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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근대 건축의 역사를 걷다

세계 근대 건축의 근원은 모더니즘이지만, 우리나라 근대 건축의 시작은 개항 이후 유입된 서양 건축양식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부산과 원산이 먼저 문을 연 후 인천의 개항은 1883년에야 이뤄졌다. 하지만 한국에 들어온 외국인들은 서울과 가까운 인천을 한결 선호했다. 서울에도 근대 건축물이 세워졌지만, 경인 철도가 서울에 부설된 1905년 이후부터였다. 19세기 말 근대 건축 태동기의 중심지는 인천이었던 셈이다.손장원 재능대학교 교수는 1991년 무렵부터 인천 근대 건축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당시 인천광역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로 근무하며 인천의 문화유산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건축 전공자의 근대 건축물에 대한 관심은 점차 깊어졌고, 실측과 자료 조사를 병행하며 심도 있는 연구를 하게 되었다. 역사적 오류가 재생산되는 것을 막고 싶은 마음도 컸다. “2000년 인천아트플랫폼 건립 당시 자료를 살펴보니 검증되지 않은 사실들이 많았습니다. 결국 그간의 연구 결과를 모아 2006년 『인천 근대 건축』을 발간했고, 2009년 인천역사자료관․인천건축재단이 개최한 학술대회 「건축으로 보는 도시, 인천」에 참여했습니다.”법적으로 근대 건축물의 정의는 ‘건립 50년이 지난 건물’이다. 그러나 손 교수는 우리나라 근대 건축을 ‘1950년~1960년 이전 우리나라 전통 양식 기법이 아닌 서양 기법으로 지어진 건물’로 정의한다. 인천의 근대 건축 전문가와 함께 개항장에서 중요한 건축 유산들을 순례했다.

인천의 근대 건축은 다양한 양식이 특징입니다

근대 건축 유산을 보유한 도시로서 인천은 뚜렷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부산, 목포, 군산은 일본인을 중심으로 근대 건축물이 지어졌습니다. 반면에 인천의 근대 건축은 일본인뿐 아니라 중국인, 영국인, 미국인, 러시아인 등에 의해 만들어져 다채로운 양식을 볼 수 있다는 것이 특별합니다. 지금 남아있는 건축물만 비교해 봐도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화려한 건축물이 다수 남아있는 인천 중구에는 관광객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진다. 개항박물관(구 일본 제1은행 인천지점), 인천근대건축전시관(구 일본 제18은행), 중구요식업조합(구 일본 58은행), 카페 팟알(Pot R,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567호), 일본우선회사 인천지점(등록문화재 제248호), 중국인 연립주택 등이 특히 인기다.

“개항박물관과 인천근대건축전시관은 예전에 은행이었습니다. 특히 가장 먼저 건립된 개항박물관 건물은 돌로 만들진 석조건물이라 주목할 만합니다. 일본 건축가 니이노미 다카마사新承孝正가 설계했지요.”석조건물인 구 일본 제1은행 인천지점의 외관은 지나간 세월과 풍파를 담고 있지만 여전히 견고하고 아름답다. 건축 재료로서 석재가 갖는 특성을 잘 보여준다. 반면 구 일본 18은행, 구 일본 58은행은 벽돌 위에 석조를 붙인 것으로, 겉으로 봐도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건축가 니이노미 다카마사의 건축물은 일본에도 2점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다. 그중 하나는 교토 외곽 일본 장군의 집으로 쓰였던 무린암無隣庵인데, 메이지유신 주역들이 모여 회의를 했을 정도로 일본에서도 중요한 역사적 장소로 남아있다.

일본우선회사 인천지점은 현재 인천아트플랫폼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다. 인천아트플랫폼은 인천의 근대 건축물을 문화적으로 활용한 좋은 예다. 젊은 작가를 위한 전시장과 레지던스 등이 조성되어 있으며, 인천에 가면 꼭 들러야 할 명소가 되었다.

근대사를 알면 근대 건축물이 다르게 보인다인천의 개항장은 근대 유산에 대한 연구와 함께 최근 사회적으로도 큰 관심을 끌었다. 개항장의 즐길 거리 가운데 하나가 복고풍 의상을 입고 근대 건축물 앞에서 사진을 찍는 투어인데, 손장원 교수는 건축물의 의미를 알고 방문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한복 입고 고궁에서 촬영하는 것과는 다르지요. 역사적 사실을 인지하고 감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일부 건축물은 슬픈 역사를 가진 네거티브 문화유산이기 때문이에요.” 이를테면 카페 팟알은 과거 대화조大和組였다. 대화조는 일본인이 운영하던 하역 회사로, 인천항에 오가는 배에 화물을 싣고 나르기 위해 저임금으로 조선인을 고용했다. 카페 1층은 당시 사무실이었고, 2ㆍ3층 다다미방은 하역 관리인 숙소였다. 건물 뒤에는 화려한 일본인 사장의 집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공터로 남아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일본인이 남긴 자료를 근간으로 연구해왔습니다. 그러다 4~5년 전부터 우리나라 정부가 남긴 자료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우리나라는 당시 뭘 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지요. 물론 자료는 얼마 되지 않지만 『인천감리서』, 『화도진』 등을 중심으로 충분히 공부할 가치가 있었습니다.

인천의 근대 건축은 전통 건축과 현대 건축의 접점이에요

그는 인천 근대 건축의 진가를 알 수 있는 지역으로 동구를 말했다. 중구가 돈 많은 일본인 상인들이 살던 곳이라면, 동구는 조선인 노동자의 소박했던 삶을 엿볼 수 있는 동네이기 때문이다. 동구의 역사적 건물들은 인천 개항장을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매개다. 여선교사 합숙소, 영화초등학교 본관동, 봉은사 인천포교당, 송현배수지 제수변실, 복도가 삐걱거려 시끄러울 정도로 옛 양식이 고스란히 남은 창영초등학교 교사 등이 그 사례다. 1907년 건립한 인천 최초의 공립보통학교인 창영초등학교는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16호이기도 하다. 3.1운동 당시 인천 만세운동의 진원지였다고 한다.

인천의 근대 건축물이 가지는 가장 큰 의미는 우리나라 전통 건축과 현대 건축의 접점이며, 완충지대라는 사실입니다.” 손장원 교수는 창영초등학교를 둘러보며 인천 근대 건축이 지금 우리에게 던지는 시사점을 언급했다.

개항과 함께 외래 건축물이 유입된 우리나라 근대 건축 문화는 당시 서양과 일본 건축의 경향을 자발적 혹은 강제적으로 받아들이며 현대 건축으로 이어졌다. 2019년 현재 우리나라 건축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아파트와 빌딩은 서구 건축 양식이다. 때문에 인천 근대 건축을 돌아보는 것은 과거 유산의 확인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 문화의 역사적 선상에서 한국 현대 건축과의 연결고리를 사고하는 기회이기도 한 것이다. 손 교수는 앞으로 근대 개항장에서 벌어진 조선인의 건축 활동 연구에 집중할 계획이다.

글_편집팀
사진_김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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