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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에서는 #1 | 호랑이 나라 전시디자인

호랑이 나라, 새로운 경험을 디자인하다

사람마다 한 해가 가고 새로이 시작됨을 느끼는 방식은 다르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일하는 필자의 경우, 매년 연말이면 어김없이 열리는 열두 띠 동물 전시이하 띠 전를 통해 새로운 해의 시작을 실감한다.

국립민속박물관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시그니처 전시, 열두 띠 동물 특별전
새해가 되면 여러 박물관에서 크고 작은 띠 동물 전시를 개최하지만 국립민속박물관의 띠 전은 단연 독보적인 시그니처signature 전시로 관람객들의 꾸준한 사랑과 관심을 받고 있다. 올해는 호랑이의 해이다. 2022 임인년壬寅年 호랑이띠 해를 맞이하여 기획된 특별전 《호랑이 나라》는 1999 기묘년己卯年 토끼띠 해를 맞이하여 개최한 《토끼, 달에서 21세기로》 특별전 이후 24번째로 열리는 띠 전시이다. 열두 띠를 두 바퀴나 돌아 이어온 전시인 만큼, 자칫 익숙해 보일 수 있는 관련 소장품과 전시 자료들로 큰 변화를 꾀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디자이너로서 관람객에게 보다 신선하고 새로운 경험을 낳을 수 있도록 그동안 열렸던 전시와 다른, 특히 12년 전의 호랑이띠 전시와는 차별화된 디자인적 전략이 필요하였다.

아이덴티티의 시작, 현대적 감각의 일러스트 디자인
차별화를 위한 첫 단계는 전시 아이덴티티identity를 만드는 것이었다. 전시 아이덴티티는 전시장 내·외의 전시 주제와 정보를 지속적으로 관람객에게 인지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공간에 놓인 각기 다른 요소가 동시다발적으로 보여지는 상황에서 동일한 공간의 뉘앙스를 전달하여 전시의 통일감을 유도한다. 특히 2차원타이포그래피, 색채, 그래픽, 패턴 등과 3차원유물, 진열장, 공간구조, 영상 등이 공존하는 박물관 전시디자인에서 이를 하나로 묶어 줄 수 있는 아이덴티티의 역할은 너무나 중요하다. 무엇보다 이 시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호랑이의 이미지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영국을 주 무대로 작업하던 고준호 일러스트레이터와의 협업은 이를 충족시키기에 최선의 선택이었다. 오랜 외국 생활로 품고 있던 한국성에 대한 관심을 그만의 독창적인 방식으로 작품 속에 표현하는 작가는 필자의 고민과 방향에 적극 호응해주었다. 실제 MZ세대이기도 한 그는 유물이나 회화 속의 다양한 호랑이 모습을 참고하면서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하였으며 끊임없이 수정 보완하는 과정을 거쳤다. 뿐만 아니라 호랑이의 생태학적인 특징도 놓치지 않고자 애썼다. 그리하여 우리가 흔히 아는 황갈색 바탕의 검은 줄무늬 호랑이가 아닌 붉은색이나 보라색 등 다채로운 색상을 지닌 현대적 감각의 호랑이가 탄생하게 되었다. 동시에 이와 조응하는 《호랑이 나라》 전시 타이틀의 타이포그래피도 필요했다. 힘이 느껴지면서도 위트가 보이는 국문 서체는 호랑이의 가장 큰 특징인 검은 줄무늬에서 모티브를 얻어 가로획의 반복적인 레이어layer가 보여지도록 디자인하였다. 이렇게 새롭게 만들어진 호랑이 일러스트와 타이포그래피의 조합은 이번 전시 아이덴티티 확립의 시작이었으며, 다양한 레이아웃과 컬러링의 시도를 거쳐 검은 바탕에 강렬한 기운을 뿜는 호랑이가 앉아 있는 모습으로 최종 완성되었다.

 

‘첩첩산중’을 표현한 전시 공간디자인
“우리나라는 국토의 70%가 산으로 이루어진 산악국으로 일찍부터 호랑이가 많이 서식하여 ‘호랑이의 나라’라고 일컬어지기도 했다”는 문구를 보고 이번 전시 공간디자인의 컨셉은 ‘첩첩산중疊疊山中’으로 잡았다. 그러고 보니 호랑이의 검은 줄무늬마저 겹겹이 쌓인 산 능선처럼 느껴졌다. 본격적으로 콘셉트를 시각화하고 이를 공간화하였는데 평면은 크게 레이어로 표현한 3개의 사선 구조와 그 사이를 연결한 면적인 구조의 결합으로 단순하게 설계하였다. 그러면서도 첩첩산중의 느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아이디어를 내었다. 먼저 전면에는 다양한 형태와 높낮이로 산 능선을 표현한 벽체를 중첩하여 레이어를 강조하고자 했으며, 측면사이 공간은 원목 각재를 루버louver형으로 마감하여 좁은 공간에 개방감 및 리듬감을 주고자 하였다. 또한 색상과 소재 마감의 변화로도 공간에 다채로운 씬scene을 연출하였다. 특히 검정 도트dot로 이루어진 구불구불한 줄무늬 그래픽 패턴을 개발하고 이를 인쇄하여 새롭게 만든 합판 소재는 그 자체로 첩첩산중의 레이어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전시 아이덴티티로 읽히게 해주었다. 비록 좁고 작은 전시실이지만 주제를 돋보이게 하는 전시 공간을 연출함으로써 전시실 자체가 스토리의 일부가 되었다. 관람객들은 마치 산속을 누비며 유물 속 다양한 호랑이를 만나보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판 호랑이 산신이 사는 ‘호랑이 나라’ 미디어아트
구조물을 통해 공간 속 물리적인 ‘첩첩산중’은 표현하였지만, 시각적·공간적 깊이감을 최대한 표현하고 싶었다. 이를 위해 전시실 입구 맞은 편의 가로 14.5m 세로 3.7m 벽면을 가득 채우는 미디어아트 영상을 기획하였다. 필자는 현대판 호랑이 산신이 사는 ‘호랑이 나라’를 상상하며, 무섭고 사납기보다는 산신도에서 묘사되듯 점잖고 친근하게, 그렇지만 강인하고 사려 깊은 모습의 호랑이를 표현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디자인 방향에 맞춰 고준호 일러스트레이터의 섬세함과 다채로운 색감, 영상팀의 적절한 모션motion이 시너지 효과를 내며 보다 세련된 감각으로 구현되었다. 눈이 살살 내리는 어느 겨울날,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 저마다 편안한 자세로 오후를 나고 있는 호랑이, 그들의 나른한 움직임과 낮고 웅장한 음악이 어우러져 신비로운 무드mood를 만들며 공간을 한층 매력적으로 끌어 올렸다. 실제로 전시 공간 전체에 충만한 호랑이 기운이 전해지는 듯하다. 관람객들은 미디어아트 속 호랑이의 모습과 유물 속 호랑이의 모습을 비교해 가며 저마다의 방식으로 느끼고 즐기는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

새로운 경험과 감흥을 주는 전시디자인의 힘
박물관 전시디자인의 경우 다양한 어플리케이션application이 동시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일관된 아이덴티티를 적용하는데 어려움이 많다. 하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전시 제목과 콘셉트를 토대로 유니크unique한 디자인 방향을 결정할 수 있었으며 이를 유기적으로 다양한 매체에 녹여내어 전시 전체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었다. 이를 통해 타 기관이나 12년 전의 호랑이띠 전시와는 분명히 차별화된 개성적이고 새로운 감흥을 주는 전시가 되었으며, 같은 전시 주제, 같은 전시 공간일지라도 디자인에 따라 우리의 경험과 즐거움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12년 후의 호랑이띠 전시는 또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지금과는 또 다른 어떤 매력으로 관람객과 마주할 수 있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글 | 유민지_전시운영과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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