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담긴 종이 유물의 특별한 외출
국립민속박물관 파주의 다섯 번째 수장형 전시 《종이, 봄날을 만나다》가 지난 5월 개관했다. 이번 전시는 비개방 영역에 있던 지류 유물들이 개방 영역인 열린수장고 16으로 이동하여 선보이는 전시다. 그간 열린수장고 16의 전시가 기존 소장품인 소반 및 반닫이와 주제 연관성을 가졌다면, 이번 전시는 ‘종이’라는 좀 더 확장된 주제와 방식으로 수장형 전시의 새로운 실험이 시도됐다.
전시의 주제로 선택된 종이 특히 한지는 가볍고 연약하지만 변용이 다양하며, 천년을 잇는 강인함을 지닌 소재다. 이런 종이를 다루는 전통적인 공예에는 지장, 지호, 지승이라는 대표 기법이 있다. 지승은 종이를 일정 간격으로 잘라 끈을 꼬아 엮거나 매듭지어 기물을 만드는 기법이며, 지호는 종이를 풀과 섞어 죽처럼 만들어 형태를 완성하는 기법이고, 지장은 종이를 여러 겹 발라 두터운 후지를 만들고 그 표면에 기름을 칠하거나 옻칠을 올려 완성하는 기법이다. 이렇듯 우리 선조들이 종이의 물성을 포용하며 만들어 사용한, 실용과 미감을 두루 갖춘 지류 소재 소장품이 《종이, 봄날을 만나다》 전시에서 공개되고 있다.
우리 안에 전승되고 내재된 창의적 DNA를 확인하는 시간
전시기획에 앞서 ‘수장형 전시’라는 전제가 어렵고도 중요한 과제였다. 전시 시나리오에 따라 유물과 자료를 선정하여 배치하는 기존 전시와 달리 ‘수장형 전시’는 한 주제에 대해 다양한 소장품들을 동시에 비교하며 볼 수 있게 하거나, 혹은 관람객이 시나리오에 따라 고정된 자리에 있는 유물을 찾아다니며 관람하는 전시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수장형 전시의 궁극적 목적은 개방형 수장고가 지향하는 자료의 개방과 공유, 활용에 있으므로 이와 같은 관점을 담아야 했다. 이런 배경에서 지류 유물을 소개하는 본 전시의 제목으로 당초 가제였던 ‘종이의 집’에서 《종이, 봄날을 만나다》가 도출됐다. 이는 비개방 영역에 있는 유물들이 4개월간 특별한 외출을 한다는 의미와 동시에 현대 작가 작품과의 조우를 통한 전통의 지속가능성 곧 ‘종이 공예의 봄날’이라는 미래가치를 중의적으로 담고자 한 것이다.
이에 따른 전시 시나리오도 ‘창의성의 향연’ → ‘멋과 맛과 결을 품은’ → ‘지평의 확장’으로 정리되었다. 각 부에서 의도한 세부 내용은 다음과 같다.
•1부 ‘창의성의 향연’ – 종이 공예의 대표 기법과 활용 사례 소개
•2부 ‘멋과 맛과 결을 품은’ – 의·식·주로 용도를 분류한 지류 소장품 전시
•3부 ‘지평의 확장’ – 종이 공예의 전승 관점에서 현대 작가 작품 전시
특별한 유물을 특별하게 만나도록 하는 공간큐레이팅
이와 같은 콘텐츠를 시각화·공간화하는 것 역시 수장형 전시가 갖는 전제와 지향점을 담아야 했다. 전시가 열리는 장소는 204㎡ 규모의 16 수장고이지만 이전 전시들이 그러했듯 국립민속박물관 파주 건물에서부터 특별전 콘텐츠와 연계한 볼거리가 시작되도록 했다. 바로 건물 외관에 설치된 홍보 설치물인데, 이번에는 그래픽 맵핑만이 아닌 ‘종이의 환대Welcome Greeting of Paper’라는 주제로 318장의 깃발종이를 만드는 빛과 바람을 시각화하면서 한지라는 종이 소재의 확장성을 상징하는 오브제이 바람에 펄럭이며 관람객을 맞이하도록 했다.
이어지는 열린수장고 16의 입구 통로에도 지화남지현 작가의 ‘백화’ 설치 작업으로 관람객의 봄나들이 정취를 북돋우며 전시 관람 전후 포토존의 역할도 하도록 했다. 전시실로 입장하여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전시 공간은 관람객이 접근할 수 없는 비개방 영역의 지류 보관소인 2 수장고를 모티브로 디자인됐다. 외기와 습기에 취약한 지류를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조습 패널로 마감된 2 수장고를 연상시키는 격자 한지 패널이 기존 수장대에 덧대어지고 안내 패널로도 차용되었다. 2부에는 무려 100여 점의 지류 소장품이 전시되는데 전시실의 규모 대비, 또한 지류 유물이라는 특성을 생각할 때 실로 작지 않은 규모이다. 통상 지류 유물은 큰 기획전에서도 백여 점이나 되는 많은 양을, 한 달 이상 기간 동안 선뵈는 것은 흔치 않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전시할 유물 목록을 만들고 수장고에서 실사를 진행하는데, 유물 하나하나의 미감과 아우라에 여러 번 감탄을 했었다. 파주관 이전에 서울관에서 근무하며 십수 년간 수많은 전시를 담당해왔다. 매번 전시를 준비할 때 가장 소름 끼치도록 멋진 순간은 완성된 전시 공간에 유물이 앉혀지는 순간이다. 완성된 전시 공간의 조형과 구조 그래픽 미감으로도 멋있다고 생각되다가도 그 빈 공간에 주인인 유물이 들어오면 장소의 아우라가 완전히 달라진다. ‘화룡점정’이라고 해야 할까. 유물이 자리 잡은 쇼케이스나 부스는 비로소 완벽하게 완성된 느낌을 준다. 이번 특별전의 경우 비개방 영역에서 고이 모셔 온 100여 점의 유물들이 하나하나 수장대에 자리를 잡고 그들이 일제히 연출하는 광경은 과히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마치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클라이맥스 같은 환청이 들리는 듯했다. 이런 감동이 9월까지 방문객들에게도 전달되기를 기대해 본다.
수장형 전시의 의미는 현재를 넘어 미래로 이어질 지평의 확장
앞서 언급했듯 수장형 전시는 일반 전시와 다른 지향점을 기획과 공간연출에 담고 있다. ‘과거로부터 전해 온 생활 기물의 실용적 미감과 현재를 넘어 미래로 이어질 지평의 확장’이라는 메시지는 바로 개방형 수장고가 지향하는 ‘자료와 정보 그리고 영감의 연결’이다. 그래서 국립민속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지류 유물과 종이를 소재로 작업하는 전라북도 무형유산 지승장 김선애 외 현대 작가들의 작품 30여 점이 함께 전시되는 것은 의미가 있다. 전승과 미래지향이라는 관점에서 ‘개방×공유×활용’ 가능성을 모색하는 개방형 수장고의 의미를 더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종이, 봄날을 만나다》 특별전이 고유한 아름다움을 지닌 우리 관 소장품을 통해 우리 문화의 가치를 만나는 귀한 시간이 되길 기대해 본다.
《종이, 봄날을 만나다》 특별전은 국립민속박물관 파주에서 9월 22일까지 진행되며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매일 3회(10:30, 13:30, 15:30) 전문 전시해설도 운영하고 있으니, 방문에 참고하시기를 바란다.
글 | 최미옥_유물과학과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