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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그랬지

‘귀요미’는 이미,
1970년대에 등장했다

공상과학소설. 이 단어를 사전에서 찾는다.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실현 불가능한 허구적 세계를 이야기 형식에 담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소설”한용환, 『소설학 사전』, 문예출판사, 1999이라는 정의가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의문이 생긴다.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실현 불가능한 허구적 세계’의 이야기도 아니라면 소설의 장르를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 걸까. 이런 고민을 하는 것은, 지금 말하려고 하는 소설이 미래에 대한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지는 않지만, 허구적 세계를 다뤘으되 현실로 실현된 것들이 꽤 많은 소설이기 때문이다.

 

김승옥의 <준의 세계>다. 5권으로 된 김승옥 전집 중 단편소설을 모아놓은 편인 《한밤중의 작은 풍경》에 실려 있다. 1970년과 1980년 사이 어느 쯤에 나온 것이라고 짐작되는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2020년이다. 주인공은 준. 직업은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 1990년생으로 서른 살이고, 아내와 네 살짜리 딸이 있고, 관악 제99아파트 단지 사십 평 아파트에 산다. 이 소설에는 이렇게나 발랄한 도입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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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은 그의 자가용 ‘GUYOMI119’로 어디론지 달리고 있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그 자신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불안을 느끼는 건 전연 아니다. 결국 지구의 어느 곳일 것이다.

 

준의 자가용은 GUYOMI119. 차의 이름이 ‘귀염둥이’에서 유래되었다고 소설의 화자가 직접 밝히고 있다. GUYOMI119는 국산 소형 전기차고, 운전자는 운전에 익숙해질 필요가 없다. 자동 컴퓨터의 명령으로 차가 스스로 운전한다. 그러므로 탑승자는 딴 짓을 해도 된다.

 

전기차에 대해 읽다가 일론 머스크에 대해 생각했다. 테슬라모터스를 설립해 전기차의 장난감 이미지의 고급스럽게 바꿔놓은 남자, 민간 우주왕복선인 스페이스 엑스와 태양에너지 시스템이라는 아이템으로 사업을 전개하고 있는, 1971년에 태어난 남자다. 올해 국내에 출간된 그의 전기를 훑어보다가 이 남자는 미래에서 온 남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책의 이름도 ‘미래의 설계자’다. 아, 일론 머스크는 영화 <아이언맨>에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연기하는 ‘아이언맨’ 토니 스타크의 실존 모델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어떤가? 일론 머스크 같은 남자들이 활약해준 덕분에 2020년이 되면 우리는 거리에서 전기차를 흔히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미래 사업들이 전개되는 양상을 보면, 운전자가 운전을 하지 않아도 되는 시점도 2020년으로부터 얼마 남지 않았을 것 같다.
다시, <준의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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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층에 있는 식품점에서 진공 파이프로 배달된 음식 세트의 자기 몫을 받아 플라스틱제 포장을 뜯어버리고 우선 오렌지주스부터 꺼내 마시면서, 준은 아내에게 자기가 꾼 꿈 얘기를 들려준다. 아내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준에게 약을 먹어야 한다고 말한다. 약이란 안정제의 일종인 ‘옵티미’를 말함인데 신문기자는 휴일이 아닌 날에는 그 약을 복용하지 않기로 신문사에서 서약하고 있다. 신문기자에게는 적당한 긴장이 필수조건이기 때문이다.

 

김승옥이 예언(?)하는 2020년의 세계는 이렇다. 준을 비롯한 인물들은 인조 베이컨을 먹고, 사람들은 안정제를 수시로 복용한다. 이 안정제의 이름은 보다시피 ‘옵티미’낙관주의자라는 뜻의 optimist에서 가져왔을 것이다. 소설의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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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요즘, 나도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안정제를 세 알씩이나 먹어야만 겨우 명랑을 되찾는답니다.”

이 만화는 만화가 이정문 선생이 1965년 그린 것으로, 서기 2000년대의 생활을 상상했다.대부분의 상상들이 우리의 삶과 닮아있다. 태양열 전기, 전기자동차, 움직이는 도로, 소형 TV 전화기, 전파 신문 등 상상 속 미래에서 2015년 현재, 우리는 살고 있다. ⓒ이정문

그렇다면 2015년의 세계는 어떤가? 진공 파이프로 음식을 배달받는 게 익숙한 일은 아니지만, 원한다면 문 앞까지 배달해주는 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할 수 있고, 온갖 인조식량 등이 개발되었거나 더 개발될 예정이다. 누군가는 곤충이 미래 식량의 위기를 해결할 대안이라고 하고, 또 한 편에서는 캡슐로 된 간소화된 식량이 준비되고 있다.
작가의 예언이 어쩌면 이럴까 싶을까 정도로 들어맞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따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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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기사는 신문마다 제각각이다. 서해 유전에서 폭발사고, 금강산 케이블의 노후문제, 관광공사의 부정사건, 탄자니아 주재 한국무역관 직원들의 태만 폭로, 목포-상해 정기 화물선의 방사능 오염…… 그러나 막상 읽어보면 대단찮은 사건들이다.

 

나는 이 부분을 읽다가 섬뜩해졌다. 어제 일어난 일들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다. 그리고 “대단찮은 사건.” 잔혹한 일갈이다. 대단한 사건들이 하루가 지나면 대단찮은 사건이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이런 곳이다. 50년 전이나, 현재, 혹은 50년 후가 된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에리히프롬은 이렇게 말했다. “과거의 위험은 사람이 노예였다는 것이며, 미래의 위험은 사람이 로봇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이 이렇게 들린다. 과거나 미래나 인간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인간은 인간이라고. 아무리 사회가 변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속성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그런 부분이 있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 인류가 편리해진다고 하더라도 분쟁과 혼란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오늘의 누군가도 내일을 예측하는 글을 쓸 것이다. 그리고 그것과 상관없이 시간은 흘러간다. ‘시대’라거나 ‘시절’이라는 모호한 형태의 흐름을 타고 말이다. 그런 측을 통해, 과거와 미래는 현재에서 만난다. 김승옥이 1970년대에 예측한 50년 후의 미래를, 지금, 2015년의 현재에서 볼 수 있듯이.

 

김승옥

1941년 일본 오사카 출생. 196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생명연습>이 당선되어 등단. 1965년 단편소설 <서울 1964년 겨울>로 동인문학상을, 1977년 단편소설 <서울의 달빛 0章>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무진기행>을 영화 <안개>로 각색하는 한편, 김동인의 <감자>를 각색•연출하고 이어령의<장군의 수염>을 각색하여 대종상 각본상을 수상하는 등 영화계에서도 활동했다. 《무진기행》 《환상수첩》 《내가 훔친 여름》 《강변부인》 《한밤중의 작은 풍경》이 ‘김승옥 소설전집’으로 묶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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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1970~1980년 대의 서울 모습. 김승옥은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2020년의 삶을 상상했다. 그 모습은 깜짝 놀랄만큼 오늘과 닮아있다.
ⓒ아사카와 다쿠미 <7080 지나간 우리의 일상 사진집> 중에서

 

글_ 한은형
소설가. 2012년 문학동네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 2015년 장편소설 《거짓말》로 한겨레문학상 수상. 소설집으로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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