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니>는 혈기왕성한 젊은 시절의 꿈으로부터 멀어진 중년 여인들이 학창 시절의 추억을 되새기며 의기투합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영화의 주인공인 임나미(유호정)는 한 가정의 어머니이자 아내이자 주부로서 쳇바퀴 같은 일상을 살아간다. 매일 아침 누구보다도 일찍 일어나 가족을 위해 아침식사를 준비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그녀는 남편과 딸의 일상을 챙기며 분주하게 보낸다. 자신보다도 가족을 챙기는데 여념이 없지만 하루하루를 묵묵하고 씩씩하게 밀어낸다. 그런 어느 날, 고등학교 시절에 친하게 지내던 친구를 우연히 병원에서 마주치게 되고 그녀가 시한부 인생임을 알게 된 뒤 한가지 소원을 듣게 된다. 그녀의 소원이란 이렇다. 친구들을 찾는 것. 죽기 전에 ‘써니’라는 이름 아래 함께 어울렸던 단짝친구들을 다시 만나는 것 말이다.
<써니>는 임나미란 여자가 고등학생 시절의 절친들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를 줄기 삼아 2010년 현재와 1985년의 과거를 오가는 영화다. 그러니까 정확히 25년 전의 친구들을 찾아 나서며 그 시절을 돌아보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써니>는 1980년대를 스크린에 소환하는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단순히 추억팔이를 위해 1980년대를 남용하는 영화는 아닌 것 같다. 실제로 <써니>를 연출한 강형철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이와 같이 말했다. “단지 그 시대를 보여주기 위해 사용하는 장치는 모두 배제하려 한다. 플롯에 꼭 필요한 요소, 인물 동선에 꼭 필요한 시대적 장소를 적절하게 배치하는 것이 목표다.” 결국 <써니>에서의 1980년대의 풍경이란 임나미라는 여자와 그녀의 친구들, 그러니까 ‘써니’라는 이름으로 함께 했던 어느 시절의 낭만을 소환하는 마법 같은 무대인 셈이다.
임나미는 우여곡절 끝에 고등학교 시절의 친구들을 하나씩 만나게 된다. 저마다 활기차고 개성 있던 친구들은 여전히 서로를 반갑게 맞이하지만 저마다 각기 다른 인생의 무게를 버티며 살아간다. 실적이 좋지 않아 매일 같이 상사의 타박을 받는 보험설계사로 살아가는 친구, 집안 형편이 급격하게 어려워진 탓에 부모가 급하게 융통한 사채빚을 대신 갚기 위해 술집을 전전한 친구, 쌀쌀맞은 시어머니의 냉대 속에서 팍팍하고 숨막히는 삶을 살아가는 친구 등, 25년 전 어른이 된 자신의 모습을 꿈꾸던 총총한 눈빛에는 불이 꺼진 지 오래다. 지난 날의 총기 대신 오늘날의 수심이 가득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은 함께 있으면 무서울 것이 없었던 그 시절을 이야기하며 불씨를 살린다. 잊었던 웃음을 되찾고, 잠시나마 낭만을 되새긴다. 오래된 친구를 만나 오래된 추억을 이야기하니 오래된 시절의 활기가 되살아난다. 지나간 추억으로 오늘의 팍팍함을 기름칠한다.
어쩌면 1980년대는 실제로 낭만적인 시절이었을지도 모른다. 반민주주의에 맞서는 대학생들의 데모를 진압하기 위해 발사된 최루탄 냄새가 종종 매캐하긴 했지만 그 시절에는 시대에 저항하는 자유분방한 혈기가 넘실거렸다. 정치적으로는 오늘날보다 자유롭지 않았던 시절이었던 것 같지만 정서적으로 보다 자유분방했던 시절이었다. 다양한 문화가 태동하고, 유행은 일맥상통하게만 흐르지 않았다. 알록달록한 색감의 옷을 과감하게 매칭한 옷차림은 지금에 비하면 촌스럽지만 한편으론 역시나 자유분방했다. 유행이 돌고 돈다는 말처럼 그 시절의 유행은 다시 오늘로 돌아왔다. 그러니까 레트로 흔히 복고라 말하는 패션 스타일을 영화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오버사이즈의 니트나 티셔츠, 데님 재킷과 오버롤한 청바지 등 비슷하지만 각기 다른 개성을 뽐내는 아이들로 그득한 교실에선 규정할 수 없는 다양성으로부터 꿈틀거리는 시대적 낭만이 느껴진다. 지난 날의 유행이 복고라는 이름으로 돌아오는 것도 어쩌면 그런 낭만에 대한 향수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강형철 감독은 어머니의 사진에서 <써니>의 모티브를 얻었다고 했다. 오랜만에 재회하는 <써니>의 친구들은 마치 어제 만난 것처럼 살갑게 서로를 대하고, 심지어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짓궂고 얄궂게 장난을 치며 천진난만하게 웃는다. 어머니도 소녀였던 시절이 있다. 아버지도 소년이었던 시절이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소녀도, 소년도,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된다. 어른이 된다. 어머니는 태어날 때부터 어머니였던 게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잊는다. 그저 어머니가 나를 키우기 위해 존재했던 것처럼 생각하고, 어머니의 헌신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인다. <써니>는 우리가 쉽게 간과하는, 가장 가까운 가족에 대한 배려를 깨닫게 만든다. 동시에 지나간 시절의 추억을 뒤로 미룬 채 오늘의 팍팍함에 몸을 끼워 넣으며 살아가는 이들에겐 삶을 뒤돌아보는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오래된 친구가 반가운 건 그래서일 것이다. 그 시절에 함께 나누던 고민도, 걱정도 이젠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시절까지 함께 자라났다는 유대감. 그렇게 우리가 어린 시절에 공유했던 추억을 풀고 웃을 수 있는 어른이 됐다는 안도감. 그렇게 추억도, 삶도 한 뼘씩 자란다는 기분. 그렇게 함께 다져온 시절을 통해 장차 나아갈 삶에 힘을 실어주는 존재. 오래된 친구란 그렇다. 인생의 거름 같은 인연인 것이다. <써니>는 바로 그 시절을, 그 시절의 친구를, 추억을, 나를 돌아보게 만든다. 선물과도 같은 여운이 남는다.
영화 칼럼니스트이자 <에스콰이어> 매거진 디지털 디렉터. 올레TV <무비스타소셜클럽>의 배우 인터뷰 코너에 출연 중이며 KBS와 EBS 라디오에서 영화 소개 코너에 출연 중이다. 영화를 비롯해 대중문화와 세상만사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