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최고의 천재로 손꼽히던 다산 정약용. 그가 관료로서, 학자로서 최고의 업적을 완성한 것은 권력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때였다. 하지만 당장 내일을 장담할 수 없던 순간에도 그는 자신의 소명을 잊지 않았다. 수많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후학을 양성하고 시대를 관통하는 저서를 남길 수 있었던 이유를, 우리는 다산박물관에서 찾을 수 있다.
섬으로 향하던, 반도로 통하던 길목
강진의 역사는 삼국시대 때부터 시작됐다. 백제는 현재의 병영면을 도무군으로, 현재의 강진읍을 동음현으로 지정했지만 신라의 삼국통일 후 경덕왕 때에 이르러서는 각각 양무군과 탐진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고려시대에는 양무군이 도강군으로 변경됐다. 지금의 강진이라는 이름도 도강군의 ‘강’과 탐진현의 ‘진’을 합해 만들어졌다. 조선시대 강진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광주목의 전라도 병영을 지금의 병영면으로 옮김으로써 강진현으로 격상됐다. 군 사령관의 주둔지가 된 셈이었는데, 실제 을묘왜변 당시에는 강진 일대에서 상당한 격전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오래 전부터 농업이 주된 산업이었던 강진은 본래 상당히 평화롭고 한적한 곳이었다. 이곳에서 수확한 말먹이를 탐라지금의 제주로 보내고, 다 자란 조랑말들을 실어 와 한양으로 보내는 거점 역할을 했다. 강진군 마량馬良면의 원래 이름이 마량포馬梁浦마량포: 말이 건너는 나무다리가 놓인 항구였던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삼국시대 때부터 시작된 말을 중심으로 한 탐라와의 물류 이동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전환을 맞는다.
교통이 좋지 못하던 시대, 한양과 거리가 먼 지역일수록 인식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이는 왕이 신하를 귀양 보낼 때의 거리와 처벌의 무게가 비례하는 데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강진은, 한양과 가장 먼 제주로 귀양을 가는 신하들의 기착지 역할을 했다. 제주는 그야말로 권력과의 단절을 뜻하는 유배지였기에 강진에서 제주행을 기다리는 유배자들의 심정은 비통하기 이를 데 없었을 것이다. 반면 강진 자체가 유배지인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고 한다. 따뜻한 남해안에서의 귀양살이는 육지와 떨어진 섬이나 혹독한 추위로 유명한 함경도 지방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월했기 때문이다. 강진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인 다산 정약용이 『목민심서』를 비롯한 수많은 저서를 남기고 후학을 길러낼 수 있었던 것 역시 강진의 넉넉함이 기반이 되어준 덕분이었다.
유배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다산의 전환점
서학을 탄압하는 신유박해에 연루돼 강진으로 유배를 온 다산이 처음부터 활발한 저술 및 후학 양성을 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강진 최고의 명소가 된 다산초당이 만들어지기까지, 18년의 유배 생활 중 8년은 이곳저곳을 전전해야 했다. 최고 권력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던 관료로서는 참기 힘든 모욕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강진에서 다양한 유산을 남길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다산 선생님이 가족과 주고 받은 편지를 보면 그런 궁금증이 해소됩니다. 남겨진 가족을 생각하며 스스로를 다잡았다는 사실을 수많은 편지를 통해 알 수 있으니까요. 그 편지들은 다산 선생님의 생애와 강진에서의 활동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료들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저희는 조선 후기의 천재 실학자이자 가족을 사랑하는 가장, 제자를 아끼던 스승으로서 다산 선생님의 모습을 조명하는 데에 주안점을 두고 있습니다.”
다산박물관의 전시와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는 김정남 학예연구사는 “강진에서의 18년이 다산 선생님에게 연구와 저작, 후학 양성을 위한 소중한 시간이 됐듯 강진 역시 다산 선생님이 남긴 유무형의 유산 덕분에 더욱 풍요로워졌다”며 강진과 다산의 인연을 설명했다. 아울러 “민초들의 삶이 어떠한지 그 누구보다 밀접하게 관찰할 수 있었기에 관료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다산박물관에서 가장 처음 만나게 되는 상설전시관 입구에는 다산의 제자가 되어 강연에 참석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시대의 변화를 누구보다 멀리 조망했던, 하지만 굴곡질 수밖에 없었던 정약용이라는 ‘천재’와 마주할 수 있도록 설계된 장소다. 아울러 다산과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려는 박물관의 정체성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곳이기도 하다.
안으로 걸음을 옮기면 그가 저술한 다양한 책, 정조대왕으로부터 받은 어필, 가족 및 제자들과 주고받은 편지들을 확인할 수 있다. 정갈하게 써 내려간 글씨는, 언젠가 다시 일어서겠다는 다짐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전시관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다산초당 앞에 두고 차를 끓이던 반석인 다조茶竈 모형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손수 끓였을 차향이 맴도는 듯하다. 그러니, 다산박물관에서는 차茶처럼 맑고 투명했던 다산의 사상과 인품을 될 수 있는 한 천천히 느껴보도록 하자.
오래된 것들의 새로운 풍경 속으로
다산초당
다산박물관에서 다산의 삶과 업적에 대해 상세히 파악했다면 반드시 다산초당을 방문하자. 다산이 기거했던 다산초당은 조선 최고 실학자로 손꼽히던 그가 어떤 일상을 보냈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다. 주차장에서 시작해 초당까지 오르는 길은 약 800m로 그리 짧지 않다. 하지만 주변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는 동백나무와 차나무 등 남부지방에서만 볼 수 있는 수목들 덕분에 걷는 내내 지루할 틈이 없다. 마침내 도착한 이후 마주하는 강진만의 전망은, 숲속 좁은 길을 걸어온 이들 모두가 만족할 만한 보상을 잔뜩 안겨준다. 다산이 직접 글자를 새긴 정석 바위와 차를 끓일 때 물을 긷던 약천, 차를 놓던 반석인 다조 등을 통해서도 그의 온기를 느낄 수 있다.
강진다원
다산茶山이라는 호에서도 알 수 있듯 다산은 그 누구보다 차를 즐겼다. 그리고 차 재배에 적합한 토양과 기후를 갖고 있는 강진 일대는 그에게 더없이 소중한 공간이었다. 그래서 다산은 강진을 중심으로 녹차 재배 권역을 부흥시키는 데에도 상당한 역할을 했다. 실제 ‘남쪽의 금강산’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월출산은 해방 직전까지 국내 최초의 녹차 제품인 백운옥판차白雲玉板茶라는 전차錢茶를 생산하던 차산지로 손꼽히기도 했다. 현재는 한 대기업에서 운영하고 있는 강진다원이 그 장엄한 명맥을 잇고 있다. 33.3ha에 이르는 광활한 차밭은 특히 봄이면 관광객들로 북적이는데, 가을에도 푸르름 덕분에 눈이 시원해지는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명소로 손꼽힌다.
백련사
신라 문성왕 때 무염국사가 만덕산의 이름을 따 만덕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백련사는, 무위사와 함께 강진을 대표하는 사찰 중 하나다. 창건 이후 고려 희종 7년, 원묘국사 요세 스님이 옛터에 중창하고 백련결사로 크게 이름을 날려 백련사로 불리게 된다. 백련결사는 고려 무신 정권 당시 타락하고 있던 불교계를 정화하고자 시작했던 운동으로 세속화된 불교계가 신앙적 반성을 하면서 출발했다. 누구나 참된 신앙 행위를 통해 해탈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 백련결사는 백성들로부터 지지를 얻었고 이후 8명의 국사를 배출했다. 이렇게 유서 깊은 장소인 백련사에서 다산은 혜장선사와 유학과 불교의 벽을 넘나들며 깊이 교류했다. 실제 다산초당까지 이어지는 길의 동백숲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될 정도로 가치가 높으니 꼭 방문해보자.
미니인터뷰
모두에게 가장 필요한 가르침을 찾을 수 있는 곳, 다산박물관입니다
-김정남(다산박물관 학예연구사)
다산박물관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인물로 선정된 다산 정약용 선생님의 강진 시절 삶과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박물관입니다. 다산 선생님이 생전에 남긴 친필 간찰과 저술, 주변 인물들의 자료를 수집·보존·전시하고 있으며 다양한 디지털 자료들을 통해 인간적 면모를 확인할 수 있도록 기획해 전시하고 있습니다. 저희 박물관의 특징 중 하나는 공무원, 교직원, 공기업·공공기관 등의 단체 관람이 많다는 점입니다. 박물관 교육홍보팀에서는 다산 공직관 청렴교육, 공무원 세대별 특화 푸소FU-SO 농가체류형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고 있지요. 이를 통해 다산 선생님의 가르침을 통해 공직자 청렴의식과 애민정신을 정립하는 한편 공직자의 자아 성찰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국립민속박물관의 도움을 통한 전시기획과 프로그램 운영도 큰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2019년에는 국립민속박물관의 찾아가는 어린이박물관 운영 기관으로 선정돼 <장난감과 함께하는 시간여행>을 총 5회 진행했고, 같은 해 공동기획전인 <다신계茶信契 사제師弟 간의 신의信義>를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지역 박물관 단독으로 기획하거나 실행하기 어려운 부분들에 대해 그 어느 기관보다 적극적인 도움을 주고 있어 문화적으로 소외되기 쉬운 지역 주민과 어린이들이 많은 혜택을 받고 있답니다. 올해도 찾아가는 어린이박물관 사업에 선정된 덕분에 아이들이 박물관과 더 친근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고요. 앞으로도 다산 선생님의 삶과 정신을 현시대와 밀접하게 접목하는 박물관으로 단단하게 성장하겠습니다.
글 | 정환정_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