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녀潛女’라는 소리를 듣거나 글만 봐도 마음이 짠해진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할머니, 어머니, 누나까지 모두 해녀였기에 그들이 잡아온 소라, 전복, 문어 등의 해산물을 보면서 오히려 기분 좋아라 했던 기억이다. 우도의 여자라면 누구나 하는 물질이라서 애잔하다는 생각은 별로 느껴 보지 못했다. 오히려 해녀에 대하여 초조하고 긴장된 마음을 갖게 된 것은 결혼하고 난 후부터이다. 남편의 보호를 받으며 생활해야 할 아내를 생과 사가 넘나드는 바다로 내보냈으니 말이다. 언제 위급한 상황에 닥칠지 모르는 바다를 바라보며 애간장을 끓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언젠가 제주며느리를 둔 육지의 어르신과 이야기 할 기회가 있었다. 제주여성들의 강직하고 억척스러운 면에는 충격과 감동이 공존한다 했다. 투박한 말투, 다소곳하지 않고 살갑지 않지만 생활력 하나만큼은 강하다는 뜻이었다. 왜 아니겠는가. 어떤 역경에서도 스스로 해결해 살아가는 제주의 여장부의 딸이었을 터이니.
뭍과 물에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해녀. 그들은 생존을 위한 삶을 살았다. 물질은 육지의 땅을 일구는 작업과는 사뭇 다르다. 물때, 무수기, 바람의 세기와 방향, 밀물과 썰물의 시간, 물 위에선 보이지도 않는 해산물, 그 밖의 바다 속 상황을 샅샅이 알아야만 가능하다. 칼날 같은 돌 틈 사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바다 속 바위, 추측과 경험의 무자맥질, 호흡 장치 없이 숨을 참고 물 속에서 거꾸로 서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이루어지는 중노동이다.
물건 따는 우도 해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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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봄에 미역이나 우뭇가사리를 채취하는 ‘문’날에는 온 집안 식구가 총 동원되었으며 아이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초등학교에서도 물때에 맞춰 오전 수업이나 조퇴를 허락했었고, 물때가 아침일 때는 결석까지도 용인했다. 지금이야 아이들 공부가 우선이지만 그 옛날에는 바다의 일년 농사를 수확하는 시기라 생계를 위해선 도리가 없었다. ‘갯가 장날’ 풍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녀들의 손끝에 달린 가족의 삶
‘갓물질’은 얕은 바다에서 하는 물질이다. 수심이 깊지 않은 곳이어서 팔이 해녀갓 배운 해녀나 하군, 할망해녀들의 주 작업장이다. 미역, 우뭇가사리, 감태 해초가 많아 어장이 풍성하다.
‘뱃물질’은 배를 타고 먼 바다에 ‘물속 여’를 찾아 하는 작업을 말한다. 물때와 시간을 맞춰야 하기 때문에 배를 타고 간다. 멀리 나가서 하는 물질이라 중, 상군 해녀 십여 명 이상 무리로 가서 작업을 하고 돌아온다. 강인한 해녀가 되기 위해서는 험난하고 고된 숙련 과정을 거쳐야 한다. 추위와 물에서 오랜 시간을 견딜 수 있는 임해 훈련 없이는 단번에 수심 깊은 바다 속 작업이 절대 가능하지 않다.
‘난바르물질’은 ‘뱃물질’과 같은데, 다른 점은 몇 날 며칠 배에서 숙식을 하며 작업 장소를 이동하며 하는 물질로 ‘원양물질’이이라고도 한다. ‘원정물질’은 먼 지방이나 혹은 해외에 까지 나가 일정기간 정착하는 것으로서 ‘출가물질’이라고도 한다. 출가물질은 그곳 전주錢主들이 겨울에 선급금을 주고 제주 해녀를 모집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목돈을 벌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에 당연히 실력 있는 중, 상군 해녀들이 주로 모여들었다. 그들의 실력은 해외에서도 인정을 받아 한때 제주의 경제는 물론이고 한 마을, 가족의 경제를 일구는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물때가 좋을 때는 하루 두 차례 고생스러운 작업을 할 때가 다반사였지만, 온 가족이 한겨울, 먹을 걱정 없이 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위안을 삼았다. 그래서 당시 우도에서는 딸 많은 집이 부자였다. 동생들 학비는 물론, 세 끼 걱정은 없었으니 말이다.
이 출가물질은 이른 봄3, 4월부터 추석 전후 겨울 추위가 닥치기 전까지 작업을 했다. 추석이 가까워져서 귀향하는 것은 추석 차례 준비나 가족들 추석빔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출가물질에서 돌아오는 어머니나 누나의 손에 바리바리 들려있던 선물보따리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추석 전에 귀향하지 못하는 해녀들은 귀향하는 해녀 편에 돈과 옷가지 등을 보내 오기도 했다.
그 옛날 소중이팬티를 이르는 제주도 말를 입고 물질 할 시절에는 정과 인심이 있었다. 할망바당할머니 바다과 애기바당아기 바다구역이 따로 정해져 있어 상군들이 그곳에서 작업하면 성토대상이 된다. 상군 해녀들이 먼 바다로 나가다 행여 그곳에 팔이 해녀가 있으면 몇 차례 숨빔질잠수을 해 잡은 물건을 망사리에 넣어주곤 했었다. 당시는 흔한 모습이어서 그 말을 ‘게석 또는 게숙’이라 했다. 누구신디 소라게숙 받았쩌누구에게 소라를 받았다하고 고마워 했다. 해녀들 세계에서만 볼 수 있는 말과 질서요, 미덕이었다. 요즘은 물건이 없다 보니, 따로 정해있는 작업 구역도 없어지고, 그 인심과 예우는커녕 낱말도 생소하다.
이 글에 쓰인 사진은 제주도 하도리, 강원도 삼척시 갈남리 등의 해녀 모습이 함께 담겨있다. 지역은 달라도 물을 삶의 터전으로 한 그네들의 삶은 다른 듯 닮아있다.
| 조사보고서 <김성원 씨댁 생활재> – PDF
제주 우도 출생. 제주 성산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우도법인어촌계 및 제주시 수협에서 근무했고 북제주군의회 3대, 4대 의원, 제주특별자치도 도서우도지역 특별보좌관을 지냈다. 저서로 <내 아내는 해녀입니다>2013, <우도 돌담>2014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