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3월 하순 프로야구 시즌이 개막하면 많은 야구팬이 야구와 함께 하루하루를 보낸다. 나도 야구를 좋아하는 편이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요즘도 짬짬이 그날그날의 프로야구 경기 결과를 확인하고 하이라이트 영상도 찾아보곤 한다. 나는 충남 출신이어서 자의 반 타의 반 한화 이글스를 응원한다. 1985년 한화 이글스(당시는 빙그레 이글스)가 창단하기 전엔 대전 연고의 OB베어스(현재 두산베어스)를 응원했었다. 최근 수년 동안 한화는 늘 꼴찌를 맴돌았다. 꼴찌가 너무 익숙해졌는지 요즘엔 한화의 성적이 떨어져도 그리 서운하지 않다. 그런데도 올해 들어 대전 야구장(한화이글스파크)은 늘 만원이다. 대전이 이럴진대, 대구의 삼성 팬, 부산의 롯데 팬, 광주의 기아 팬, 서울의 LG 팬 두산 팬들은 어떻겠는가. 엄청난 프로야구 인기는 과연 어디서 온 것일까. 아무래도 1970년대 고등학교 야구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은 프로야구에 밀려 고교야구에 관한 관심이 미미하지만, 1982년 프로야구 출범 이전까지 고교야구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박물관에서 만난 역전의 명수
2015년 봄, 전북 군산의 군산근대역사박물관에서 흥미로운 전시가 열렸다. 국립민속박물관과 함께 기획한 특별전 《시민 야구의 신화, 역전의 명수 군산》이었다. 1903년 전후에 시작된 군산 야구의 역사를 소개한 전시였다. 군산 야구 역사의 정점은 군산상고현 군산상일고다. 군산상고는 1972년 7월 황금사자기쟁탈 전국지구별초청 고교야구쟁패전 부산고와의 결승에서 1대4의 열세를 딛고 9회 말 5대4로 대역전승을 일궈냈다.
당시 『동아일보』는 「군산상고 극적 우승/숨 가쁜 공방 부산고에 9회 말 역전」, 「승자도 패자도 울었다/시민들 춤추며 만세-군산/痛憤…TV마다 만원-부산」이란 제목으로 기사를 내보냈다1972년 7월 20일 자. 이때부터 군산상고는 ‘역전의 명수’로 불리며 한국 고교 야구를 풍미했다. 군산상고의 대역전극은 하나의 전설이 됐고, 그 덕분에 고교 야구는 최고의 인기 스포츠로 자리 잡아 갔다. 1972년의 그 멋진 스토리를 군산의 박물관에서 다시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매력적인 경험이었다.
충청도 야구의 새 역사
1970년대 고교 야구는 10여 개의 명문 팀이 돌아가면서 우승을 독차지했다. 경북고, 대구상고현 대구상원고, 부산고, 경남고, 부산상고현 개성고, 군산상고현 군산상일고가 막강했다. 여기에 신일고, 선린상고현 선린인터넷고, 배명고, 중앙고, 성남고, 광주제일고, 광주상고현 광주동성고 등이 가세했다. 야구 강팀들은 대부분 명문고였다. 내가 살던 충청도에는 전국대회 4강권에 진입할 만한 야구 강팀이 없었다. 그런데 1977년 5월, 공주고가 대통령배쟁탈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우승했다. 『동아일보』는 「충청도 야구 첫 전국 제패」란 타이틀로 “충청도에 고교야구 패권을 안겨주는 야구사의 새 장을 열었다”는 내용의 기사를 내보냈다1977년 5월 18일 자. 『조선일보』는 「이 지방 최고 경사, 기쁨의 환성」이란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분위기를 전했다1977년 5월 18일 자. “공주군이 온통 들떴다. 집에서, 거리의 텔레비전 가게 앞에서 초조하게 텔레비전을 지켜보던 군민들은 공주고 투수 오영세 군이 9회 초 부산고의 마지막 타자를 스트라이크 아웃시켜 대망의 우승이 확정되자 감격의 박수와 탄성을 터뜨렸다.”
읍 단위 지역의 고등학교가 우승을 한 것도 처음이었다. 공주고 우승 소식에 충남지역은 난리가 났다. 공주 사람들은 감격을 주체하지 못하고 금의환향한 공주고 야구단의 카퍼레이드를 열어주기도 했다. 당시 나는 공주에서 멀지 않은 부여의 부소산 자락에 살았고 중학교 1학년이었다. 나는 공주고 우승 소식이 실린 신문 스포츠면을 오려 정성껏 스크랩했다. 그때 공주고 MVP는 포수 김경문이었다. 그 김경문은 최근 한화이글스의 감독이 되었다.
나의 야구 몰입은 1980년대 초 고등학생 시절까지 계속되었다. 공주고 우승 후 3년 뒤인 1980년 8월, 신생팀 천안북일고가 봉황대기쟁탈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우승했다. 충남지역은 또 한 번 난리가 났고 야구붐까지 일었다. 그때 대전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나는 그 야구붐에 열심히 편승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매일같이 친구들과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야구를 했다. 그 시절 대전의 중고교 운동장은 방과 후 야구하는 학생들로 가득했다. 고등학교 때 나는 시를 좀 써보겠다고 문학동인회 활동을 했었다. 고3 가을 어느 날, 문학의 밤 행사가 열렸는데 나는 폼나는 시를 포기하고 산문을 써서 낭독했다. 산문의 제목은 〈야구 철학〉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드라마틱한 야구 장면 몇 가지를 이리저리 엮고 나의 상상력을 가미해 하나의 스토리를 만들었던 것 같다. “야구는 곧 인생”이라는 믿음에 푹 빠져있던, 어찌 보면 좀 유치찬란했던 시절이었다.
1970년대 이촌향도와 고교야구 인기
광복 직후 시작된 우리나라의 고등학교 야구대회는 1970년대 들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1970년대 고교 야구대회는 신문사가 주도했다. 5월에는 중앙일보사가 주최하는 대통령배쟁탈 전국고교야구대회1967년 창설, 6월에는 조선일보사가 주최하는 청룡기쟁탈 전국고교 야구선수대회1946년 창설, 7월 말~8월 초엔 부산일보사가 주최하는 화랑대기쟁탈 전국고교야구대회1949년 창설와 대구 매일신문사가 주최하는 대붕기쟁탈 전국고교야구대회1979년 창설가 열렸다. 여름방학 때인 8월 중순엔 가장 큰 규모의 봉황대기쟁탈 전국고교야구대회1971년 창설가 한국일보사 주최로, 9월에는 시즌을 마무리하는 황금사자기쟁탈 전국지구별초청고교야구쟁패전1947년 창설이 동아일보사 주최로 열렸다1970년대 말 기준.
청룡기, 봉황대기, 화랑기, 대붕기, 황금사자기…. 고교야구대회는 그 이름만으로도 화려하고 장쾌하고 육중했다. 물론 부산과 대구에서 열리는 화랑대기와 대붕기 대회는 서울에서 열리는 대회만큼의 무게감을 지니지는 못했다. 어쨌든 고교 야구대회는 대부분 지역 예선을 거쳐 참가팀을 선발했다. 특히 서울에서 열리는 대회는 예선이 더욱 치열했다. 그렇다 보니 약체팀은 전국대회 출전조차 쉽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간파한 한국일보사는 예선 없이 어느 학교나 참가할 수 있는 야구대회를 1971년 신설했다. 바로 봉황대기 야구대회다. 이 대회엔 전국 45~50개 팀이 참가했다. 재일 동포 고등학생 야구팀이 출전하기도 했다.
동아일보사의 황금사자기 대회는 좀 특이했다. 예선을 거쳐 출전팀을 선발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매년 8월까지 열린 대회에서 4강 이상 성적을 거둔 팀 또는 그에 준하는 실력을 지닌 팀을 골라 주최 측이 초청하는 형식이었다. 일종의 왕중왕전이라고 할까. 대회는 서울 동대문에 있는 서울운동장 야구장2007년 철거, 현재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렸다. 대회가 열리면 서울운동장 야구장과 그 주변은 늘 북적였다. 재학생 응원단보다 졸업생 응원단이 훨씬 많았다. 뜨거운 응원 함성과 함께 각양각색의 교가들이 쉼 없이 울려 퍼졌으니 사실상 전국 고등학교의 동문회장이고 향우회장이었다. 특히 봉황대기가 열리는 8월에는 그 열기가 더욱 뜨거웠다. 약체팀까지도 모두 대회에 참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1970년대는 이촌향도離村向都의 시대였다. 빠른 속도로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많은 사람이 고향을 떠나 서울로 향했다. 그들은 고교 야구를 통해 모교와 고향을 떠올렸다. 그 뜨거운 응원은 결국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1970년대 고교야구 열기엔 산업화 시대의 특별한 애교심과 애향심이 깔려 있었다. 그것이 지금 프로야구 인기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글 | 이광표_서원대학교 휴머니티교양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