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시댁에서 커다란 철제 상자 하나를 보게 되었다. 상자를 열어보니,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동전만 한 크기의 토큰들과 낡은 종이 회수권들이 있었다. 만져보니 세월의 흔적이 손끝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 시절, 학생들이 회수권을 손에 꼭 쥐고 버스를 기다리거나, 주머니 속에 토큰 하나를 챙기며 하루를 시작하던 모습이 그려졌다. 시아버지는 1960~70년대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종이로 된 버스 회수권을 사용했다고 한다. 회수권은 10장짜리로 묶여 있었고, 학생들은 매달 그 회수권을 구매해야 했다. 당시 학생들은 일반인들이 내는 요금보다 조금 더 저렴하게 버스를 이용할 수 있었으며, 버스 차장들은 이 회수권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승객들을 태우고 안내하는 역할을 했다.
버스에서 느껴지는 사람의 온기
그 시절 버스는 늘 만원이었다. 버스 차장, 흔히 안내양이라 불리던 이들은 유니폼을 입고 승객들을 관리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버스에 매달려 타야 했던 상황이면 차장들은 양쪽 문을 잡고 승객들을 안으로 밀어 넣곤 했다. 버스의 내부 높이는 바닥에서 천장까지 185cm에 불과했다. 큰 키의 승객들은 몸을 반으로 굽혀야 할 정도로 버스 내부는 붐볐고, 차장은 승객들을 안전하게 태우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당시의 버스 풍경은 이제는 보기 힘든, 그 시대만의 독특한 모습이었다. 버스 요금 수납은 기계가 아닌 사람이 직접 해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회수권이 없으면 집에 돌아가는 길이 무척 고단했다고 한다. 지금처럼 휴대전화 하나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던 시절이었기에, 회수권은 학생들에게 필수품이었다. 친구와 장난을 치다 회수권을 잃어버려 50리19.6km의 먼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던 이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대부분의 학생들이 버스를 이용해 먼 거리를 통학했기 때문에, 승차권은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중요한 물건이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종이 회수권 대신 토큰이 등장했다. 종이 회수권은 파손되기 쉽고 관리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미리 한 달 치 토큰을 단체로 신청받아 나눠주곤 했다. 한 달에 한 번씩 큰 주머니에 가득 담긴 토큰을 받을 때마다 마치 부자가 된 것처럼 든든한 기분이 들었고, 그 주머니를 들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마음이 뿌듯했다고 한다.
만화방, 라면, 그리고 친구와의 추억
그 시절 학생들 사이에서는 회수권이나 토큰을 이용해 버스비를 아끼는 작은 속임수도 유행했다. 친구들과 함께 회수권을 칼로 교묘하게 잘라 열 장을 열한 장으로 만드는 방법으로 개수를 늘렸다. 이 방법 말고도 한 장을 반으로 갈라 두 장으로 만들거나, 그림 솜씨가 좋은 친구는 손으로 똑같이 회수권을 그리기까지 했다. 그렇게 아낀 회수권은 친구들과 함께 만화방에 가는데 사용했다. 회수권을 주면 만화방에서는 그 시절 귀하던 텔레비전으로 프로레슬링 같은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었고 만화책도 볼 수 있었다. 회수권은 꿈 같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귀중한 존재였다. 학교 앞 가게에서는 회수권 몇 장으로 라면을 사 먹을 수도 있었다. 용돈이 부족하니 배는 고프고 집에 갈 길은 멀고, 한참을 고민하다 친구와 함께 결국 가게에서 회수권으로 라면을 사 먹고 집까지 걸어가기도 했다.
기성세대에게 승차권은 단순한 교통수단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 시절의 승차권은 일상 속 작은 즐거움이었고, 친구들과 추억을 쌓는 도구였다. 종이 한 장, 토큰 한 개가 그들에게는 학교로 가는 길이자, 잠시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열쇠였다. 지금은 디지털 기술 덕분에 더욱 편리해졌지만, 그 시절 소중한 추억들은 우리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준다. 종이 승차권과 토큰은 이제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유물이 되었다.
이 글을 통해 독자들도 잊혀가는 그 시절의 향수를 함께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의 기억박물관 속에서 승차권은 여전히 소중한 자리로 남아 있다. 미래의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그 시절의 추억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 회수권 한 장, 토큰 한 개가 우리에게는 소중한 일상의 일부였어.”
글 | 박송아_문화평론가
『민속소식』 2024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