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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한 민속

조선시대에도 해외여행을 했을까 ②

조선인들에게 합법적으로 해외를 여행할 유일한 기회는 외교 사절단으로 파견되는 것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중국 이외에도 이웃한 일본에도 외교 사절단이 왕래하였다. 임진왜란 이전 조선국왕사朝鮮國王使의 일본 파견은 61회였다. 대개는 왜구의 문제나 표류인의 송환을 위해 파견되었고, 양국 간의 신뢰를 목적으로 파견된 것은 약 18회였다. ‘통신사通信使’는 조선과 일본 양국 간에 ‘신뢰’를 통하여 우호관계 유지하기 위해 조선에서 일본으로 파견한 사절이다. ‘통신사’란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은 중국의 왜구 토벌을 앞두고 일본 정세를 탐색하기 위해 1413년 파견한 사행이었다. 그 명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한 것은 1429년 무로마치 막부幕府의 장군 승계를 축하하기 위해 보낸 사절이다. 막부 장군은 1868년부터 메이지 천황이 직접 통치하기 이전 가마쿠라1192~1333, 무로마치1338~1573, 도쿠가와1603~1867 막부에 이르기까지 일본을 섭정한 실질적 통치자다.

 

국교회복 교량적 역할수행,
노정마다 일본의 성대한 환영 받아

 

조선 통신사는 임진왜란 이후 단절되었던 조선국왕과 도쿠가와 막부 사이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교량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 시기 통신사는 1607년 국교 회복을 위해 처음 파견된 이래 1609년 기유약조 체결 이후 본격적으로 파견되었고, 1811년을 마지막으로 조선과 일본의 양국 우호를 위해 모두 12회에 걸쳐 파견되었다. 조선 통신사는 중국에 파견한 사절과 달리, 대부분 도쿠가와 막부의 장군이 취임할 때마다 요청한 축하 사절을 비정기적으로 파견하였기 때문에 이에 대한 외교적 실무는 조선의 동래부와 일본의 쓰시마對馬島 번에서 담당하였다.

도 1. 막부에서 제공한 누선을 타고 이동하는 통신사 일행 _개인소장

도 1. 막부에서 제공한 누선을 타고 이동하는 통신사 일행 _개인소장

 

통신사행은 부산 동래부에서 에도江戶, 지금의 도쿄까지 주로 뱃길을 이용하였으므로 ‘해사록海槎錄’, ‘동사록東槎錄’ 등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통신사의 노정은 한성을 출발하여 에도에 이르기까지 육로 2,545리, 수로 3,285리로 총 5,830리였다. 통신사 일행이 한양에서 부산까지 이동한 후 배로 쓰시마에 이르면 여기서부터는 쓰시마 번주가 통신사와 동행하는데, 이키시마, 아이노시마, 아카마가세키, 가미노세키, 우시마도, 무로쓰, 효고를 거쳐 오사카에 이른다. 여기까지는 배를 이용한 여행으로, 각지의 영주인 다이묘大名가 접대하는 후한 대접을 받았다. 오사카에 닻을 내린 통신사는 낮은 강바닥에 알맞은 누선樓船으로 갈아타고 요도가와 하구를 거슬러 올라갔다. 요도가와에 상륙한 조선통신사는 에도까지 말 1,000여필을 포함한 2,000여명의 대행렬을 이루었는데, 여기서부터 약 2주일간은 육로 여행이었다.

 

오사카부터는 막부 장군의 누선을 타고 교토에 상륙하였다(도 1). 이후 오쓰大津를 경유하여 일행이 오가키, 나고야를 지나 오카자키에 들어가면 장군이 보낸 막부의 고관이 나와 환영하고 시즈오카, 도카이도를 거쳐 에도에 이르게 된다. 이 과정에서 통신사는 막부 장군만 사용하던 약 30km에 이르는 특별 전용로와 통신사를 위해 특별히 만든 배다리舟橋를 이용하여 강을 건넜다. 통신사의 왕래를 위해 교토부터 에도까지 53개 역원에서만 총 인원 23만550명과 준마 4만1,234필을 동원했을 정도로 많은 비용을 지불하였다. 통신사가 지나는 모든 지역의 다이묘는 통신사를 맞을 관소의 신축과 수리, 호행하는 선단船團의 편성과 훈련, 도로 정비, 인력과 말의 조달에 소용되는 비용을 자신의 관할 지역에서 충당해야만 했다.

도 2. 에도를 향하는 통신사 행렬을 구경하는 일본인들 _고베시립박물관

도 2. 에도를 향하는 통신사 행렬을 구경하는 일본인들 _고베시립박물관

 

도쿠가와 막부에서 이렇듯 엄청난 비용을 감내하면서 조선통신사를 요청한 이유는 ‘쇄국’의 조건에서 도쿠가와 막부에게 있어 조선 통신사는 유구국琉球國, 지금의 오키나와 사절단과 함께 일본 내에서 막부의 정치적 정통성을 확보하고, 임진왜란 이후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존재를 재조명해주는 요소였기 때문이다.

 

통신사 행렬이 에도를 방문하여 조선 국왕을 상징하는 대형 깃발과 의장, 국왕의 친서인 국서國書를 실은 가마를 앞세우고 에도성을 향해 행진하는 모습은 장관을 이루었고, 타국의 문화를 접할 기회가 적었던 일본인의 가장 큰 관심사가 되었다. 근세 초기 통신사와 그 행렬을 묘사한 일본 화가들은 대부분 막부 소속의 일류 화가들이었고, 후기에는 많은 지역화가도 등장하였다. 따라서 일본 서민문화와 통신사가 융합된 작품수가 증가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통신사 관련 행렬도는 노정을 지나는 통신사 행렬, 오사카에서 배를 타고 이동하는 모습, 국서 전달을 위해 에도성으로 행진하는 모습으로 구분되며, 총 50종 이상이 전해져 조선과 일본의 문화교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인들의 관심을 받은 조선통신사,
이후 일본문화에도 영향 미쳐

 

통신사가 지나가는 노정에는 그 행렬을 보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각계각층의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구경하기 좋은 자리는 비싼 값에 매매되었다(도 2). 이러한 현상은 임진왜란 이후 집단 이식된 조선 문화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행렬도에 나타난 군중들은 질서정연하며 꽃 장식을 한 상점과 노점 안에 단정히 앉아 있거나 혹은 구획에 따라 서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외국사절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였으나 “통신사가 지나갈 때 손가락질이나 비웃는 사례가 있어서는 안 된다.”라고 행동을 규제했던 막부의 칙령 때문이기도 했다. 1711년 통신사행을 기록한 『동사일기』에는 길에서 만난 일본인들의 풍속을 묘사한 내용이 기술되었는데, 성인 남자들의 수염과 머리 모양에서 아이들과 여인들의 머리모양, 남녀복식 중에서도 온갖 채색으로 화려한 화초의 형상을 많이 그린 여인의 복식, 신분에 따라 다른 옷의 빛깔, 남녀가 귀천이 없이 신던 게다, 저고리와 바지를 벗어 허리띠에 꽂고서 팔과 다리를 드러내고 다니는 천한 사람들의 행색까지 매우 자세하다.

 

통신사가 일본에 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그 즈음 인기 있는 우키요에浮世繪 화가들이 조선통신사의 행렬을 묘사한 목판화나 삽화들을 모아 미리 제작한 행렬도가 다수 제작되었다. 이는 에도시대 막부의 고위층뿐만 아니라 대중문화에도 조선통신사 행렬은 당시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에는 통신사 행렬과 같은 대대적인 행사에 편승하여 거리에서 통신사 관련 판화가 널리 판매되어 당시 일본인들의 통신사에 대한 관심과 그에 따른 그림 수요도 높았음을 보여준다.

도 3. 일본 목판화에 묘사된 조선통신사 행렬 _대영박물관

도 3. 일본 목판화에 묘사된 조선통신사 행렬 _대영박물관

 

우키요에 화가 곤도 키요노부近藤淸信의 판화 중에는 ‘唐人行列之繪圖’라는 제목이 있다(도 3). 본래 ‘당인’은 중국인을 지칭하지만, 당시 일본은 중국과 나가사키의 특정 지역에서 통상관계만 유지하였고, 당시 중국을 지배한 청나라 만주족의 복식과는 차이가 많은 『당인행렬지회도』는 조선통신사 행렬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통신사의 복식이 당나라나 명나라의 복식과 유사했기 때문에 일본 지식인과 서민들도 통신사 행렬의 복식에 관심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통신사 행렬은 오늘날 일본 각지에서 행해지는 지역 축제인 마츠리와 대중문화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그중 기후현 오가키시의 조선야마朝鮮軕는 그 지역을 통과하는 조선통신사행렬의 의장, 복식 등을 상세히 살펴 모형으로 만든 일종의 가장행렬로 1648년 처음 공연되었다. 조선야마는 조선인행렬, 당인행렬 등의 별칭으로 불렸던 데서 기원한 것이다. 또한 우시마도와 미에현 쓰시津市 등의 당인행렬과 당인 춤의 전통 역시 조선 통신사 행렬에서 유래한 것이다.

 

조선통신사가 왕래하던 도쿠가와 막부의 에도시대는 그 이전 막부 정권 시기에 일으킨 임진왜란과 그 이후 시기 메이지 천황의 통치 시기 일본의 군국주의적 침략과 전쟁을 고려할 때, 양국 간 전례 없는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는 양국 간 우호의 상징이자 평화의 사절로서 조선통신사의 역할이 오늘날 한일관계에서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는 것을 다시 상기시키는 이유이다.

글_정은주 |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후 전남대학교 미술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朝鮮時代 明淸 使行 關聯 繪畵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조선시대 대외관계 기록화 및 회화식 고지도를 연구하며, 한국고지도연구학회 학술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논저로 『에도시대 나가사키 당관唐館을 통해 유입된 중국화풍의 영향』, 『중국 역대 직공도의 한인도상韓人圖像과 그 인식』, 『19세기 대청사행對淸使行과 연행도』, 『중국에서 유입된 지도의 조선적 변용』, 『계미1763 통신사행의 화원 활동 연구』, 『조선시대 사행기록화』, 『조선 지식인, 중국을 거닐다』와 공저로 『전근대 서울에 온 외국인들』, 『표암 강세황』, 『조선 후기 문인화가의 표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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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댓글이 등록되었습니다.
  1. 김정완 댓글:

    지금 전시중인 국서누선도의 클로버 세 개 모양 깃발은 조선국왕을 상징하는 문양인가요?
    저희 딸이 궁금해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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