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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온 길·걸어갈 길

나는 국립민속박물관의 영원한 응원단입니다

서울신문에서 오래도록 기사를 써온 서동철 논설위원은 문화재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을 만큼 자타가 공인하는 우리 문화유산, 우리 문화재 전문가이다. 국립민속박물관과 인연을 맺은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한결 같은 마음으로 민속문화의 부흥과 발전을 위해 날카로운 펜을 굴려온 그, 서동철 서울신문 논설위원을 만나보았다.

클래식음악을 사랑하던 소년, 우리 문화재를 사랑하는 기자로
서동철 논설위원은 문화에 대한 관심을 일찍부터 차곡차곡 쌓아온 인물이다. FM음악방송이 없던 중학생 시절 기독교방송 라디오의 클래식음악 프로그램을 들으면서 음악에 대한 글쓰기를 꿈꾸었던 그는 이내 서양음악에 대한 이방인의 한계를 느꼈다. 그랬던 그가 일종의 전환점을 만나게 된 건 대학 시절이었다. 피리와 대금, 해금, 장구 등으로 편성된 우리 관악합주곡 ‘삼현영상회상’을 듣고는 충격을 받은 것이다. “세계적으로 보편성이 있어 보이는 우리 음악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고 한다. 우리 음악의 가치를 깨닫게 되면서 한국 문화 저변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황해도 만구대탁굿 큰만신 우옥주 여사의 노량진 굿당에서 열린 굿모임에도 다녔습니다. 밤새 굿구경을 하고 장구로 무악 장단도 두드리고요. 자연스럽게 우리 문화를 소양으로 갖춘 문화부 기자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지요.”
대학을 졸업한 그는 신문사에 들어갔고 3년이 지나자 소원대로 문화부 음악담당기자가 됐다. 그런데 그가 몸담고 있는 신문사는 지금도 그렇지만 상대적으로 기자 숫자가 적어 한 사람이 하나의 분야만 담당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음악과 함께 문화재도 맡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운명이자 필연이었다.
“제가 국악 분야에서도 특히 매력을 느꼈던 대상은 조선 후기 음악인들의 예술가 정신이랄까 이런 것이었습니다. 음악이지만 역사이기도 하고 문학이기도 하고 문화재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문화재는 이미 제게는 어느 정도 익숙한 분야였어요.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보니 무게중심이 어느샌가 완전히 문화재로 옮겨졌지요.”

국립민속박물관과 함께 걸어온 세월
서동철 논설위원과 국립민속박물관과의 인연은 아주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문화재 담당기자를 처음 담당하던 언저리에 국립민속박물관이 지금의 건물로 옮겨왔던 것이다. 서동철 논설위원은 “기자인 나도 막 출범한 것이나 다름없는 민속박물관이 제대로 체제를 갖추도록 돕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갑자기 커진 박물관을 운영할 조직과 인원의 확보를 과제로 끌어안고 있던 당시 이종철 관장의 열성에도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정치부로 자리를 옮겼지만 정부 각 부처의 조직 및 정원관리를 담당하는 당시 총무처에도 출입하면서 민속박물관의 응원단 노릇을 계속하게 됐다고.
“민속박물관이 1999년 유물과학과, 2000년 섭외교육과를 신설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정부가 ‘작은 정부’를 선언하자 행정관리 주무부처인 행정자치부부터가 2국 5과를 줄인 상황이었어요. 다른 부처도 이런 기준에 맞추라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이었는데 문화부의 산하기관인 민속박물관은 오히려 2개과가 늘어난 겁니다. 그때 ‘간 큰 민속박물관’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쓴 기억이 납니다. 행자부 출입기자 시절입니다. 정부 축소 분위기 속에서 민속박물관은 완전히 거꾸로 갔으니 용감하다는 뜻이지요. 아무리 작은 정부라도 국민의 삶에 필요한 조직과 인원은 늘려야 한다는 생각은 개인적으로도 갖고 있었습니다.”
문화부에 복귀한 이후에는 ‘찾아가는 박물관’이 버스가 없어 승용차에 ‘이고 지고 가는 박물관’이 되고 있다는 민속박물관 담당자의 한탄을 듣고 기사를 쓰기도 했다. 그런데 이 기사를 읽은 이창동 문화부장관이 곧바로 민속박물관에 버스를 마련해주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2005년 어느 날 ‘찾아가는 박물관’ 버스의 출범식을 겸한 고사에서 봉투에 ‘기원! 무사고 안전운행’이라고 써놓고는 절을 했던 기억을 들려주기도 했다.

첫 ‘찾아가는 민속박물관’ 체험(2005.9.13. 가평 목동초등학교)
현재 국립민속박물관 ‘찾아가는 어린이박물관’ 버스

큰 틀에서의 마스터플랜 수립이 필요한 시기
여전히 찔리면 누군가는 아플, 그러나 꼭 필요한 글을 씀에 있어서는 망설임이 없는 서동철 논설위원은 국립민속박물관의 세종시 이전계획에 대해서도 방향성을 제시한다.
“세종시 이전 계획이 있다지만 어떻게 될지 불투명한 상황이라고 듣고 있습니다. 저는 단순한 이전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박물관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도 민속박물관에 강력한 리더십이 가동돼야 할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철학과 소신을 바탕으로 새로운 박물관의 모습을 제시하고 구성원의 마음을 모아가야 합니다. 세상이 바뀌어 가면서 이제는 다소 폭이 좁아 보이는 ‘민속’이라는 박물관 이름도 더 많은 것은 포용할 수 있도록 변화가 있어도 좋겠습니다. 또 파주 수장고의 존재는 역설적으로 초대형 박물관으로 거듭나야 하는 민속박물관에는 악재일 수 있습니다. 제가 관련 부처 당국자라도 이렇게 그럴듯한 수장고를 가진 박물관에 넓은 부지를 줄 이유는 없습니다. 몇 년 전 칼럼을 쓴 적도 있지만, 파주관은 정치적 상황을 봐가면서 ‘남북 민속문화 교류센터’같은 기능으로 전환이 필요합니다. 깊어지는 남북한 사이 문화적 이질감을 극복할 정부 차원의 노력이 전무한 상황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민속박물관이 그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는 미래에도 먹힐 수 있는 가치가 있어야 ‘문화재’고 ‘문화유산’이라고 했다. 그저 오래됐다고 문화재가 되고 보존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럴수록 미래지향적인 가치가 차고 넘치는 우리 문화유산이 잊혀지는 과정에 있는 것은 안타깝다고 했다.
“바흐나 베토벤의 음악은 아마도 인류가 멸망하는 날까지 존속할 것이고 이는 그 가치를 인정하는 것을 넘어 즐기는 사람이 많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제가 감동했던 ‘삼현영산회상’은 못지않은 가치가 있음에도 미래가 불투명합니다. 관념적으로는 우리 것의 가치를 인정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즐기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우리 문화에서 느꼈던 감동과 즐거움을 다른 사람들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글을 씁니다. 그런 사람이 많아졌을 때 우리 문화유산도 바흐의 음악처럼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여기니까요. 우리 문화에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를 확대하는 것, 그게 제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성원들도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 필요
마지막으로 누구보다 민속박물관을 아끼고 애정하는 서동철 논설위원에게 민속박물관 직원에게 꼭 하고 싶은 조언을 부탁했다.
“문화재 분야 언저리에서 보고 들은 것이 없지는 않으니 이런 말씀은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국가대표 박물관에 몸담고 있는 만큼 좌고우면하지 말고 조직과 함께 발전하는 길을 택하시라고요. 민속박물관은 인간의 삶을 다루는 성격상 무엇이라도 다룰 수 있는 박물관입니다. 지금 민속박물관에 어떤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한계를 극복하는 노력을 스스로 하면 됩니다. 개인적으로 ‘오늘의 삶’도 더 과감하게 민속박물관 영역으로 끌고 들어오면 좋겠습니다. 구성원들이 적극적인 생각을 가질 때 박물관 발전도 가속화할 것입니다.”
지금도 신문사 주변에서 점심을 먹고 여유가 있으면 민속박물관까지 산책을 한다는 서동철논설의원, 그가 이야기 말미에 진심이 담긴 인사를 전한다.
“요즘에는 민속박물관의 전시 내용도 매우 좋아 관람객의 한 사람으로 아무런 불만이 없습니다. 이렇게 좋은 박물관을 만드신 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글 | 서동철_서울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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