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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그랬지

새로운 것은 그토록 매혹적인 것이다

전화벨이 울리는 것으로 시작되는 소설이 있다. 안주인은 기대에 차서 전화를 받는다. 전화를 놓고 나서 이틀 만에 처음으로 온 전화니 그럴 수밖에. 전화를 건 사람은 남편을 찾는다. 아내는 반갑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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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가 왔으면 그런 반가울 데가 있나! 인제는 소원성취했구려.”하고 놀리다가,
“그래 뉘게서 왔습디까?”하고 시치미를 떼고 묻는다.
“거기서 지금 전화가 왔다니까!”
주인아씨는 겨우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 이런 답답한 양반은 처음 보겠다는 듯이 또 한마디 핀잔을 준다.
“거기가 어디야? 그래 뭐랬어?”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냐고 남편이 묻자 아내는 ‘거기서’라고 답한다. 대답하기 불편하거나 곤란한 것이 있을 때 대명사처럼 좋은 것이 없다. 그러니까 여자한테 온 전화다. 여자의 이름은 채홍. 우리는 알게 된다. 채홍은 남편이 드나드는 요릿집의 기생이라는 것을. 기생이라고? 이 소설이 꽤 오래 전의 소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러 가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이다. 1.아내한테는 전화를 걸어올 친구가 없다. 2.그런데 요릿집에는 전화가 있다. 3.그 당시 전화는 희귀했을 것이다. 4.이 집의 경제적 형편이 중류 이상임을 알 수 있다. 5.기생이 가정집으로 전화해 아내가 있는 남자를 찾을 수 있는 시대적 분위기였다. 6.어쨌거나 전화는 걸려오지 않으면 받을 수가 없다. 등등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전화와 기생이 공존하던 시기에 대해 쓰고 있는 것이다. 소설의 화자는 애기 종을 ‘아이년’이라고 부르고, 남편은 인력거를 타고 귀가한다. 안주인은 머리 밑에 빨간 자름댕기잘록한 댕기를 감아서 머리를 딴다. 1925년 『조선문단』에 발표된 소설이다. 염상섭의 단편 「전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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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를 거는 사람이 전화기 옆의 손잡이를 돌리면 교환원이 받아 상대방에게 연결시켜 주었다.

 

그레이엄 벨이 전화를 생산하기 시작한 게 1876년. 우리나라에 도입된 것이 1896년이다. 처음으로 전화가 개통된 곳은 궁정. 고종황제는 인천감리 이재정에게 전화해서 한 사형수의 처형을 중지하라고 명한다. 그 운 좋은 사형수는 김구였다. 일본인에게 피살된 명성왕후의 복수를 위해 일본 육군 중위를 살해하고 사형선고를 받은 채로 인천감옥에 수감되었던 것. 전화가 개통된 지 삼일 만이었다. 전화가 없던 시대였다면, 그러니까 삼일 전이었다면, 그래서 파발꾼을 통해야 했다면, 우리가 아는 김구는 없었던 것일까?

 

전화는 처음부터 전화가 아니었다. 전화가 개설될 당시에는 전화를 ‘Telephone’의 중국식 음역인 ‘덕률풍’, ‘득률풍’, ‘다리풍’, ‘덕진풍’이나, 말을 전하는 기계라는 의미의 ‘전어기傳語機‘ 혹은 ‘어화통語話筒‘이라고 불렀다. 1902년 민간에 개통되고, 1920년대 도시에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전화’라는 이름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보급’이라고 하지만 전화는 소수가 가질 수 있는 첨단문물이자 사치품이었다. 1970년대까지 어느 정도 그랬으니 1920년대 전화의 사회적 위상이 어땠을지 짐작할 수 있다.

 

이 소설의 남편은 꽤 무리를 해서 전화를 개설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매자마자 남에게 팔 궁리를 한다. 전화가 가정불화의 원인이 되고 있으며, 김장값을 마련해야 하며, 전화를 팔라고 꼬드기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돈만 있다고 해서 전화를 놓을 수 있던 것도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남편이주사은 500원을 받고 회사 동료인 김주사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파는데, 사실은 김주사가 아버지한테 700원을 받아 200원을 가로채고 이주사한테 500원에 팔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이주사의 아내는 김주사의 아버지를 찾아가 200원을 더 받아낸다. 그러니까 김주사의 아버지는 전화에 모두 900원을 지출한 셈이다.

 

900원은 지금의 화폐가치로 어느 정도일까? 자료에 따라 약간씩 다른데, ‘1원=20,000원’쯤이라는 주장을 적용해보기로 한다. 900원은 그럼 1800만원 정도라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니 1920년대의 전화는 국산 준중형차 승용차 한 대의 가격이라는 말이다. 이주사는 돈 걱정을 하면서 김장값으로 50원을, 장인 환갑에 옷 해갈 값으로 30원을 잡고 있다. 지금 기준으로 김장값이 100만원, 옷값이 60만원으로 환산되니, 전화가 1800만원이라는 게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

 

새로운 것은 그토록 매혹적인 것이다. 작가는 이 요물의 외양을 단 한 번 묘사한다. “네모반듯한 나무갑 위에 나란히 얹힌 백통빛쇠종 두 개는 젊은 내외의 말다툼에 놀란 고양이 눈같이 커다랗게 반짝한다.”

 

염상섭은 돈의 문제를 계속해서 쓴 작가였다. 호는 횡보橫步. 보다시피 ‘비틀거리는 걸음’이라는 뜻. 술을 좋아하고 취하는 것도 좋아해서 구두와 안경을 자주 잃었다고 한다. 내가 아는 한국 작가들의 호 중에서 최고로 멋지다고 생각해왔다. 인간미와 유머와 비애가 있으므로. 그런데 이 글을 쓰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자주 비틀거려서 횡보가 아니라 더 비틀거리고 싶어서 횡보가 된 것은 아니었을까라는. 소설이란, 비틀거리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걷는 사람들이라면, 어떤 의혹도 회의도 없이 사는 사람들이라면, 소설 같은 건 읽을 필요가 없다.

 

<전화>에는 이 비틀거리는 리듬 같은 게 있다. 전화벨이 울리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전화를 매자고 조르는 아내의 얼굴을 남편이 보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니까 전화를 판 것이다.

 

염상섭廉想涉
1897년 서울 종로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나서 일본 유학을 다녀와 창간되던 동아일보에 정경부 기자로 입사한다. 남궁벽•김억•오상순 등과 『폐허廢墟』동인을 결성하고 첫 소설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발표한다. 만주와 중국 안동安東으로 이주했다가 해방 이후 신의주를 거쳐 서울로 돌아온다. 6.25당시 피난가지 못한 채 서울에 숨어 지낸다. 장편소설 『삼대』 『무화과』 『취우』 등과 많은 단편과 중편 소설을 발표했다. 1963년에 직장암으로 작고했다.

조선문단
《조선문단朝鮮文壇》은 1924년 10월 1일에 창간한 문예잡지이다. 이광수가 주재하고, 방인근이 자금을 전담, 편집 겸 발행인이 되어 조선문단사를 차려 발행했다. 《조선문단》은 10여 년 동안 통권 26호를 발행한 장수 문예지이다. 기존의 문예지는 몇몇 사람만의 작품을 싣는 동인지의 성격이 강했으나, 《조선문단》은 문단 전체에 지면을 개방하여 추천제를 통해 작품을 실었다. 이 잡지의 추천제에 의하여 작가가 된 사람은 최학송, 채만식, 한병도, 박화성, 이은상 등이 있고, 주요활동 문인은 이광수, 방인근, 염상섭, 주요한, 김동인, 전영택, 현진건, 나도향, 이상화, 김소월 등이 있다.

 

글_ 한은형
소설가. 2012년 문학동네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 2015년 장편소설 《거짓말》로 한겨레문학상 수상. 소설집으로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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