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남근우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남창 손진태孫晉泰, 1900~?는 1920년대 중반 무렵부터 사라져가는 조선의 ‘민속folklore’을 체계적으로 조사 연구함으로써 우리나라 민속학을 근대 학문으로 정초한 인물이다. 그리고 광복 후에는 신민족주의 사관을 주창해 민족사 연구의 성과들을 집성하고 교육 관료로서 신민족주의 교육 정책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의 학문과 사상은 현재까지도 민속학을 비롯한 역사학, 구비문학 등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고 있어 주목된다.

남창 손진태(고려대학교 박물관)
수학 과정과 연구 활동
낙동강 하구 반농반어의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난 손진태는 다섯 살 때 해일로 어머니를 여의고 구포의 작은 아버지 댁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곳 구명소학교에서 신학문을 접한 그는 1921년 경성의 중동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그리고 와세다대학 부설의 고등학원에 입학해 근대 학문의 기초를 학습하는 한편 문예활동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1923년에 창립된 색동회와 금성의 동인으로 활약하며 『어린이』, 『금성』 등에 ‘역사 동화’를 비롯한 창작시, 번역시를 적잖이 발표한다.
1924년 와세다대학 문학부 사학과에 진학한 손진태는 1927년 졸업할 때까지 역사학과 함께 민속학, 인류학을 본격적으로 수학한다. 그리고 방학 때마다 조선의 농·산촌으로 민속 조사차 ‘연구 여행’에 나선다. 아울러 세계 굴지의 동양학 도서관인 동양문고를 자주 드나들며 조선의 ‘민풍토속民風土俗’에 관한 동양의 각종 문헌 사료들을 수집, 정리하고 그 분석, 고찰에 필요한 서양의 전문 서적들을 열독한다. 이와 같은 동서양의 문헌 섭렵과 현지 조사로 자료화한 민속 사상事象들을 바탕으로 조선민족의 형성과 조선문화의 기초 구성, 이 표리일체의 두 연구 과제를 왕성히 탐구한다. 부연하면, 당절當節의 이른바 혼합민족설에 기초해 조선 상고문화上古文化의 기원과 계통 및 변천 과정을 천착하고 그 성과들을 경성의 종합 잡지에 잇달아 발표한다. 이를테면 『신민』과 『동광』에 기고한 일련의 조선 상고문화론이나 『신민』 지상에 15회 연재한 조선 민간설화의 ‘문화사적 고찰’과 같은 성과이다.
와세다대학 사학과를 졸업한 손진태는 1934년 봄 귀향할 때까지 동양문고를 거점으로 일본에서의 학술 활동을 본격화한다.
그 주요 학술장의 하나가 1929년에 출범한 일본의 ‘민속학회’와 그 기관지 『민속학』이다. 이 전문 학술지는 제1권 제1호(1929년 7월)부터 제5권 제12호(1933년 12월)까지 매월 발간된다. 그것들을 일별一瞥하면 손진태의 이름과 저술 및 관련 기사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특히 제2권 제4호(1930년 4월)에 첫 논문이 게재되고 제12호에 두 신간 저서(『조선신가유편』과 『조선민담집』)가 소개된 이후 출현 빈도가 급증한다.
일본 민속학계에서 ‘조선민속학’의 전문가로서 그의 학문적 위상이 우뚝 서게 된 것이다. 급기야 1933년의 제5권에 이르러서는 그의 독무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거의 각 호마다 참신한 논고와 유의미한 자료ㆍ보고의 글들을 발표하며 맹활약을 펼친다. 그리고 이듬해 1934년 2월 손진태는 동양문고 사서직을 내려놓고, 약 13년에 이르는 동경 생활을 정리하고 조선으로 돌아온다.

1926년 4월 동경에서 색동회 회원들과 함께(뒷줄 오른쪽부터 손진태, 정인섭, 마해송 그리고 앞줄 오른쪽부터 진장섭, 조재호)
남창 손진태(고려대학교 박물관) [역사민속학회 편, 남창 손진태의 역사민속학연구(2003)]
조선민속학회, 진단학회 창립과 그 활동
1932년 4월 중순에 일본의 ‘민속학회’를 레퍼런스로 조선민속학회가 창립되고, 앞에서 언급한 『민속학』을 벤치마킹해 이듬해 정월 『조선민속』 창간호가 발간된다.
특히 동경 현지에서 일본 ‘민속학회’의 창립 회원이자 주요 기고가로서 그 결성과 이후의 제반 활동을 줄곧 지켜본 손진태의 경우, 조선민속학회의 출범 과정에서 사계를 대표하는 제일의 전문가로서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었겠다.
적어도 조선민속학회 출범 초기, 구체적으로 그 발기 모임부터 기관지 『조선민속』 제2호가 발간된 1934년까진 손진태가 학회 활동의 중심이었다. 회칙 제3조가 명시하듯이 학회 창립의 취지와 목적을 이루려면 무엇보다 으뜸 사업으로 기관지 발간이 중요하며, 그 내실은 성실한 자료 보고와 수준 높은 학술 논문 기고에 있기 때문이다.
창간호와 제2호를 살펴보건대, ‘조선민속’에 관한 자료 보고와 논문 기고의 학술적인 면에서 손진태가 중심에 서 있다.
물론 학회의 편집 간사로서 회무를 ‘집담執擔’하며 재정을 도맡다시피 한 송석하의 역할 또한 필요불가결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겠다.

조선민족문화의 연구 표지
손진태는 조선민속학회 창립뿐만 아니라 진단학회의 설립과 운영에도 힘을 쏟는다. 1934년 이른 봄 조선에 돌아와 연희전문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한 그는 다음 학기부터 보성전문학교 도서관 사서로 근무하며 문명사를 강의한다. 그리고 1937년에 전임강사로 임용되어 도서관장을 맡는다. 그사이 진단학회가 1934년 5월 7일에 창립되고 손진태는 김태준, 이병도, 이윤재, 이희승, 조윤제와 함께 ‘상무위원’으로 선임되어 학회의 핵심 성원으로서 줄곧 회무를 관장한다. 이윽고 그해 11월 28일 기관지 『진단학보』가 창간된다. 흥미롭게도 그 창간호에는 손진태와 송석하가 동시에 논문을 기고하는바, 곧 「조선 고대 산신의 성性에 대하여」와 「풍신고風神考: 부附 화간고禾竿考」이다.
이후에도 양자는 주옥같은 민속학 논고를 『진단학보』에 여러 편 발표하거니와, 앞의 『조선민속』이 제2호 발행 후 장기 휴간에 들어간 배경이나 요인을 다음 두 가지에서 찾을 수 있겠다.
하나는 ‘조선민속학’의 연구자가 태부족한 탓에 원고 자체가 모이기 어려운 불가피한 상황이고, 또 하나는 조선 및 인근 문화 연구를 목적으로 한 『진단학보』가 그 기능적 대체의 구실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계간지를 지향한 『진단학보』는 사실상 당시의 조선민속학회의 『조선민속』과 조선어문학회의 『조선어문』을 통합한 종합학술지였다는 조윤제의 진술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광복 후의 저서와 사상
손진태는 광복 직후 경성대학 사학과를 거쳐 1946년 서울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임용된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문교부 차관 겸 편수국장을 맡는다. 이듬해 1949년에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장, 1950년에 사범대 학장을 각각 역임한다. 그리고 한국전쟁 중에 납북되어 이후의 행적은 명확하지 않다. 이처럼 해방공간의 공사다망한 일과에도 불구하고 손진태는 여러 권의 단행본을 상재上梓한다. 예컨대 『조선민족설화의 연구』(1947)와 『조선민족문화의 연구』(1948), 그리고 『조선민족사개론(상)』(1948), 『국사대요』(1949) 등이다. 앞의 두 책은 일제강점기에 발표한 민속학 논고들을 매만져 집성한 것이고, 뒤의 두 책은 신민족주의 사관으로 우리 민족사를 개설하고 국사의 대강령을 논술한 것이다. 그중에서 톺아볼 것은 손진태 민속학의 금자탑으로 평가되는 『조선민족문화의 연구』이다. 구성을 보면, 서문에 이어 본문은 사회편과 종교편으로 나뉜다. 전자는 주로 전통 사회의 풍속 습관을 고찰한 7편의 논문으로 짜인다. 즉 고인돌을 비롯해 고대의 민가 형식, 온돌, 데릴사위 혼속, 과부 약탈혼, 석전石戰의 기원과 계통 및 변천, 그리고 감자의 전파 과정을 차례대로 천착한 글이다. 다음 후자에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민간신앙을 각각 거론하거나 비교한 논문, 혹은 우리 민간신앙의 기원과 변천을 몽골과 만주 등지의 북방지역과 관련지어 고찰한 논문이 11편 실린다. 가령 ‘선왕당[累石壇]’을 필두로 솟대, 장승, 산신, 복화무腹話巫, 맹격盲覡, 광명 신앙과 태양숭배, 그리고 중국의 웅계雄鷄 신앙, 혼에 관한 신앙과 학설 등을 분석한 글이다. 목차 뒤에는 관련 사진들이 22면이나 제시되어 1920, 30년대의 풍속 습관과 민간신앙의 일단을 이해하는 데 유익하다. 또 본문 뒤에는 관련 정보를 제공한 ‘담화자’의 이름과 출신 색인, 인용한 서책 색인, 그리고 내용 색인을 덧붙여 학술서로서 충실을 기하고 있다.
식민지 조선의 민속자료와 문헌 사료들을 연계해 한민족의 형성과 민족문화의 기초 구성을 천착한 이 책은 일제강점기 손진태가 추구한 ‘조선민속학’의 결정체로 주목을 요한다. 또한 본문에 수록된 18편의 논문은 관련 연구 분야나 주제의 초석으로서 아직도 영향력을 유지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와 함께 특기할 것은 서문이다. 들머리에서 ‘민속학은 민족문화를 연구하는 과학’이라고 정언적定言的 명제를 제시하고 그 명칭을 ‘민족문화학’으로 바꿔 부르고 싶다고 역설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미에선 이 책에 수록한 주요한 18편의 원본을 동학들에게 보지 말라고 당부한다.
자신의 방법론에 상당한 변화가 있어 과거의 논문들은 전면적으로 일단 폐기하려는 의도라고 그 까닭을 밝히기도 한다. 이러한 ‘민족문화학’으로의 개칭 바람과 방법론의 변화에 가탁한 과거 논문의 첨삭과 보정, 그리고 그와 연동하는 신민족주의의 자기현시적인 주창과 그 정치성에 관해서는 일찍이 민속학계에서 비판적인 연구 성과가 제시됐다.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종래의 손진태 연구에서 반反 식민주의 사관으로 우상화한 신민족주의를 상대화하고, 해방 후 그 세례로 거듭난 ‘민족문화학’의 정치성을 해체한 내용이다.덧붙여, 손진태를 둘러싼 사상적 쟁점은 위의 두 개설서에서 강조된 신민족주의의 정치성으로 수렴되는데, 그 요점은 다음의 두 가지이다. 즉 반 식민주의 사관으로서의 신민족주의와 해방공간의 중도적 정치 이념으로서 신민족주의, 이 양자의 당부가 핵심적인 논점이다. 종래의 손진태 연구에서 일반화한 이 두 가지 통설에 대해선 실증적인 고찰로 몇 가지 이견이제기된 바 있다. 1920, 30년대에 펼쳐진 손진태의 민족문화론을 일제 만선사학과의 관계 속에서 재고함으로써 타율사관을 추수해 버린 그의 부끄러운 과거가 광복 후 신민족주의에 기초한 ‘민족문화학’에서 어찌 조만동조론朝滿同朝論으로 소거되는지를 천착한 성과, 그리고 신민족주의를 좌우합작 계열이 아닌 정통 우파나 극우적 정치 이데올로기로 새로이 자리매김한 성과 등이다. 이 비판적 성과들을 수렴해 금후 손진태의 학문과 사상에 관한 체계적, 종합적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강화 전등사 대웅보전 앞에서 찍은 단체사진(고려대학교 박물관)


강화도 고인돌 답사(고려대학교 박물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