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영광을 기억하는 것이 사람에게만 허락된 일이겠는가. 유무형의 기록과 물건들에는 누군가 읽어주고 들어주길 기다리는 이야기가 여전히 살아 있다. 그러니, 굴지의 도시로 손꼽히던 곳에는 얼마나 많은 사연들이 응축돼 있겠는가. 그 규모가 크진 않지만, 창원시립마산박물관에는 바로 그런 단단하면서도 친밀한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부산과는 다른, 경남의 중심지
마산의 역사를 제대로 되짚기 위해서는 가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하지만, 한정된 지면에 당시부터 지금까지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모두 담아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 그러니, 마산이 번성하기 시작한 마산부 탄생을 이야기의 시점으로 잡는 것이 좋겠다. 1914년, 일제는 마산합포구 일대의 개항장을 마산부로 지정하며 창원과 행정적으로 분리했다. 남해안에 접한 무역항으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확대하기 위한 조치였다. 덕분에 마산은 빠르게 성장했다. 일제강점기 후기에는 경상남도 내륙의 중심지인 진주와 비슷한 수준인 인구 5만4천 규모의 도시가 됐고, 각종 행정기관과 학교들이 연이어 건립됐다. 그리고 그 학교들은 금세 경남에서 손꼽히는 명문들로 급부상했다. 명문이라는 의미는 단순히 학력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마산의 학생들은 1960년 3월 15일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3.15 의거를 일으키는 데에 앞장서기도 했다. 약 한 달 후 일어난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3.15 의거는, 마산이 간직하고 있는 의로움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역사적 사건이기도 했다. 유신철폐를 외치며 1979년 10월 16일부터 시작된 부마항쟁도 불의에 항거하는 마산 정신을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방점 중 하나다.
뜨겁게 성장하고 치열하게 항거한 마산도 시간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산업구조가 변화하면서 경남 최대 도시라는 타이틀은 점차 창원 쪽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결국 마산은 통합창원시의 마산합포구와 마산회원구로 나뉘어졌을 뿐 아니라 2010년 현재 가장 빠른 속도로 인구가 감소하고 있는 곳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이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의 희노애락이 오랫동안 진하게 스며든 곳이다 보니, 마산 시민들의 애향심은 남다른 데가 있다고 한다. 한때 부산 못지않게 번성했던 때의 기억을 여전히 생생히 간직하고 있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리고 그런 마산 시민들이 그 어느 곳보다 애착을 갖고 있는 곳이 바로, 굴곡진 마산의 이야기를 그 어느 곳보다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창원시립마산박물관이다.
역사적 공간에서 만나는 민속학적 순간들
올해로 개관 22주년을 맞이하는 창원시립마산박물관이 자리 잡은 곳은 마산합포구 문신길 105. 경상남도 기념물 제88호인 회원현 성지城地 내에 있는데, 고려시대 일본 정벌을 준비하던 여원연합군의 거점인 정동행성과 충렬왕 행궁이 있던 자리이기도 하다. 마산박물관의 외관이 성곽 모양과 비슷한 형태로 건축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하지만, 1층에서 만나는 전시물들은 한없이 정다운 것들이다. 지금의 4~50대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놀잇감들이 잔뜩 전시돼 있는데, 덕분에 이곳에 들어선 부모들은 “보호자”라는 이름 대신 자신의 자녀들과 비슷한 연령대의 아이가 되어 제기를 차고 구슬을 굴리는 한편 힘차게 딱지를 내려칠 수 있다. 물론 박물관 본연의 역할에도 충실하다. 특히 마산을 중심으로 번성했던 가야의 해상세력과 관련된 문화를 재조명하는 데에 주력하고 있는데, 지난 2019년 발굴이 진행됐던 현동 고분에서 출토된 ‘돛단배 모양 토기’ 등을 통해 마산의 역사가 얼마나 깊은지 확인할 수 있다.
근대에 이르러서 그 역할과 비중이 커진 마산도 만날 수 있다. 산업화 시기 마산에서 생산되던 수출품들도 눈길이 가지만, 그보다 더 흥미로운 건 바로 씨름이다. 90년대 초반까지 온 국민을 열광케 했던 당대 최고의 스포츠 씨름. 그 인기의 원동력이었던 이만기와 강호동 등의 씨름 스타를 배출한 곳이 바로 마산이라는 사실을 이곳에서 새삼스럽게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남녀노소 모두에게 즐거움과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고 있는 창원시립마산박물관. 몇 년 후 창원시립박물관으로 새롭게 개관하게 되면 지금의 위상은 달라질 수밖에 없겠지만, 약 30년 동안 이어진 이곳의 상징성에는 어떤 변화도 없을 것이다. 마산이 여전히 경남 최고의 항구 도시라는 역사적 사실이 변함없듯 말이다.
오래된 것들의 새로운 풍경 속으로
마산 어시장
어항漁港이 있는 도시기에 어시장이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전국 어디에도 마산 어시장만큼 깊은 역사를 가진 곳은 없다. 마산 어시장은 조선시대 대동법 시행 이후 조창이 설치되면서 마산포를 중심으로 크게 번성했다. 동해의 원산과 서해의 강경을 잇는 거점이자 교역 중심지로서 기능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조선 후기에는 전국 15대 시장 중 하나로 성장할 정도로 그 규모가 커졌다고 한다. 봄이면 도다리와 미더덕, 여름이면 농어, 가을이면 전어와 고등어, 겨울이면 대구와 삼치 등 다양한 어종들이 입맛을 돋우고 있으니 마산에 도착하게 되면 반드시 한 번은 들르도록 하자. 어시장 인근에서 맛보는 싱싱한 해산물도 별미다.
문신미술관
경남뿐 아니라 대한민국을 대표하던 미술가 문신은, 광부 출신인 조선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규슈에서 출생한 후 마산에서 성장한 문신은, 이후 일본으로 밀항해 일본에서 미술학교를 다니기도 했으며 1961년에는 40살의 나이에 단돈 50달러만 갖고 프랑스로 건너가 오래된 성을 수리하는 일을 맡기도 했다. 이때를 계기로 회화에서 조각으로 방향을 전환한 문신은 국내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각광 받는 다양한 조각품들을 남겼다. 1995년 5월 24일 세상을 떠난 그에게 대한민국 정부의 금관문화훈장과 프랑스 정부의 오피시에 예술문학기사 훈장이 추서된 것도 이와 같은 이유 때문. 창원시립마산박물관과 바로 이웃하고 있는 문신미술관은, 작가가 생전에 직접 구상과 제작, 실제 작업에도 참여한 의미 깊은 곳이다.
굿데이뮤지엄
유서 깊은 마산의 토종기업 무학에서 운영하고 있는 술 박물관. 무학은 1929년 창업한, 약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주류회사다. 대표 제품인 ‘좋은데이’의 이름을 따 굿데이뮤지엄을 운영하기 시작한 것은 2015년 7월부터였다. 인류 역사와 함께해 온 술을 통해 지역과 사람들의 문화와 전통을 한눈에 돌아볼 수 있도록 꾸몄는데, 세계 각국에서 수집한 약 3천 종의 술이 전시돼 있다고 한다. 전시 공간도 트렌디하게 구성돼 있어 데이트 코스로도 좋은 평을 받고 있다. 물론 이곳을 쉽게 떠나지 못하는 이들은 전시품을 온몸으로 느끼고 싶어 하는 주당들이겠지만 말이다.
미니인터뷰
내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는 공간, 창원시립마산박물관으로 오세요
-임태경(창원시립마산박물관 학예연구사)
창원시립마산박물관은 항구·군사·예술·산업 도시로서의 마산을 기억하기 위한 콘텐츠를 발굴해 전시하고 있습니다. 2020년에는 가야 최대 고분군인 마산 현동에서 출토된 1만여 점 이상의 유물을 중심으로 한 ‘가야의 또 다른 항구, 현동’ 특별전을 개최한 바 있으며, 2021년에는 마산박물관 개관 20주년을 맞이해 지방자치단체 최초로 씨름을 주제로 한 ‘모래판 위의 거인, 천하장사’ 특별전을 개최해 전국의 씨름인들과 시민들의 긍지와 자부심을 높이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지요. 그리고 바로 그 ‘씨름’ 전시를 통해 국립민속박물관과 인연을 맺게 됐습니다.
민속생활사박물관 협력망에 가입 후 2022년 찾아가는 어린이박물관 협력기관으로 선정됐는데, 덕분에 상호 교류 및 협력 체계를 구축하고 지역 어린이 대상 문화 향유 기회를 확대할 수 있었습니다. 관내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대상으로, 세계인형을 주제로 한 ‘신기한 마법의 방’ 전시와 ‘나만의 걱정 인형 만들기’ 프로그램을 통해 세계 여러 나라의 문화를 체험하고 아이들의 고민에 대해 소통할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지요. 평소 쉽게 접할 수 없는 다양한 구성으로 아이들은 물론 기관 관계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우리 박물관은 규모가 큰 박물관은 아닙니다. 하지만, 교과서를 통해 배울 수 없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자, 그 속에서 살아온 지역민들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곳으로 자리 잡기 위해 지금도 애쓰고 있습니다. 더 많은 분이 우리 박물관을 통해 마산에서 나고 자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정서적 뿌리를 찾음으로써 깊은 애향심을 갖는 데에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글 | 정환정_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