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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가면

시간과 사람 그리고 사연이 응축된 곳 거제

거제는 한반도에서 두 번째로 큰 섬. 그래서일까. 그곳에서 만나는 많은 것은 크고, 때론 거칠다. 자연적으로 발생한 풍경들은 물론이거니와 사람들이 만들어낸 구조물들 역시 마찬가지다. 한반도 중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남해안에 위치하고 있지만, 근현대에 접어들며 그 어느 곳보다 중요한 역사적 공간이 된 거제는 물리적 크기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거제, 건너거나 혹은 구하거나
거제巨濟. ‘크게 건넌다’라는 뜻을 지닌 이 지명은, 거제가 변한과 가야 시대 때부터 일본과 교역하던 항로였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크게 구한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어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당시 크고 작은 해전과 흥남철수작전을 완성시킨 중요한 지역이라는 뜻도 갖고 있다. 거기에 더해, 현재는 전 세계 바다를 누비는 다양한 선박과 플랜트가 태어나는 곳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거제는 복합적이다. 한없이 자연적이면서도 인간이 만들어낸 중후장대한 시설들이 원래 그랬던 것처럼 섬의 커다란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그 역사가 깊지만, 산업의 발전과 함께 그 어느 곳보다 새로운 구성원들이 많이 몰린 공간이기도 하다. 이러한 거제를 방문하는 이들이 가장 먼저 찾는 곳은, 관광명소인 바람의 언덕과 신선대다. 바람의 언덕과 신선대는 같은 주차장을 공유하고 있는 명소. 왕복 3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있기에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라는 마음으로 두 곳을 모두 둘러보게 되는 곳. 어느 쪽을 먼저 가든 크게 상관은 없지만, 주차장으로부터의 거리는 신선대 쪽이 더 가깝다. 신선들이 놀던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이름처럼, 바다를 향한 절벽이 절경을 이루고 있다. 절벽 아래에는 함목해변이 펼쳐져 있는데, 워낙 유명한 곳이다 보니 일반적인 해수욕장과 달리 사시사철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덕분에 신선대의 너른 바위까지 걸어가는 길은 상당히 잘 닦여 있는 편이다. 바람의 언덕은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 『폭풍의 언덕』을 연상시키는 곳이다. 실제 날이 흐릴 때 이곳의 풍속은, 바람보다는 폭풍에 더 가깝다. 그래서 바람의 언덕 한가운데에 있는 풍차는 그 국적이나 근본이 어찌 됐든 썩 잘 어울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아니, 어쩌면 그 생뚱맞은 모습이 거제 그 자체를 가장 선명하게 상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조선의 메카, 해양플랜트의 고향
거제의 가장 큰 산업은 조선이다. 1974년 삼성조선소현 삼성중공업가, 1981년 대우옥포조선소현 대우조선해양가 배를 짓기 시작하면서 거제에는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1971년 통영과 거제가 다리로 연결되면서 시작된 변화였다. 그리고 1995년 거제군은 거제시로 승격되었다. 군郡이라 하기에는 너무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던 탓이었다. 그런 거제가 조선의 메카로 본격적인 발돋움을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반. 전 세계적으로 조선 경기에 불이 붙기 시작하자 전국에서 많은 인력이 거제를 찾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안정적인 생활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시와 기업은 조선소와 가까운 곳에 기숙사를 겸하는 아파트들을 짓기 시작했고 각종 근린시설도 확충했다. 다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화의 속도는 빨랐다. 인구는 빠르게 증가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손은 모자랐다. 그래서 거제 사람들은, 온 나라가 IMF로 인해 허덕이던 때를 “밀려드는 수주로 인해 돈이 넘쳐나던 시기”로 기억하고 있기도 하다. 그 결과 2017년에는 거제 전체 인구가 약 25만 명에 달하기도 했는데, 그중 약 70%가 조선업에 종사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배, 그리고 흔히 시추선으로 부르는 해양플랜트들의 도시이자 고향인 셈이었다. 거제조선해양문화관에서는 거제가 갖고 있는 조선해양산업 메카로서의 위상을 조금이나마 체험할 수 있다.

 

유적이 된 비극, 포로수용소
한국전쟁 당시 거제에 설치된 포로수용소는 한반도의 비극을 상징하던 곳이었다. 최초의 포로수용소는 부산과 경북 여러 곳에 분산돼 있었지만,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성공과 함께 많은 수의 포로들이 발생해 같은 해 11월 27일, 현재의 거제 시청과 멀지 않은 곳에 360여만 평 규모의 포로수용소가 지어졌다. 이 시설 안에 가장 많은 인원이 수용됐을 때는 인민군 15만 명, 중공군 2만 명, 여자 포로와 의용군 3천 명 등 그 숫자가 17만 3천 명에 달했다고 한다. 여기에 원래의 거제 시민 10만 명, 피난민 15만 명까지 같은 시기 거제에 머물고 있었다. 그래서 한때 거제의 인구는 약 42만 명을 헤아릴 정도였다. 가장 부유할 때가 아닌, 가장 혼란스러웠을 때 인구의 최고점을 기록한 역설적인 역사의 공간이 바로 거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에서는 그때의 흔적과 기록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 흔치 않은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포로수용소를 둘러보고 나오면 의미 있는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장소가 있다.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함흥냉면전문점이 바로 그곳인데, “거제에서 무슨 냉면?”이라는 의문을 가질 이들을 단숨에 납득시킬 역사를 갖고 있다. 6·25전쟁 당시 흥남 철수 작전으로 거제에 내려온 이북 피난민들의 가장 급한 일은 호구지책을 찾는 것. 그리고 함흥 출신 중 냉면 기술을 갖고 있던 누군가가 거제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한 가게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거제에서 만날 수 있는 ‘원조 함흥냉면’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곳의 함흥냉면은 일반적인 비빔냉면과 조금 다르다. 양념장이 비벼 나오는 것도 그러하거니와 도시의 그것만큼 자극적이지도 않다. 그렇다 해서 맵기가 모자란 것은 아니다. 그 깔끔하고 선명한 칼칼함 덕분에, 넓은 섬을 오가느라 쌓인 피로도 금방 사라진다.

거제의 은밀한 자랑
거제는 모든 것이 크고 웅장한 섬이다. 앞서 소개한 신선대와 바람의 언덕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그렇고 축구장 몇 개를 이어붙인 크기의 배를 짓는 조선소들이 그렇다. 하지만 은밀하고 아담하게 진행되던 일들도 있다. 농사, 그중에서도 특히 과일 농사들이 그렇다. 한때 거제가 국산 파인애플의 대표적인 산지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들은 몇이나 될까. 그랬다. 국산 파인애플이라는 게 생산되던 때가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이였다. 열대과일 국산화의 출발이 거의 그렇듯, 파인애플 역시 제주에서 시작되었지만, 점점 온난해지는 기후로 거제에 상륙하게 된 것이다. 한때는 약 100가구의 농가들이 각자의 비닐하우스에서 열심히 파인애플을 재배했다. 그리고 이제 막 가을로 접어드는 시기의 파인애플이 참 맛있었다고 한다. 유통 과정에서 후숙되는 수입산과는 달리, 농후함이 천양지차라는 게 거제 파인애플을 맛본 이들의 공통적인 소감이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단 한 가구만 파인애플 농사를 짓고 있을 뿐이다. 그나마도 언제까지 농사를 이어갈 수 있을지 장담을 못 하는 상황. 식재 이후 수확까지 3년이나 걸리는 식물이기에 재배가 여간 고단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포도, 그중에서도 거봉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거제 거봉’이라는 말이 영 낯선 사람들도 있겠지만, 거제와 통영에서는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반갑고 귀한 손님으로 대접받는다. 그래서 인근 농협 매장에서 구입할 수 있음에도 굳이 포도밭까지 찾아와 곱게 포장된 거봉을 조심스레 차에 싣고 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물론 포도를 사러 온 이들이 그저 포도만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는다. 거봉을 생산하고 있는 곳은 거제 둔덕면. 유치환 시인이 태어난 곳이자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곳이기에 나들이 장소로도 훌륭하다.

어쩌면 그곳이 거제의 원래 모습, 그러니까 지금처럼 많은 이들이 몰려와 살기 이전의 풍경을 간직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시간과 사람과 사연이 켜켜이 쌓이기 이전의, 그저 넉넉한 고즈넉함과 커다란 평화로 가득찬 채 고립돼 있던 섬의 모습 말이다.


글 | 정환정_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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