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부터 우리는 동물에게 밥을 먹이며 함께 살아왔다. 그것이 늑대에서 시작했는지, 삵에서 시작했는지 알 수 없지만 헤아리기 힘든 먼 옛날부터 함께 살게 된 것은 분명하다. 곁의 동물은 의미와 가치도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 왜 우리는 반려동물과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걸까. 박정윤 수의사를 만나 반려동물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생각해보면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함께 사는 동물을 ‘애완동물’이라고 불렀다. ‘반려동물’이 일상화 된 요즘에는 좀처럼 접하기 힘든 단어가 되었지만.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애완’을 ‘동물이나 물품 따위를 좋아하여 가까이 두고 귀여워하거나 즐김’이라는 뜻으로, ‘반려’는 ‘짝이 되는 동무’라는 뜻으로 적고 있다.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동물을 향한 개념이 바뀌었음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단어들이다.
“제가 대학에서 수의학을 공부하던 때만 해도 애완동물이라는 개념이 더 강했어요. 2000년 대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이 아이가 내 가족이구나’하는 마음으로 함께 살게 되었고, 그때부터 ‘반려동물’이라는 개념이 일상화 되었죠. 아직 전환기이긴 하지만, 적어도 의식의 변화는 이미 시작된 겁니다”
수의사가 느끼는 변화는 한층 더 강하다. 반려동물을 위한 보호자들의 요구가 까다로워졌다. 반려동물의 상태가 좋지 않음이 육안으로 확인 되어야만 비로소 병원으로 달려오던 보호자들이 이제는 정기적으로 병원을 찾아 건강 검진을 하고, 동물의 입에 맞는 먹거리를 찾는다. 병원이라는 곳을 그저 아플 때 주사나 놓아주는 곳이라고 여기는 이들은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처음 학교에 입학했을 때에는 제 친구들도 ‘나도 강아지 좋아해! 요즘 말티즈는 얼마야?’라고 묻는 수준이었어요. 이제 수의사에게 그런 것을 묻는 사람은 없죠. 동물병원의 간판도 달라졌어요. 한때 ‘월드펫’, ‘위드펫’, ‘펫케어’ 등 Pet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이제는 ‘우리 아이’, ‘내 아이’라고 다정하게 칭하거나 ‘의료센터’, ‘메디컬센터’처럼 전문적인 간판을 걸기도 하죠. 심지어 이제는 병원에서 ‘암컷’ ‘수컷’ ‘암놈’ ‘숫놈’이라는 말도 듣기 어려워요. 그렇게 인식이 많이 바뀌었어요.”
사실 박정윤 수의사는 방송에서 반려동물을 ‘아이’라고, 주인을 ‘보호자’라고 불러 문제가 되기도 했다. 지금껏 그렇게 칭했던 사람도 없었을 뿐더러 시청자들이 헷갈리고 불편해하니 그렇게 부르지 말아달라는 요청까지 받았다. 하지만 그 말이 아니고는 애완동물이 아닌 반려동물을 통칭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반려동물은 이미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가족의 구성원이 되었으므로.
사람들은 왜 동물을 키울까. 혼자 살아가기도 녹록지 않은 세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아지나 고양이, 하물며 눈을 마주하기 힘든 금붕어라도 곁에 두며 살아간다.
“저는 사람은 결코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혼자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많죠. 두 사람이 만나 결혼을 했다 해도 어쩌면 각자의 시간을 살아가는 현실에서 온전히 나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존재인 반려동물을 통해 그 외로움을 채우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강아지처럼 이름을 부르면 꼬리를 흔들고, 고양이처럼 애정을 담아 꾹꾹이를 해주지 않는다 해도 마음을 나눌 수 있다면 어느 동물이나 반려동물이 될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닭의 건강검진을 받기 위해 병원을 찾아온 보호자를 보며 박정윤 수의사 역시 그 의미를 새삼 깨닫기도 했다.
“제 지인 중에 금붕어를 키우는 친구가 있는데 저는 그 친구가 그 금붕어를 통해 달라져가는 모습을 직접 경험했어요. 그 친구는 금붕어가 분명 자신을 알아보고 반가워한다고 믿었어요. 퇴근하고 돌아오면 펄쩍펄쩍 뛰어오른다고요. ‘나’라는 존재를 알아보고 반응한다는 거죠. 그리고 그 금붕어가 어항 밖으로 튀어나와 죽었을 때도 무척 슬퍼했어요. 얼마나 슬펐겠어요. 누군가에게 가족이 된다는 건, 결국 그런 것 같아요. 꼭 강아지나 고양이, 햄스터, 토끼만 반려동물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나눌 수 있다면 비로소 반려동물이 되는 거죠.”
물론 걱정되는 부분도 있다. 그렇다고 반려동물의 범위를 한도 끝도 없이 확장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최근 라쿤, 사막여우 등 야생에서 살아야 하는 동물들까지 곁에 두고 ‘키우는’ 경우가 늘고 있다. 박정윤 수의사는 이 현상을 나를 돋보이기 위한 일종의 과시욕에 지나지 않는다고 경고했다.
“저는 동물을 키운다는 말을 쓰지 않아요. 같이 살아가는 거예요. 간혹 병원에 오는 분들 중에 정말 이해할 수 없고, 화가 나는 보호자들도 있어요. 왜 이렇게까지 방치했을까, 왜 이렇게 키우는 걸까. 하지만 그 보호자를 이해하지 못하면 저는 치료를 할 수 없어요. 그 사람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환경이나 상황을 이해해야죠. 그건 동물을 대하는 보호자들의 마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동물을 이해해야 해요. 무언가 해주길 바라기 전에 동물의 마음과 행동을 이해해야 합니다.”
마음을 나눈다는 것, 그것은 결국 서로를 이해하고 입장을 헤아리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져야 하는 그것과 꼭 닮아있다.
“동물과 사람은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요. 나 혼자 착각한다면 정말 끝도 없이 착각할 수도 있죠. 하지만 적어도 그런 노력을 한다면 교감은 배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행동을 앞두고, 이것이 과연 나를 위한 것인지 동물을 위한 것인지 판단하는 것이 중요해요.”
서로를 향한 이해와 배려의 세계
반려동물을 주제로 박물관에서 전시를 한다면 어떤 기획을 할 수 있을까.
“동물은 사람과 눈높이가 달라요. 그들의 눈높이에서 보이는 세상을 찍어 보여줄 수 있으면 어떨까요. 마당에서 사람이 남긴 잔반만 먹으며 살았던 누렁이의 코앞에는 더러운 밥그릇이 보일 테고, 집에만 있는 고양이의 눈에는 높은 장롱 위에서 내려다보는 방의 정경이 보이겠죠. 그런 사진이나 영상이라면 동물의 입장을 헤아리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그는 또 동물들의 연령에 따라 변해가는 모습을 나열해보는 것도 좋겠다고 제안했다. 강아지의 10살이 사람의 60살이라는 것을 다들 알고는 있지만, 60살로 향해가는 동안 사람에게 벌어지는 외모의 변화가 강아지에게는 좀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다 어느 순간 급격히 털이 쇠고, 눈이 혼탁해지고, 행동이 느려진다. 늙는다. 그들도 느릴 뿐 늙는다. 그 과정을 함께 보며 동물의 노화를 이해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고.
“강아지도 웃어요. 그 표정을 지어요. 사람과 동물은 다르지 않아요. 그래서 동물들 앞에서는 행동을 조심해야 해요. 원래 어깨동무나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동물들은 기꺼이 우리에게 제 어깨와 머리를 내어줍니다. 사람의 이런 행동이 다정함의 표현이라는 걸 동물들이 이해해 주는 거예요. 우리도 그들의 소통방식을 이해해 줘야겠죠. 환하게 웃는 동물들의 사진을 함께 보면서 서로 맞닿은 마음과 배려해야 하는 문화를 헤아리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마당에서 잠든 강아지의 아득한 표정을 그린 오래된 민화의 섬세함에서 그 마음을 읽는다. 그때의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동물을 얼마나 애정 어린 시선으로 보았는지 오늘의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기록이다. 더 먼 미래에, 그들은 오늘의 우리의 모습을 어떻게 짐작할까. 우리가 어떤 기록을 남겨두느냐에 달려있다.
SBS TV 동물농장에서 위험에 처한 동물들을 보면 눈물부터 훔치는 그. 다른 공부를 하다가 동물 학대 장면을 보고 수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지금은 노령동물을 전문적으로 살피는 올리브동물병원에서 동물들과 함께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