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녀海女’는 흔히 ‘녀潛女’, ‘수潛嫂’라고도 한다. 산소 공급 장치 없이 바닷속에 들어가 전복, 소라, 해삼, 미역, 우뭇가사리 따위를 따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여자다. 해녀에 대한 문헌상 최초의 기록은 조선시대 이건李健의 「제주풍토기濟州風土記」(1629)이다. 이 책에서는 잠녀를 주로 ‘바다에 들어가서 미역을 캐는 여자採藿之女 謂之潛女’이면서 ‘생복을 잡는生鰒之捉亦如之’ 역할을 담당하는 자로 묘사하고 있다. 제주도는 화산섬으로 토질이 무척 척박하다. 제주 해녀가 물질도 하고 농사도 짓는 평범한 여자인 이유다. 물질 기량은 선천적인 재능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 익혀온 훈련의 결과다. 해녀에게 바다는 죽음과 맞서는 위험한 공간이자 생활의 터전이다. 거친 환경 속에서도 생명력을 잃지 않고 끈질기게 삶을 이어온 해녀들의 생애가 진중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바다를 중심으로 공동체 생활을 이루다
제주 해녀들은 7, 8세부터 헤엄치는 연습을 시작해 10세를 지나면 무자맥질을 익힌다. 15, 16세에는 어엿한 해녀로 독립하고 40세 전후로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하며 60세 전후까지 해녀 생활을 한다. 간혹 80세에도 물질을 하는 경우가 있다. 해녀는 기량의 차이에 따라 하군下軍, 중군中軍, 상군上軍으로 나뉜다. 기량이 가장 빼어난 해녀는 대상군大上軍이라 부른다. 해녀들은 일반적으로 수심 10m, 깊게는 20m까지 잠수해 작업을 한다. 잠수 시간은 평균 1분 정도인데, 2분 이상 견디는 해녀들도 있다. 한 달 평균 작업 일수는 15일 이상이며, 겨울철뿐 아니라 분만 전날까지 물질을 하기도 한다.
제주 해녀는 공동체 의식과 결속력이 강하다. 바다에서 작업을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그들은 언제나 함께하지만 소득은 각자의 몫이다. 어린 딸이 처음으로 물질을 배우는 곳은 ‘아기바당(아기바다)’, 고령자나 병약자를 위해 마을 앞바다의 얕은 곳을 ‘할망바당(할머니바다)’으로 정해 저마다 해산물 채취와 그에 따른 수입을 갖도록 한다. 해녀 공동체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다. 또한 ‘학교바당’을 지정하고 그곳에서 얻는 수입은 교육비로 마을 학교에 기부하는 등 사회복지와 교육에 대한 헌신성은 제주 해녀의 오랜 전통이다. ‘잠수계潛嫂契’를 조직하고 공공기금을 조성해 어려운 동료를 돕는 데도 적극적이다.
해녀들은 어장을 가꾸고 감시하는 공동체적 의무와 해산물을 캘 수 있는 권리를 함께 가진다. 해녀 공동체는 연간어획량과 어획물의 크기를 제한해 해산물의 남획을 방지하고 있다. 수산 자원 조성과 해양 환경 보전을 위해 금어기를 정하고, 바다의 잡초를 베어내는 ‘갯닦기’ 작업도 진행한다.
해녀들은 마을 단위로 영등굿과 잠수굿을 벌여 풍어를 빌기도 한다. 2009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71호 ‘제주칠머리당 영등굿’이 대표적이다. 영등신은 바람과 비를 관장해 어부나 해녀들에게 해상 안전과 생업의 풍요를 가져다주는 신이다. 음력 2월 1일에 영등환영제를, 2월 14일에는 영등송별제를 치른다.
제주 해녀, 육지로 진출하다
제주 해녀의 한반도 진출은 출륙금지령이 해제된 1823년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출가出稼 물질은 1887년 부산 영도로 간 것이 시초였다. 일제강점기에는 한반도는 물론 일본․중국․러시아에까지 진출했다. 동해안으로 향하는 해녀들은 돛배를 타고 거문도 대신 추자도와 전라남도 소안도를 경유했다. 남해안 다도해를 따라 경상남도나 부산, 멀게는 동해안까지 당도한 셈이다. 바다의 상황이 급변했을 때 주변의 섬으로 대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진도를 경유해 서해안으로 가는 해로는 추자도를 곧바로 소안도와 진도 울돌목을 차례로 경유했다. 추자도 부근의 화탈도火脫島나 사수도泗水島 해역은 거친 조류와 갑작스러운 돌풍 때문에 표류나 해난 사고가 일어나기 쉬운 위험한 바다였다. 이곳에 이르면 선주는 배 위에서 고사를 치르기도 했는데, 돼지 한 마리를 제물로 바치며 요왕龍王에게 항해와 일행의 안전을 빌었다.
제주 해녀들은 봄에 출가해 5∼6개월 정도 물질을 하고 가을 추석 무렵 귀향했다. 일부는 출가지에 정착하기도 했다. 한반도 연안에 분포한 해녀 대부분이 원래 제주 출신이었다. 제주 해녀들은 출가지에서 공동체 생활을 이어왔다. 물질 작업은 10여 명이 동아리를 이루어 해나간다. 해녀 각자의 개인적 삶은 다채로워도, 원주민들과의 관계나 물질작업 체험은 거의 동일한 이유다. 출가지의 원주민들은 제주 해녀에게 대체로 호의적이었지만, 때로 박대하며 적대하는 경우도 있었다. ‘보작이년’, ‘제주년’, ‘제주놈’ 등 멸시하는 명칭으로 불리거나, 간혹 지역 원주민이 중매를 서면 “(제주 해녀들은) 동냥 바가지를 들렁 동냥질을 해 먹어도 육지놈한테는 안 준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제주 해녀의 한반도 출가는 ‘해녀 노래’가 한반도로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 제주도에서는 가까운 바다로 헤엄쳐 가서 하는 물질인 ‘물질’을 주로 하였고, 한반도에서는 돛배를 타고 가서 하는 물질인 ‘뱃물질’을 주로 하였다. 조류를 거슬러 가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물질이나 뱃물질이나 조류의 흐름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해녀 노래는 해녀들이 뱃물질하러 오갈 때 노를 저으며 불렀던 노동요다. 동일선후창이나 선후창 방식으로 부르고, 간혹 교환창이나 독창 방식으로도 불렀다. 해녀 노래의 가창기연歌唱機緣인 노를 젓는 노동은 1960년대 전후 돛배가 동력선으로 대체되면서 소멸되었다. 해녀 노래 사설에는 해녀들의 삶의 궤적이 온전히 투영되어 있다. 해산물 채취의 어려움과 노 젓는 노동의 고단함, 고향 제주와 자식에 대한 그리움, 신세 한탄과 인생 무상이 노래에 담겨 있다. 해녀 노래는 해양 문학으로도 손색이 없다.
바다에서 공존하고 바다와 공생하다
제주 해녀는 1970년에 1만4143명을 기록했지만 2015년말 기준 제주지역 현직 해녀는 4377명에 불과하다. 현재 물질하는 해녀를 연령별로 보면 30-39세가 10명(0.2%), 40-49세가 57명(1.3%), 50-59세가 663명(15.0%), 60-69세가 1042명(23.6%), 70세 이상이 2643명(59.9%)이다. 해녀의 감소를 막고 해녀 문화를 보호하기 위해 제주특별자치도와 수산업협동조합은 복지후생에 적극적인 정책을 펴고 있다. 탈의장 시설의 현대화, 수산종묘 방류사업, 수산물 관광직매장 설치, 모범해녀회 포상, 진료비 지원 등의 지원 사업이 대표적이다. 어촌계와 해녀조합에서 해녀학교를 설립하는가 하면, 해양수산부는 2015년 12월 제주 해녀의 세계적 희소가치와 보존 가치를 인정하여 ‘제주해녀어업’을 국가중요어업유산 제1호로 지정했다.
예로부터 해녀들은 바다를 개척과 정복의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공존하고 공생하는 공간으로 여겼다. 해녀들은 단순히 수익을 얻기 위해 해산물을 채취했던 것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주도적으로 바다를 가꾸고 경영했다.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제주 해녀들의 입어관행은 남획에 따른 환경 파괴를 해결하는 하나의 방안으로써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제주해녀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해녀 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고 보호하는 제주인들의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세계적으로도 독특하고 희귀한 해녀 문화가 그 가치를 인정받아, 명맥을 끊지 않고 오래도록 전승해가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글_이성훈 | 숭실대학교 전 겸임교수. 「해녀연구총서」(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 편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