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학 연구자

우리나라 민속학 기틀 마련에 앞장선
민속학자 故장주근 교수

故장주근 교수는 한국 민속학의 체계를 정립하고, 그 학문적 위상을 높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의 연구는 단순히 과거의 전통을 기록하는 것을 넘어, 한국인의 정체성과 문화적 유산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오늘날 민속학이 다양한 방식으로 발전하고 있는 가운데, 장주근 교수가 남긴 연구 유산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계승되고 발전해야 할 소중한 자산임에 틀림없다. 그의 학문적 열정과 노고를 기리며, 우리가 그의 연구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점들을 다시금 되새겨야 할 것이다.

학문적 여정의 시작

한국 민속학의 발전에 큰 획을 그은 장주근(張籌根, 1925~2016) 교수는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나 대한민국 민속학의 체계를 정립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학자다. 그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한 후, 일본 도쿄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장주근 교수가 박사학위를 받았을 당시 한국에서는 민속학이 독립된 학문으로 자리 잡지 못한 상황이었으며, 국문학이나 역사학의 하위 분야로 접근하던 시기였다. 장 교수는 이러한 흐름 속에서 민속학을 독자적인 연구 분야로 발전시키고자 했으며, 일본에서 학문적 기초를 다진 후 본격적으로 한국 민속학 연구에 매진했다.

그는 문화인류학회의 창립 및 상임 문화재전문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무속 및 민간신앙, 세시풍속 등 민속문화 전반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진행했다. 초기 민속학의 기초를 수립했던 송석하, 손진태의 뒤를 이어 오늘날 한국 민속학이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장주근 교수는 현장에서 직접 민속문화를 조사하고 이를 토대로 연구함으로써 일반인이 민속문화의 소중함을 공감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도 주목받았다.

한국 민속학의 기틀을 다지다

장주근 교수는 1966년부터 1975년까지 국립민속박물관의 전신인 한국민속관 관장으로 재직하며, 체계적인 민속 자료 수집과 연구를 주도했다. 이 시기에 장 교수는 한국의 전통 문화와 민속이 단순한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한 사회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임을 강조하며, 방대한 자료를 조사하고 기록하는 데 힘썼다. 또한 전국 각지를 직접 방문하여 구술 조사와 현장 연구를 수행하며 한국 민속학의 기초 자료를 구축했다.

국립민속박물관의 전신인 한국민속관 개관 논의가 시작된 것은 1960년대 초부터였다. 장주근 교수는 2003년 한국민속학회와 국립민속박물관이 공동 주최한 학술세미나에서 한국민속관 개관 당시를 회고했다. “그 시기부터 경제부흥을 먼저 이룬 일본 관광객이 입국하고, 1962년에는 관광공사가 생겼습니다. 드디어 1966년도에 문화재관리국이 민속박물관을 만들기 위해 민속학자 한 사람을 영입키로 했는데, 제가 1966년 2월 1일부터 그 일을 맡아 시작했습니다. 8개월간 준비해 10월 3일 개천절에 개관함으로써 현재 국립민속박물관의 발판이 마련됐습니다.”라며 자신이 한국민속관 개관 업무를 맡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삼척 신남리 해랑당 앞 장주근(1974년)

송당 맨심방 고봉선 옹과 장주근(1956년)

이 시기 장주근 교수와 관련한 에피소드로는 우리나라 박물관 역사상 최초로 전시실에 마네킹을 도입한 이야기가 유명하다. 이제 막 40대에 접어든 젊은 학자 장주근에게 한국민속관 개관이라는 중요한 임무가 주어졌다. 민속의 가치를 알아주는 것 같아 반가웠으나 박물관의 ‘박’자도 제대로 몰랐던 그는 정신이 아뜩해졌다. 게다가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겨우 8개월에 불과했다.

제주도의 전통 일 옷인 갈옷도, 일상에서 쓰였던 디딜방아도 전시해 놓았지만, 전혀 생동감을 느낄 수 없었다. 스웨덴 북구박물관(세계 최초의 민속박물관)의 팸플릿을 들추다가 마네킹이 떠올랐다. 당시 박물관 유물은 진열장 안에 기품 있게 전시하는 것으로 인식되었지만 장주근 교수는 생동감 있는 전시를 위해서 ‘품위 손상’에 대한 비난을 감수하기로 했다.

수소문 끝에 서울 신세계백화점 쇼윈도 진열대에서 사용하던 마네킹을 가져왔으나 우리나라 민속 전시물과 어울리지 않게 팔다리가 너무 긴 서구형 마네킹이었다. 장 교수는 기술자와 함께 며칠간 팔다리와 키를 줄이고 얼굴도 둥그스름하게 바꾼 새 마네킹을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전시장 안의 안방 부인, 사랑방 선비, 베 짜는 부인, 디딜방아 찧는 부인, 대패랭이를 쓰고 갈옷 입은 제주도 농부, 해녀가 태어났다. 한국 박물관에 마네킹이 처음 등장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한국민속관(1966~1975년) 전시 배치도, 경복궁 안의 수정전(구 집현전)

한국민속박물관(1975년~1993년) 전경(경복궁내 구 현대미술관 건물)

힘들고 어려웠던 박물관 사업과 조사사업

장주근 교수는 박물관 개관 사업과 더불어 민속조사 사업을 동시에 추진했다. 한국민속관을 악전고투 속에 개관한 후 국가적으로 민속을 연구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다고 생각하고, 전국민속종합조사사업에 착수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동안 총독부에서 40여 권의 구관조사라는 방대한 조사를 하였는데, 해방 후에는 제대로 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 민속문화는 급속한 서구화로 인해 그야말로 소멸일로에 있었다. 그러한 위기감이 장주근 교수의 민속조사 사업의 명분이 됐다. 장 교수는 우선 호남, 영남, 제주, 강원, 중부 다섯 지역을 5개년 계획으로 조사하고, 사진 자료와 녹음 자료를 수합하면 민속기록 보존소가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이상적인 꿈을 꾸었고 이광규, 최길성 선생의 도움을 받아 기획안을 보완, 수정한 후에 문교부와 문화재위원회에 제출함으로써 전국민속종합조사사업이 시작됐다.

장주근 교수는 1975년 국립민속박물관의 개관을 주도하며 한국 민속학 연구의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개관 이후 한국 민속문화를 체계적으로 연구·보존하고, 전시를 통해 대중과 소통하는 중요한 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온 힘을 다해 문을 연 한국민속관은 국립민속박물관으로 이름을 바꾸어 현재 대한민국의 대표 박물관으로 성장했다.

민속학에서 본 기우제 학술강연 발표 모습(1994년)

장주근 교수의 저서 『한국신화의 민속학적 연구』, 『한국의 향토신앙』

민속학 대중화를 이끈 연구 실적

장주근 교수는 한국민속박물관 개관 이후 경기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서 후학 양성과 민속학 발전을 이끌었다. 장 교수의 연구는 한국 신화, 향토신앙, 민속 의례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른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한국의 신화』, 『한국의 향토신앙』, 『한국의 세시풍속』 등이 있으며, 이들 저서는 한국 민속학 연구의 교재로 자리 잡았다. 그는 한국의 신화와 전설, 무속 신앙이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 한국인의 사상과 가치관을 반영하는 중요한 요소임을 밝히며, 학문적 분석을 통해 이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특히 『한국의 신화』는 한국 신화 연구의 기초를 다진 명저로 평가받는다. 그는 한국 신화가 단순한 이야기 구조를 넘어 사회적 맥락과 결부된 신앙 체계임을 강조하며, 이를 비교 신화학적 관점에서 분석했다. 또한, 『한국의 향토신앙』에서는 지역별 전통 신앙과 민속의 차이를 세밀하게 기록하고, 전통 신앙이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연구했다.

장주근 교수는 연구뿐만 아니라 교육에도 큰 힘을 기울였다. 경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많은 제자를 길러냈으며, 경기대학교 박물관장과 문화재위원 등을 역임하며 학문적 성과를 대중화하고 보급하는 데에도 힘썼다. 그의 교육 철학은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니라, 학생들이 현장 연구를 통해 직접 체험하고 연구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었다.

이를 위해 그는 제자들과 함께 전국 각지를 돌며 민속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현장 연구를 지속했다. 장주근 교수의 연구는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는 민속학이 단순한 학문적 연구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현대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연구되고 재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그의 연구는 현재 문화재 보존과 전통문화 계승 정책 수립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민속학이 사회학, 인류학, 역사학 등 다양한 학문과 융합하여 발전하는 데 기여했다.

장주근 교수는 2016년 6월 8일, 향년 9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연구와 업적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저서들은 여전히 연구자들과 학생들에게 중요한 참고 자료로 활용되고 있으며, 연구 방법론과 학문적 태도는 한국 민속학 발전의 토대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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