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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대동여酒도

한국 술 전성시대다. 막걸리나 약주, 소주 같은 전통주만이 아니다. 우리 땅에서 난 농산물로 만든 와인이나 브랜디(과실 증류주), 시드르(사과 발포주), 수제 맥주까지 요즘 전국에서 다양한 술이 우후죽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외국 술과 비교해도 맛이 뒤지지 않고 술병이나 라벨 디자인도 근사한 것들이 여럿이다. 젊은층을 중심으로 한국 술 마니아도 눈에 띄게 늘고 있다.

한국 술 르네상스의 배경은 복합적이다. 농산물의 부가가치를 높이려는 농가의 고민, 지역의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체험하기를 원하는 여행 트렌드, 싸게 빨리 취하는 대신 건강한 재료로 만든 좋은 술을 적당히 즐기려는 최근의 음주문화가 맞아떨어졌다. ‘소맥’으로 대표되는 획일화된 주류시장에 다양한 선택지가 생겨나면서 소비자들은 즐거운 고민에 빠지게 됐다. 맛있고 개성 있는 술을 만드는 양조장들은 저마다 시음과 체험 프로그램도 다양하게 마련하고 있어 주말 여행지로도 손색이 없다.

경기와 강원도에서 탄생한 토종 와인

경기도 안산 대부도에는 국산 포도로 와인을 만드는 ‘그랑꼬또’ 와이너리가 있다. 농촌진흥청이 개발한 청포도 품종 ‘청수’로 만든 화이트와인은 설명 없이 맛보면 국산 와인이라고 눈치채기 힘들 정도로 완성도가 뛰어나다. 연간 생산량은 3천~4천 병 정도다. 때문에 와이너리를 직접 방문해야 구입할 수 있는데, 병당 6만 원의 비교적 높은 가격에도 구하기 힘들 정도로 인기다. 그랑꼬또에서는 한국에서 가장 많이 재배하는 식용 포도 품종인 ‘캠벨얼리’로 레드와인도 만든다. 카베르네쇼비뇽 같은 외국의 양조용 포도에 비해 복합적인 향기 등은 부족하지만 맛이 부드럽고 청량감이 있어 와인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도 접근하기 쉽고 양념이 강한 한식과 두루 잘 어울린다.

강원도 홍천에는 ‘넓은 내’를 뜻하는 지명을 그대로 살린 ‘너브내’ 와인이 있다. 너브내를 만드는 와이너리 ‘샤또 나드리’는 국산 포도를 활용한 와인 양조 실험의 최전선이라 할만한 곳이다. 강원도농업기술원은 산머루 같은 재래 포도에 외국 품종을 교배한 신품종을 10여종 이상 꾸준히 보급하며 이 실험을 돕고 있다. 강원도 기후에 맞게 내한성耐寒性이 강화된 포도들은 ‘강원도 테루아’를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너브내의 대표 주자인 화이트와인은 청포도 ‘청향’에 적포도 ‘레드드림’과 ‘강원2호’를 섞어 만든다. 청향의 강렬한 향과 산미, 적포도의 깊은 맛 등 원재료의 장점을 살린 균형감이 돋보인다. 샤또 나드리는 이탈리아에서 도입한 장비로 최근 스파클링와인 2종도 새로 출시했다. 화이트와인과 로제스위트와인을 각각 추가 발효해 완성한 술은 서울의 특급호텔 바bar에 납품하며 품질을 인정받았다.

충북, 경북, 제주 특산물로 빚은 다채로운 술

충북 충주에 가면 유기농 사과로 만든 정통 프랑스식 시드르를 맛볼 수 있다. 프랑스 출신 농부 도미니크 에어케와 신이현 작가 부부가 운영하는 ‘작은 알자스’ 얘기다. 프랑스에서 결혼해 한국에 정착한 두 사람은 친환경 농법으로 직접 농사를 짓고, 그 과일로 술을 담근다. 남편의 애칭을 딴 ‘레돔 시드르’는 사과로만 만드는 술이다. 양조용 효모를 넣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과 껍질에 붙은 야생 효모로만 술을 발효시키기 때문에 일정한 맛을 유지하기가 까다롭고, 적당한 탄산을 머금은 시드르로 만들어내기까지 다섯 달 이상 걸린다. 그렇게 탄생한 시드르는 기분 좋은 천연 탄산, 풍부한 과일향, 복합적인 풍미 등 좋은 술이 갖춰야 할 조건을 두루 갖췄다. 여름에 시원하게 마시면 하루의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지는 맛이다.

경북 문경에는 오미자로 만드는 스파클링와인 ‘오미로제’가 있다. 연분홍 빛깔에 상큼한 허브향이 풍기는 술은 오미자만의 달고 시고 짜고 알싸한 맛이 골고루 녹아있다. 오미자는 시고 짠 성분이 천연방부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술 만들기가 까다로운 재료다. 보통 한 달이면 발효를 끝내는 보통 와인과 달리 오미로제는 발효와 숙성에 무려 3년이 걸린다. 오미로제를 만들어낸 ‘오미나라’ 이종기 대표는 패스포트, 윈저 등 토종 위스키를 개발한 국내 최초 위스키 마스터 블렌더다. 국산 재료로 한국을 대표하는 고급술을 만들겠다는 그가 탄생시킨 또 다른 역작이 오미자 와인을 증류한 브랜디 ‘고운달’이다. 백자 항아리에 3년 숙성한 고운달은 52도라는 알코올 도수가 믿기지 않을 만큼 부드럽게 목을 타고 넘어간다.

제주도에서는 또 한 명의 주류업계 대부가 우리 농산물로 명품술 만들기에 도전하고 있다. 주인공은 농업회사법인 ‘시트러스’의 이용익 공장장이다. 이 공장장은 진로에서 VIP, 임페리얼 등 국산 위스키 제작을 이끌었다. 고급 증류식 소주 ‘일품진로’도 그가 남긴 작품이다. 요즘 그는 제주 감귤로 브랜디 ‘신례명주’를 만든다. 옅은 노란색에 구수한 오크향, 입안을 치밀하게 채우는 감각까지 숙성 잘 된 위스키를 떠올리게 만드는 맛이다. 시트러스는 신례명주 말고도 감귤 발효주 ‘혼디주’, 한라봉으로 만든 화이트와인 ‘마셔블랑’, 한라봉 증류주 ‘귀감’ 등 다양한 술을 만들고 있다. 혼디주는 얼음을 띄우거나 차게 마시면 감귤의 상큼한 풍미가 배가돼 술을 잘 못하는 사람도 가볍게 한잔 하기 좋다.

서울, 상생을 위한 수제맥주

최근 우후죽순 늘고 있는 수제 맥주 업체 중에도 국산 농산물을 활용하는 곳들이 여럿 있다. 서울 마포구의 ‘미스터리 브루잉’은 지난해 농촌진흥청이 개발한 천도복숭아 ‘하홍’과 포도 ‘홍아람’ 등 신품종 과일로 사워 에일Sour Ale 맥주를 만들어 화제가 됐다. 원재료의 특징을 살려 신맛을 강조한 술은 전문가들의 호평을 받았다. 낙과落果나 크기가 작아 상품성이 떨어지는 못난이 과일을 술 빚는 데 활용해 농가와 상생한다는 취지도 살렸다. 미스터리 브루잉은 올해도 자두와 살구를 반씩 섞어 육종한 신품종 ‘플럼코트’와 황도 ‘수향’ 등 새로운 재료로 맥주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강원도에서 키운 다래로는 밀맥주 ‘헤페 바이젠’을 만들었다. 화덕에서 구운 피자 등 다양한 이탈리안 음식을 맥주와 함께 파는 미스터리 브루잉엔 낮부터 ‘피맥’을 즐기려는 인근 직장인들이 붐빈다.

글과 사진_김형규 | 경향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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