늘 제천에서 자고, 내일 원주로 향하려고 한다.
우연히 나주목사의 행차를 만나 이 안부의 글을 급하게 쓴다.
너희들은 모든 일에 근신해라. 피란 등의 일은 한결같이 형이 이끄는 대로 따르도록 해라.
만약 일이 변해서 조금 늦추어지면 모름지기 부지런히 글을 읽는 것을 업으로 삼는 것이 좋겠다.
이만 줄인다. 2월 초 5일에 아버지가.

 

“한 가족의 유물을 연구하다 보면 정작 가족들도 모르고 있던 가치와 의미를 알게 됩니다. 그런 이야기를 문중분들께 전해 드리고 있자면 마치 비밀보자기를 풀어 놓은 듯 종가가 갖는 시간의 힘을 새삼스레 느끼곤 합니다. 일종의 고문서 감정단 같은 역할을 하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유물에 대해 더 깊은 애착이 생기고, 보존의 중요성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하게 됩니다.”

 

한 가족의 내력이 사회생활의 기반으로 작용했던 조선시대에는, 학자 집안, 장사 집안, 정치가 집안, 예술가 집안 등 ‘가풍’이라는 무형의 문화로 전승됨과 동시에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든든한 배경이 되기도 했다.

 

“<류이좌문과홍패柳台佐文科紅牌>를 살펴보면 정조正祖가 문과급제한 류이좌에게 류성룡의 핏줄이라는 이유로 태조台祚인 그의 처음 이름을 ‘너는 나를 도우라’는 뜻의 이좌台佐로 고쳐주며 ‘류성룡의 자손인 너는 나를 옆에서 보필토록 하라’고 명을 내렸다고 전해집니다.”

 

물론 지금도 이러한 가족의 역사를 두고 중요 인물을 평가하기도 한다. 심지어 최씨는 고집이 세고, 정씨는 우유부단하며 조씨는 성격이 급하다는 등의 평가가 평범하게 이루어지기도 하니 말이다. 이렇듯 우리나라는 성씨로 대변되는 뚜렷한 성향을 가진 가족들의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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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민속박물관 상설전시실 3관 가족 전시코너에서 진행 중인 '풍산 류씨 가족 이야기' 전시 현장

 

이 순간에도 이어지는 가족의 역사

 

사담이지만, 최순권 학예연구관은 제례분야의 전공자로서, 명절이면 다른 가문의 제례를 연구하러 다니느라 집의 제사를 챙기지 못했노라 고백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없으면 제사를 지내지 못할 만큼 중추적인 역할까지 맡아가며 집안 일에 열심이라 했다. 그 계기는 어머니의 영면이었다.

 

“전국 각지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는 7남매가 한 자리에 모여 큰일을 치르면서 형제가 많음의 고마움과 가족의 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모든 일을 함께 해 나가는 모습에 자랑스러움도 느꼈고요. 가족이란 내가 지탱할 수 있는 기반입니다. 모이면 어느새 목청 높이며 티격태격 하더라도 계속 부대끼고 마주치며 서로 알아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족이니까요.”

 

가족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운명처럼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오늘을 살고 있는 어르신들에게는 당신의 가문을 떠올리며 자랑스레 목소리를 높여볼 기회가, 젊은이들에게는 자신이 속한 가족의 역사와 흐름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이번 <풍산 류씨 집안의 가족이야기>. 이번 전시는 2016년 5월 12일까지 국립민속박물관 상설 3전시관 가족코너에서 진행된다.

 

전시실에 세워진 또 하나의 하회마을

 

“민속이라는 게 별거 아닙니다. 가족마다의 관습이 쌓여 민속, 혹은 기억으로 남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가족의 역사와 유물을 찬찬히 살펴보면 우리 삶의 뿌리와 근거를 알게 됩니다. 이런 개개인 가족의 역사는 결국 국가의 역사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민속박물관 가족전시실에는 매년 가계계승의 의미를 잘 보여줄 수 있는 종가를 택해 그 가족력을 소개하고, 유물을 전시해오고 있다. 올해는 서애 류성룡을 배출한 ‘풍산 류씨’ 문중의 유물로 전시를 새롭게 꾸몄다. 류성룡은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을 수행하며 왜군을 물리치는 데 큰 역할을 한 인물로, 관찰사를 지낸 류중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풍산 류씨 중 가장 훌륭한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민속박물관의 가족전시실은 한국국학진흥원의 콘텐츠유물와 국립민속박물관의 기획력 있는 전시의 콜라보레이션이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웬만한 종가의 유물은 거의 다 소장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한국국학진흥원의 유물과 연간 320만에 달하는 관람객을 가진 국립민속박물관의 전시 협업은 문화기관간의 더 없는 협업의 사례를 보여준다. 더 많은 관람객들에게 더 좋은 유물을 보여주는 아름다움 만남은 앞으로도 관람객들에게 볼만한 전시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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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 류씨 문중이 뿌리를 두고 있는 안동 하회마을의 정경
글_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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