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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온 길·걸어갈 길

전국 공・사립 민속박물관과의
교류 및 협력망으로
지속가능한 발전을 함께 이뤄야

너도나도 멀티플레이어가 되어야 한다고 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의 주장이 여전히 꽤 설득력이 있는 지금, 허준박물관의 김쾌정 관장은 조금 특별한 인물이다. 대학 시절부터 70세가 훌쩍 넘은 지금까지 평생을 오직 박물관의, 박물관에 의한, 박물관을 위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지금도 여전히 지역사회의 중심이 되는 박물관장이자 한국박물관학회 고문으로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를 만나 한국민속박물관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이야기를 나눠 보았다.

사학도에서 학예사로 그리고 관장으로
김쾌정 관장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부지런한 사람이다. 출근 시간은 오전 9시지만 자택이 있는 송파구에서 출발해 강서구에 있는 허준박물관에 도착하는 시간은 오전 7시. 바로 옆에 있는 주민센터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고 샤워를 마친 뒤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이 같은 건강 챙기기는 그가 5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한 우물을 팔 수 있었던 주요 동력이 되었을 터, 그렇다면 그는 처음에 어떤 이유, 어떤 인연으로 평생을 박물관에 몸담게 된 것일까? 질문을 던지자 그가 미소를 짓는다.
“제가 고려대 사학과에 재수를 해서 입학했습니다. 들어갔더니 절친이 산악부에 들어가 활동을 하고 있더라고요. 그 친구의 적극적인 권유로 저도 산악부 동아리에 가입해 자주 산에 올랐는데 당시 고려대 교직원 산악회 모임에서 활동하고 계셨던 고려대박물관의 윤세영 과장님을 만나게 됐어요. 그때부터 박물관에서 자잘한 심부름도 하고 암사동 선사 유적발굴에도 참여하는 등 박물관 일을 시작했습니다.”
유적지에서 발굴된 수백 년 된 미라의 옷을 빨기도 하고, 행사 때 박물관에서 안내요원 역할을 하는 등 박물관에서 바지런히 일했던 그 시간들을 두고 김쾌정 관장은 “즐거웠다. 그렇지 않았으면 이 일을 계속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졸업 후 ROTC 장교로 임관, 육군제3사관학교에서 초대 국사교관으로 2년 역임한 그는 이때 학생들을 가르치며 국사 공부를 다시금 진지하게 했고 이를 기반으로 한독의약박물관에 학예직원으로 입사하는 데 성공했다. 우연인 듯, 인연인 듯했던 시간들이 겹치고 겹쳐 만들어 낸 본격적인 박물관 인생의 시작이었다.

한국박물관협회 그리고 민속박물관과의 인연
우리나라 최초 기업이 운영하는 전문박물관 1호였던 한독의약박물관에서 김쾌정 관장의 성실함과 부지런함은 변함없이 빛을 발했다. 입사 후 1년간 박물관 재개관 준비를 위해 헌신했고 그 와중에 공부에 대한 욕심으로 회사에서 지원을 받으며 대학원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고서점, 고미술품점, 기증 등으로 모은 수많은 자료 중 무려 6점을 국가 보물로 지정받은 이력도 그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다. 30대 초반에 이미 관장 역할을 할 정도로 인정을 받았던 그는 대외 활동도 활발했다. 친목 모임에 가까웠던 한국박물관협회에 정관과 규칙을 만들고 종내에는 별도로 존재했던 대학박물관협회까지 통합하는 데 일조해 한국박물관협회의 위상을 높인 것도 김쾌정 관장의 업력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잊지 못할 일이다. 박물관에서 평생을 일해온 그에게 국립민속박물관과의 인연은 당연히 잊지 못할 소중하고 의미 있는 것이었다.
“국립민속박물관과의 최초의 인연은 초대 관장이셨던 맹인재 관장님이 우리 박물관협회 회원으로 들어오면서 시작됐어요. 그분이 회원으로 들어오면서 민속박물관에서 회의도 하고 전시도 관람하면서 자주 오고 갔지요. 당시 제가 가장 인상적으로 봤던 유물은 향원정 뒤에 자리 잡고 있었을 당시 그 입구를 지키고 서 있었던 제주 돌하루방이었습니다. 마을 입구에 세워서 마을의 안녕과 잡귀, 역귀 등을 막아주던 지킴이, 수호신 역할을 하던, 2m가 넘었던 거대했던 돌하루방은 지금도 제게 가장 기억에 남는 유물이지요.”
김쾌정 관장은 오랜 시간 대한민국 박물관 역사와 그 궤를 함께해 온 국립민속박물관을 무척이나 특별하게 여겼는데 보통의 국립박물관들의 소장품이나 전시품이 고미술 작품, 구석기·신석기 유물 같이 경직화된 것들이 주를 이루는 데 반해 민속박물관의 소장품이나 전시품은 실제로 우리가 쓰고 만지고 할머니 집에서 봤던 것들이라 존재 자체가 친근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민속박물관은 관장이 바뀔 때마다 많은 변화를 했어요. 로비나 전시실도 많이 바뀌었지만 저는 특히 잘했다고 생각한 것은 최근 파주에 개방형 수장고, 수장고형 전시관을 개관한 것입니다. 국립박물관으로서 그건 매우 파격적인 시도였고 공무원들을 설득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새로운 전시개념을 도입한, 좋은 성공사례라고 봅니다. 또 개인적으로 2014년도 허준박물관과의 공동기획전으로 열었던 <약장-건강을 염원하다> 특별전도 꼽고 싶습니다. 호평도 많이 받았고 무엇보다 지역박물관과의 적극적인 소통과 협업이 인상 깊었어요.”

민속박물관과의 지역 민속박물관과의 협업을 기대
김쾌정 관장은 아쉬운 점도 이야기 했다. 1966년 경복궁 수정전을 민속박물관으로 개관했다가 1975년 국전 등을 전시하던 현대미술관을 개수하여 국립민속박물관으로 발족, 개관한 부분을 두고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974년 현재의 한국민속촌으로 국립민속박물관을 이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있었어요. 부지도 컸고 수도권이라는 위치적 이점도 있었고 민속촌을 찾는 관광객들까지 흡수할 수 있었는데 이 기회를 살리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안타깝습니다. 궁궐은 일단 너무 공간이 협소하니까 원하는 걸 다 하는 게 불가능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쾌정 관장은 국립민속박물관의 행보를 기대하고 있다. 1955년에 생긴 한국민속학회, 1968년에 만들어진 민속학회가 2000년에 통폐합해 한국민속학회를 재창립, 국립민속박물관의 학술연구 분야에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매우 고무적으로 평가하고 또 민속박물관이 젊은 학예사들의 연구, 학술세미나, 국제학술심포지엄 등의 적극적인 참여를 독려함으로써 개인과 민속박물관의 발전을 동시에 도모하는 모습에서 밝은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전국 지역별로 언어, 풍습, 음식, 민요, 예술 등등 민속 분야에 차이점이 많으므로 10~20년 장기계획을 수립해 도별로 분관을 건립해야 할 것으로 봅니다. 또한 전국의 공·사립 민속박물관들과의 협력망을 구축해 활발한 자료 및 인적·물적 교류를 수행하는 것 또한 바람직하겠지요. 이외에도 글로벌시대에 맞는 국제교류 및 국제교류전, 미래 고객 확보차원에서 어린이민속박물관 컨텐츠의 다양한 개발 또한 지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학과 학생에서 학예사를 거쳐 관장에 오른 김쾌정 관장은 젊은 학예사들에 대해 유독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갖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모든 학예사의 꿈과 희망은 박물관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관장이라는 자리는 개인의 뛰어난 능력만으로는 올라갈 수 없는 자리예요. 전문적인 지식, 포용력, 참을성, 성실성, 끈기, 동료애 등 리더로서의 자질 함양에 부단히 노력해야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봅니다. 평소에도 학예사가 아닌, 주인의식으로 주변을 보세요. 관장의 입장과 시선, 관점에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 자리에 올라설 수 있지 않을까요? 아침에 출근하는데 관장이 잡초를 뽑고 있다면 함께 뽑는 것도 좋겠지요. 저건 학예사의 일이 아니다가 아니라 우리 박물관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너무 빠르게 변하고 잊혀지는 세상, 그래서 박물관의 역할과 책임이 점점 더 중요해진다고 말하는 김쾌정 관장의 표정에는 거의 전 생애를 박물관에 헌신해온 자의 의지와 애정이 넘칠 듯 충만해 보였다.


인터뷰이 | 김쾌정_허준박물관 관장
인터뷰·정리 | 이경희_프리랜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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