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첩立春帖은 24절기의 하나인 입춘 날에 문이나 기둥, 벽 등에 써서 붙이는 글귀를 말한다. 글자 수에 제한이 없지만 거의 대구對句 형식으로 두 개의 구절을 쌍으로 붙인다. 그래서 춘련春聯이라고도 한다. 그 외에도 다양한 별칭이 있지만 춘첩春帖이나 춘첩자春帖子가 널리 쓰이는 말이다. ‘첩帖’은 원래 붙인다는 뜻인데 춘첩의 풍습이 보편화되어서인지 지금은 아예 대련對聯이라는 뜻까지 사전에 올라 있다. ‘춘첩자’라고 할 때의 ‘자’는 자字로 오인하기 쉬운데 자子가 맞다. 사물을 나타내는 접미사이다. 글의 내용은 주로 한 해의 평안과 복을 기원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입춘첩의 유래는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같은 옛 문헌에서도 잘못 설명하고 있는데, 중국의 오대십국五代十國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나라가 망하고 송나라가 건국되기까지 혼란기를 거치면서 수많은 나라들이 나타났다 사라진 시기를 오대십국이라고 하는데, 그 중에 후촉後蜀, 934~965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후촉의 2대 황제인 맹창孟昶은 문장에 뛰어났다. 그가 도부桃符에다 ‘新年納餘慶신년납여경, 嘉節賀長春가절장하춘’이라고 쓴 것이 중국에서 춘련의 시초로 알려져 있다. “새해에 조상이 끼쳐준 복을 받고, 좋은 명절에 긴 봄날을 축하한다.”는 뜻이다. 도부는 복숭아나무 부적이란 뜻인데, 귀신이 복숭아나무를 무서워한다는 속설이 있어서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받아들이는 의식에 복숭아가 등장한다.
대련의 글귀로 표현한 것은 후촉의 맹창이지만, 복숭아나무를 사용하여 한 해의 복을 기원하는 풍습은 훨씬 더 시대를 소급해 올라간다. 진秦나라 이전부터 중국의 민간에서는 한 해를 보내고 맞으면서 복숭아나무 판자에 전설 속의 귀신인 ‘신도神荼’와 ‘울루鬱壘’를 그림으로 그려서 문의 좌우에 걸어놓고 잡귀를 물리치는 의식을 행하였다. 그러다가 그림 대신 그 이름을 글씨로 써서 붙이게 되었다. 놀랍게도 2천 년 이상 된 이 풍습이 아직까지 우리나라 일부 지방에 남아 있다. 아래 사진은 10여 년 전 필자가 안동의 퇴계 선생 종택에 답사 갔다가 대문에 붙어 있던 것을 직접 촬영한 것이다.
맹창이 춘련의 선구가 된 뒤로 그 다음에 등장한 통일 왕조인 송나라 때 문인들 사이에 크게 유행하였다. 그러나 ‘춘련’이라는 이름이 정식으로 명명된 것은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에 의해서였다. 그는 남경南京에 도읍을 정한 후 제야除夜에 갑자기 명령을 내려 모든 공경公卿, 사대부, 서민의 집 문에 춘련을 붙이게 했다. 그리고는 평복을 입고 대궐 밖으로 나가 그 춘련을 둘러보며 즐거워했다고 한다. 이후로 명나라 때는 도부 대신 종이에 글을 써 붙이는 춘련이 보편화되기 시작하였으며, 청나라에 들어서는 더욱 성행하였고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주변의 한자 문화권인 나라에도 널리 전파되었다.
입춘첩에 쓰이는 문구는 주로 복을 기원하는 내용이지만 특별한 제한이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 압도적으로 많이 쓰이는 것이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이다. 그런데 ‘입춘대길’은 쉬워서 잘 아는데 ‘건양다경’은 무슨 뜻인지 잘 모른다. 실은 앞의 구절과 같은 뜻이다. ‘건양’은 ‘양춘陽春이 선다는 뜻으로 ‘입춘’과 같고, ‘다경’은 경사, 즉 복이 많다는 뜻이니 ‘대길’이나 마찬가지다. 두 구절이 정연한 대구로서 뜻을 강조하기 위해 유사한 표현을 중복시킨 것이다. 그밖에도 ‘國泰民安 家給人足’1), ‘父母千年壽 子孫萬代榮2)’, ‘掃地黃金出 開門百福來3)’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입춘첩은 이렇게 대련으로 써서 붙이는 것이 일반적인데, 궁중에서는 완성된 시 작품으로 관례화되기도 하였다. 또 궁중에서는 입춘 때만 아니라 정월 초하루를 축하하기 위한 연상시延祥詩, 단오를 기념하기 위한 단오첩端午帖이 성행하였다. 이들을 통칭하여 절일첩節日帖이라고 한다. 이처럼 궁중에서 신하들이 지어 올리는 절일첩은 하례賀禮의 덕담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치나 주색을 경계하는 등 임금에게 올바른 정치를 하도록 권면하기도 하였다. 현재 덕수궁 중화전中和殿에는 내부 기둥에 고종 때 신하들이 지은 단오첩이 여러 개 붙어 있다. 오랜 세월에 낡고 파손된 것이 많아 언제 지은 것인지 고증하기 어려운데 고종을 황제라고 한 것으로 보아 광무光武~융희隆熙 연간1897~1910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어문 생활에서 한문이 급격히 쇠퇴하면서 아울러 한문과 관련된 전통 문화의 단절도 심각한 정도로 진행되고 있다. 입춘첩도 한문 문화의 한 측면인데 그래도 이 풍습은 아직까지 없어지지 않고 꽤 성행하고 있어 다행스러운 생각이다. 인문 정신이 깃들어 있는 이 풍습이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고 면면히 이어지기를 기원한다.
1)국태민안 가급인족 나라는 태평하고 백성은 편안하며,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충족하라.
2)부모천년수 자손만대영 부모님은 천년토록 장수하시고, 자손들은 만대토록 영화로우라.
3)소지황금출 개문백복래 부지런히 일하면 황금이 나오고, 문을 열어 손님을 잘 대접하면 온갖 복이 찾아온다.
글_김영봉 | 한문학 박사·고전번역원 번역위원·연세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