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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고향의 향수를 달래준 농촌 드라마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인 1980년 10월 첫 선을 보일 때까지만 해도 농촌을 배경으로 한 그 드라마가 무려 22년 동안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없었을 것이다. 색채가 다른 또 한 편의 농촌 드라마 역시 1990년 9월 첫 방영을 시작한 이래 평균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17년 동안 이어지는 생명력을 과시했다. 1970년대 산업화 이후 빠르게 진행되는 도시화의 흐름에서 벗어난 두 편의 드라마는 MBC <전원일기>와 KBS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였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경기도를 배경으로 설정한 농촌 드라마는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는 도시에서 팍팍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위안을 주었고,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고향’의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농촌 드라마가 시청자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한국인의 정서가 농경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이라는 단어가 넘쳐날 정도로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추석과 설 명절마다 ‘민족대이동’이 일어날 정도로 한국인에게 고향, 특히 농촌은 존재의 근원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전원일기>의 ‘양촌리’와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의 ‘김포’가 고향을 떠나 도시에 정착한 시청자는 물론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시청자에게조차 마음의 고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서로 다른 생활 방식 때문에 티격태격하면서도 일상다반사를 공유할 정도로 공동체의식이 강했던 양촌리와 김포도 고층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광역 전철이 다닐 정도로 도시화될수록 <전원일기>와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는 실제 현실 장소를 뛰어넘은 마음의 고향으로 기억될 것이다.

실제 공간을 뛰어넘은 마음의 고향

드라마의 공간은 등장인물의 성격 표상과 사건 전개에 필요한 극적 요소이자 주제 의식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장치이다. 농촌조합회장을 지낸 덕에 마을사람들에게 ‘김회장’으로 불리는 <전원일기>의 ‘김민재(최불암 분)’가 양촌리의 정신적 지주에서 한국의 아버지를 상징하는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6·25 전쟁으로 고향인 개성을 떠나 김포로 피난 와서 정착한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의 ‘황민달’(김상순 분)은 십 원짜리 하나 허투루 쓰지 않을 정도로 절약 정신이 강해 마을사람들에게 ‘황놀부’로 불리지만 자식 사랑하는 마음 표현에 서투른 아버지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양촌리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어른이면서도 “파~” 하는 웃음소리로 사람들의 경계심을 풀어내는 김회장이나, 괄괄하고 투박한 성질 탓에 “이런 얼어 죽을”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그 누구보다 생활력이 강한 황민달은 농촌 드라마에서만 볼 수 있는 ‘아버지’이다. 시청자에게 ‘국민 엄마’로 각인된 <전원일기>의 김회장 부인이나 자린고비 남편의 성질에 눌려 제대로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아가는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의 황민달 부인처럼 ‘아내이자 며느리면서 어머니’로 주목받은 여성 인물도 있다. 그리고 <전원일기>에서 수다쟁이로 오지랖 넓은 할머니인 일용엄니(김수미 분)와 일용이(박은수 분),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에서 “그게 아니고”라면서 자기 목소리를 내려고 하지만 번번이 황민달에게 밀리는 박달재(김인문 분)와 “으하하하~”라는 호탕한 웃음소리로 좌중을 사로잡는 하성댁(전원주 분) 부부도 시청자의 기억에 남아 있는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마을 공동체로서의 고향을 그리다

농촌 드라마는 단순한 사건을 오해하여 사건이 확대되고 온 동네에 퍼져 웃음거리가 되었다가, 오해가 풀리면서 갈등이 해소되는 방식의 이야기를 통해 ‘따스하고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화 속의 고향 이미지’를 생산하면서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전원 지향 욕망을 충족시켜주었다. 가끔 소값 파동이나 농산물 수입시장 개방, 농약 문제 등을 소재로 취하기도 했지만 이마저도 농산물 수입시장 개방 문제를 세대 간의 인식 차이로 처리하는 등 문제적 현실의 본질을 바라보지 못한 채 피상적으로 다룬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방송 당시 농촌 사람들이 가슴 아파하고 한숨 내쉬어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는 제대로 다루지 않고,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래주기 위해 제작된 ‘전원 드라마’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전원일기>와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는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한 채 도태 위기에 처했다가 결국 방송가에서 퇴장했다. 이후 시간이 정지된 고향이라는 낡은 이미지에서 벗어나 농촌의 현실적인 문제를 적극적으로 담아내면서 체질 개선을 시도한 <산 넘어 남촌에는> 같은 농촌 드라마가 제작되기도 했으나, 시청자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에서의 삭막한 인간관계로 인해 정신적 외상을 입고 찾아올 자식들을 품에 안아줄 아버지가 존재하는 <전원일기>와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는 한국 문화의 뿌리에 대한 확인은 물론 한국인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농촌 드라마였던 것은 분명하다. 이처럼 농촌 드라마가 인간 존재의 근원으로서 고향을 상징하는 마을 공동체를 배경으로 가족의 의미는 물론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가치를 확산할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전통적 가부장제의 중심에 자리한 아버지의 존재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아버지 같은 농촌 드라마가 그립다

시간이 멈춘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아버지 같은 농촌 드라마가 그리운 계절이다. 첫 회 ‘박수 칠 때 떠나라’로 시작해 마지막 회 ‘박수할 때 떠나려 해도’로 끝난 <전원일기>의 김회장의 인생에 대한 마지막 내레이션을 되새겨본다.
“세월은 쏘아놓은 화살처럼 날아가고 흐르는 물결처럼 되돌릴 수 없다. 흐르는 물결은 머물고 갈 지 언정 거스르는 길은 아닌데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는 왜 이렇게 굴곡도 많고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게 되는지. (중략) 세월의 흐름 따라 사람은 늙어간다. 박수할 때 떠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사람이 서로의 관계를 생각하게 되고, 정에 연연하다 보면은 그 기회를 잃고 만다. 그러나 어쩌리, 그것이 또한 인생인 것을.”

* 이 글은 외부 필진이 작성하였으며 국립민속박물관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글_윤석진 | 충남대 국문과 교수, 드라마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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