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전경수(서울대학교 인류학과 명예교수)
44년의 생애로 요절한 고故 송석하1904–1948 선생의 족적은 1923년 동경상과대학 중퇴, 1932년 조선민속학회 설립과 1933년 『조선민속』 창간호 발행, 1945년 해방과 함께 진단학회 위원장, 조선산악회 회장, 그리고 국립민족박물관 개관의 산파 역할을 하며 관장을 지낸 이력으로 요약할 수 있다.
태생지가 울주군 언양의 석남사 인근이었기에 ‘석남石南’을 호로 삼았다. 일정기부터 해방기까지,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그는 민속학의 자율성과 학문적 기반을 확립하고자 온 힘을 기울였다.
식민지 지배 아래에서도 주체적인 조선문화 연구를 꾸준히 실천하며, 자료 수집과 학술 활동, 민속학의 대중적 계몽, 학문 네트워크 형성까지. 그의 삶은 한국 민속학의 뿌리를 다지는 여정 그 자체였다. 특히 ‘문화주권’이라는 개념을 통해, 지식인의 역할과 문화적 자율성에 대한 고민을 시대 너머로 던진 인물이다.

1947년 국립민족박물관 정문 앞 송석하 초대 관장(좌), 유홍렬 부관장(우)
일제강점기 민속학의 기초를 세우다
3·1운동 이후 총독부의 문화통치 정책으로 조성된 조선문화 연구의 주체적 쌍벽이었던 역사와 어문에 이어서 ‘제삼의 조선학’으로서 채택되었던 민속이라는 존재의 개념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된다. 통치자에 의한 타자화된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조선문화 연구의 장르로서 민속학이 출범하였다는 사실은 시대를 구분하는 혁신적 사상의 실천으로 검토되기를 기다린다. 그 주인공이 송석하다. 그는 개인 차원의 자료 수집과 연구를 넘어서서 연구공동체의 조성을 위한 작업에 어느 누구보다도 앞장섰다. 그것이 조선민속학회로 나타났고, 해방 후 국립민족박물관장의 역할이었다. 연구에 필요한 가용 자원을 활용하는 실천을 솔선수범했던 것이다. 일정기에는 일본인 연구자들과 협력하면서 자신의 재원을 투입하였고, 미군정기에는 군정 정부로부터 최대한 연구지원의 협력을 이끌어 냈다. 조선문화의 연구자들이 연구활동에 임할 수 있는 연구공간을 마련함에 있어서 물심양면의 노력을 기울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민속학을 통한 계몽 운동의 중심에 서다
일정기 식민지 상황의 경성에서 발행되었던 일간신문과 정기 간행물의 잡지에 민속학 관계의 글들을 가장 많이 게재한 사람이 송석하라는 사실은 민속학적인 계몽 운동을 통한 조선문화의 재발견과 연구가 사상사적으로 고난의 시점에서 시작하였음에 대한 이해를 촉구한다. 은밀한 지하운동의 방식이 아니라 당당하게 드러낸 모습으로 실천하는 조선민속학의 진행과정이 필연적으로 감수해야 하는 제국중심부와 식민지주변부의 비대칭적 우열 상황에 적응해야 하는 숙명적 과제가 전제된다. 이 부분을 효율적으로 타개하기 위하여 송석하는 경성의 일본인 연구자들과 교류와 협력을 시도했다. 아울러서 그는 동경과 오사카에서 발행되는 민속학 전문 잡지에 적극적으로 투고하는 학술행동을 어느 누구보다도 많이 실천했다. 그가 발굴했던 봉산탈춤을 비롯한 가면극에 관한 자료들은 조선문화의 심층성을 타진하기에 충분했다. 그동안 이 분야에서 많은 연구들이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연구들은 민속주의적 운동의 입장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고 싶다. 그러한 입장의 씨앗이 식민지 시대의 저항정신으로부터 비롯되었음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하고, 송석하의 차원을 넘어서는 인류학적 비교연구가 도전적인 손짓을 하고 있다.

《『민속사진특별전 도록(석남 민속 유고)』, 국립민속박물관, 1975》에 수록된 송석하 사진
자율적인 민속학 정립을 외치다
조선산악회 회장으로서 실천하였던 국토 구명사업으로서의 한라산, 제주도, 울릉도, 독도, 오대산 등에 대한 대규모 학술연구조사 사업은 미군정의 협력을 도모했다. 사상 감시와 출판물 검열이라는 일제 식민 지배하에서 실천되었음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해방과 함께 미군 점령기라는 특수한 정치적 상황 하에서 이루어진 사업들이 중첩되어 있음에 대한 사상사적인 확인이 중요하다. 경성제국대학으로부터 국립서울대학교로 전환하는 이행기에 그림자처럼 존재한 경성대학에서 활동했던 송석하의 업적은 박물관의 관리 책임과 ‘인류학 개론’ 강의였다. 정치체제의 핵심인 권력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송석하 업적의 대척점에는 총독정치와 미군정의 지배라는 타율성이 자리하고 있다. 일제의 패전으로 주어진 해방의 권력진공 상태에서 조선인들의 자율적 선택으로 송석하에게 주어진 직함이 진단학회위원장이었다. 진단학회를 구성한 기라성 같은 지식인들의 모임이 가장 심각하게 고려했을 문제가 일정기와의 절체절명적 단절에 의한 정통성 확보였을 것이며, 그 상징으로서 선택된 인물이 송석하였다는 점에 대해서 깊은 생각을 해야 한다.
최근 전북대학교에서 공간公刊한 이병기 선생의 <가람일기>가 해방기의 학계 상황과 송석하의 활동에 관한 자료로써 최소한의 역할을 하고 있음은 비록 만시지탄晚時之歎일지라도 안도감을 준다. 미군정이 설립한 국립민족박물관의 영어 명칭은 National Museum of Anthropology였으며, 관장이라는 직함은 미군정에 의한 임명이었고, 그것도 사실상 진단학회위원장이라는 직함과 민속학적 업적의 소구점이 송석하로 낙착落着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미군정하 이행기의 대학에서 송석하는 뜻하지 않게 교수 발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송석하 비원悲願의 서울대 교수’라는 말이 성립한다.

무인년(1938년) 3월 5일 경성의 태서관에 모인 조선민속학회 회원들.
저서 출판을 기념하여 민속학 담화회를 열었다.
(왼쪽부터 송석하, 무라야마 지준, 아카마쓰 지조, 이마무라 토모에, 아키바 다카시, 손진태, 김두헌)

사진. 전경수 명예교수
1946년 2월, 제주도 현장 답사 여행 도중 목포에서 국립민족박물관의 직원들. 트럭 아래 가운데 미군 유진 크네즈Eugene I. Knez,
트럭 위 맨 왼쪽 언어학자 김수경, 바로 옆 검정색 모자를 쓴 조선산악회 총무 김정태, 가운데 흰색점퍼를 입고 안경쓴 답사대장 송석하
문화주권 개념을 창안하다
주권 상실의 타율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전개되었던 송석하의 생애와 학문이 총결산으로 만들어낸 단어가 문화주권文化主權, cultural sovereignty이었음에 대한 재평가가 후학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 세상에서 문화주권이란 용어를 최초로 만들어낸 장본인이 송석하이며, 그 핵심에는 자율성에 대한 철학적인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타율에 의해서 사정없이 무너지는 자율의 삶이 평생을 통하여 스스로 뼈저리게 체험되었던 송석하였기에, 생의 마지막 순간에 다가왔던 단어가 문화주권이었던 것이다. 문화는 학문하는 과정에서 인류학으로부터 습득된 개념이었을 것이고, 주권은 정치적 권력에 대한 스스로의 체험이 터득한 것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정확한 개념 정의가 없이 제안된 새로운 용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기를 염원하는 주술적 의미를 담고 있다. 일상화된 타율이라는 현상에 얼마나 한이 맺히고 질렸으면, 자율을 향한 새로운 용어 창작이었을까?
국립민족박물관의 학문적 계통의 승계를 위해서는 더욱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구남산분관과 관련된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이관받는 행정적인 과정이 필요하다. 부분적으로 이관하는 것은 연구자들로 하여금 전체의 모습에 접근하는 시도를 방해함에 다름 아니다. 해방 80년을 맞은 시점에서 과거를 성실하게 진단하는 작업은 이해관계를 떠나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명의식에서 비롯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