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보기 PDF 박물관 바로가기

예의로 빚은 술, 조선의 가양주

오래전 우리 조상은 술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놀라운 자연 현상으로 받아들였다. 쌀 등의 전분질에 물과 누룩이 들어가면 발효가 일어나 술독이 따뜻해지고, 수많은 공기 방울과 함께 매운 가스 냄새가 난다. 또 이로 인해 원료에는 없었던 신비한 향기와 다양한 맛이 나는데, 마시고 나면 정신이 야릇해지고 몽롱한 상태가 되는 현상을 매우 신비롭게 여겼다. 때문에 술은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음식이라 받아들여 천지신명과 조상신에게 바치기 시작하였고 신에게 바쳤던 술을 인간이 마심으로써 신과 소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신의 보살핌으로 자손과 가족이 평안하고 풍요롭게 살기를 기원했다.

가정에서 술을 빚어 마시는 가양주家釀酒는 우리 민족의 생활 속에 오랫동안 내려온 풍습이다. 가양주는 우리가 주식으로 삼는 곡식과 발효제인 누룩麯子과 물을 원료로 하고, 여기에 지역이나 가문, 빚는 사람의 솜씨에 따라 꽃이나 약재藥材 등을 첨가해 발효, 숙성시킨 술을 총칭한다. 같은 종류의 쌀이라도 갖가지 방법과 기술로 빚었기에 그 맛과 향기는 다양했다. 일체의 화학적 첨가물 없이 순수한 곡물에 누룩과 물을 섞어 빚는 것이 우리 고유 가양주 제조법의 특징이다.

일가일주一家一酒, 가풍을 담은 조선의 가양주

가양주가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고 꽃을 피운 시기는 조선시대였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승려들이 사찰을 중심으로 누룩을 비롯한 술을 빚어 일반에 공급하는 풍토였다. 가양주 문화는 조상 숭배, 부모와 노인 공경, 농경 생활에 따른 명절 등의 세시풍속을 중요하게 여기는 유교 사상과 관련 있기 때문에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공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집집마다 제사를 중요하게 여긴 조선시대에는 기제사, 명절제사 등 여러 제사를 위해 정성껏 제주祭酒를 빚어 조상신에게 천신薦新했다. 또한 ‘집에 찾아드는 과객過客은 물리칠 수 없다’ 하여 반가와 부유층은 물론 서민까지도 술을 내어 손님을 대접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속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명가명주名家銘酒’라는 말이 생겨났다. 명문가에는 손님의 출입이 빈번했다. 또한 술로 손님을 접대하는 것이 예와 도리, 인정으로 인식되었기에 저마다의 미주美酒를 빚었다. 특히 일생의 중대사였던 혼례와 상례 등에서 손님 접대에 정성을 다하고 예를 갖추는 것이 중요한 도리였다. 한편 농사를 짓는 일꾼들을 위해 절기 변화에 맞춰 농주農酒를 빚기도 했다. 피로를 잊게 하는 농주는 힘든 농사일을 꾸리게 하는 비결이었다.

그 집의 술맛에 길흉이 깃든다

조선시대에 가양주는 제사와 명절 차례, 손님 접대, 농사일 등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집안의 상비식이었다. 그와 함께 술맛 자체에도 중요한 의미가 부여됐다. 즉 술맛이 그 집안의 길흉을 가늠하는 하나의 잣대로 여겨진 것이다. 조상 제사와 명절 차례에 쓰는 제주祭酒는 정성껏 만들어 맛과 향기가 좋은 청주여야 하고, 가장의 손님 접대와 식사 때의 반주, 그 밖의 농사와 일상사에 두루 쓰는 술은 그 맛의 좋고 나쁨에 따라 인정이 쏠리게 된다고 믿었다. 때문에 집집마다 갖가지 기술과 비법을 동원해 술을 빚게 되었고, 어떤 경우에도 대대로 내려오는 가양주 비법을 계승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화됐다.

‘술은 하늘이 내려준 복록福祿으로, 술이 될 때에 그 맛의 아름답고 사나움으로 주인의 길흉을 안다.’ 소동파蘇東坡가 남긴 말대로 조선시대에는 가양주의 맛이 곧 과거 잘못에 대한 징벌, 또는 다가올 미래에 대한 조짐이라는 인식도 존재했다. 특히 조상봉사에 쓸 제주가 잘못되면 불경과 불공에 대한 조상의 응징으로 여기고, 자녀의 혼인 때 쓸 ‘혼삿술’의 맛이 떨어지거나 잘못되면 자식의 장래가 불행해질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술 빚기는 가문의 안녕을 위해서라도 온 정성을 다해야 하는 일이었다.

예의와 조화를 중요하게 여긴 우리 가양주 문화

우리의 가양주에는 서양 와인의 포도향이나 사과향, 맥주의 호프향보다 훨씬 다양하고 은근한 방향芳香이 있다. 과실이 아닌 전분질의 쌀과 곰팡이 냄새가 나는 누룩으로 빚은 술임에도 불구하고, 술을 빚는 이의 솜씨와 쌀의 가공 방법에 따라 다양한 향기를 품고 있어 ‘방향주芳香酒’라고도 한다. 사과 향기를 비롯해 포도, 딸기, 복숭아, 수박, 자두, 연꽃, 계피, 솜사탕 등 다양한 향기와 맛을 지니고 있어 더욱 매력적이다.

가양주의 뿌리를 캐다 보면 우리 조상의 음주 문화와 함께 양조 기술에 대해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조상들은 반주나 일상적으로 마시는 술의 당도를 높였다. 단맛을 지닌 술은 한번에 많은 양을 먹기 힘들다. 즉 맛을 조정해 절주하게 했다는 의미가 된다. 이때 반주와 접대용 술로 고려한 음주량이 알코올 25~35g 정도였는데 이는 바로 1일 적정 음주량과 비슷하다. 마시고 취하는 성향을 강조해 건강이 나빠질 수 있는 현대 음주 문화와 달리, 반주는 술을 즐기는 동시에 식사 후의 소화를 돕고 입맛을 돋워주는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음주 문화였다.

우리 말 ‘술’의 어원이 수와 불이 결합한 것이라는 의견을 보아도 우리 민족이 술을 경계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분명하다. 술은 분명 물 형태의 액체이지만 물의 순수하고 차가우며 가라앉히는 성질과는 달리 따뜻하고 동적인 불의 성질을 가졌으므로 술을 ‘물에 가둔 불’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이는 동양철학의 기본인 음양사상과도 맞닿아 있다. 사실, 술의 80% 이상은 물로 음의 성질을 지녔고, 나머지 20%에 못 미치는 알코올은 뜨겁고 위로 상승하는 불의 기질인 양의 성질을 지녔다. 이를 음과 양의 환상적인 융합과 조화로 이해한 우리의 음주문화야말로 ‘물(陰)과 불(陽)의 환상적인 조화, 곧 음양화합이나 상하, 동서, 남북, 남녀, 이념 간 소통과 조화의 상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듯 조선시대 가양주를 비롯해 술에 녹아든 철학을 살펴보면 한국인은 술을 단순히 마시고 취하기 위한 음식이나 수단으로만 인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술을 빚는 사람의 마음 자세와 마시고 대접하는 모든 행위와 절차, 그리고 마신 후의 행동거지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음주 문화는 예의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 이 글은 외부 필진이 작성하였으며 국립민속박물관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글_박록담 | 한국전통주연구소장

더 알아보기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댓글 등록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