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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전시

장승, 세우던 그 날

밤길을 걷던 나그네가 길 옆 장승을 보고 안도의 숨을 내쉰다. 조금 더 걸으면 마을이 나오고 묵어갈 곳을 청할 수 있으리라 희망을 품는다. 전설의 고향이나 사극에서 흔하게 나오는 장면이다. 길가에 서서 오가는 사람들을 오도카니 지켜보던 장승. 양력으로 2월 9일, 국립민속박물관 야외전시장에 한 쌍의 장승이 세워졌다. 그 장승에 대한 이야기를 장장식 학예연구관에게 들어보았다.

장장식 학예연구관이하 장장식_야외전시장은 예전에 우리가 살았던 마을과 최대한 가까운 모습으로 재현하기 위해 구성되었습니다. 과거에는 마을 입구마다 항상 장승이 있었지요. 장승은 입구에서 민가와 경작지를 함께 아우를 수 있는 위치에 놓였는데, 외부로부터 마을 사람들의 안위를 살피기 위해서였습니다. 장승 옆에는 돌탑도 있는데, 간혹 어떤 마을은 장승 대신 돌탑을 쌓아두는 곳도 있었습니다. 돌탑도 이 일환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장승은 마을의 경계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장승을 기준으로 마을의 안과 밖이 정해졌지요. 때로는 장승 옆에 서울 몇 리, 수원 몇 리처럼 남은 거리가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장승은 거리의 이정표 역할도 겸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도로 표지판 역할을 한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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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입구를 지키는 장승(1930년대, 송석하 기증자료),
서울 흑석리(현 흑석동)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던 장승

 

Q. 장승이 여러 쌍이 있는데, 그 중에 새로 세워진 장승도 보인다.

 

장장식_정월대보름 전전날인 음력 1월 13일에 충청남도 공주시 신풍면 쌍대리의 장승제장승에게 지내는 마을제의 하나를 지냈습니다. 원래 장승제는 음력 1월 14일부터 진행하여 자정이 넘은 1월 15일 새벽에 진행합니다. 쌍대리에서도 올해 음력 15일에 장승제를 지내야하기 때문에, 마을주민들의 참여를 위하여 박물관에서는 이틀 앞당긴 음력 13일, 그러니까 양력으로 2월 9일에 장승제를 시연하였습니다.

 

Q. 장승은 어떻게 만드는가?

 

장장식_쌍대리 장승제를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먼저 장승목으로 사용할 나무를 선정합니다. 비교적 깨끗한 곳에서 자란 나무로 고릅니다. 예컨대 무덤가나 쓰레기 소각장, 땅이 오염된 곳은 피해야 하지요. 아주 깨끗한 곳에서 자란 나무 두 그루를 그 해의 장승목으로 정합니다.

장승목으로 정한 후에 나무를 바로 베는 것은 아닙니다. 음력 1월 14일 산에 올라가서 고유제告由祭를 지냅니다. 당신을 잘라 장승을 만들겠다고 사유를 고한 뒤, 제사를 지내지요. 그 다음에 잘라서 산에서 내려옵니다. 산에서 내려 온 후, 껍질을 벗기고 얼굴을 만든 뒤, 몸통에 글씨를 쓸 부분을 대패로 깎아내어 장승을 만듭니다. 다 만든 후에 붓글씨로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라고 적습니다. 일반적으로 마을에서는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처럼 남녀를 나타내거나 오방을 나타내는 다섯 개의 축귀대장군逐鬼大將軍을 세웁니다. 그런데 쌍대리에서는 상원주장군, 하원당장군이라 적지요. 대개 사찰 장승에 이렇게 적는데, 현재 쌍대리에는 절이 없고, 있었던 절도 300년 전에 없어졌다고 합니다. 아마도 절 입구에 세웠던 장승의 전통을 이어갔다고 생각합니다.

 

장승 옆에는 솟대가 있습니다. 솟대에는 새가 한 마리 올라와 있어야하므로, 장승을 제작할 때에 그 새도 함께 깎습니다. 솟대 말고도 긴 막대기에 살아있는 소나무 가지를 세워놓은 솔대를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솔대 두 개를 연결하는 새끼줄을 꼬는데 그것을 금줄이라 부릅니다. 이때에 금줄은 오른새끼가 아닌 왼새끼로 꼬아야 합니다.

쌍대리 장승제는 음력 1월 14일 저녁에 시작합니다. 마을사람들이 음식을 준비하여 뒷산으로 올라가 산신제를 지내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산신제를 지낼 때에는 남자들만 산에 올라갑니다. 산신제를 지내고 풍물을 울리며 마을로 내려오면 마을사람들은 시루떡을 준비해 놓는데, 이 시루떡은 마중시루라고 불리지요. 풍물패와 산신제를 지낸 사람들이 산에서 모두 내려오면 각각의 가정에서 준비해 두었던 제수로 따로 제사를 지냅니다.

제사가 끝나면 풍물패와 마을 주민들은 남녀 가릴 것 없이 모두 모여 마을 입구로 가는데, 이때에는 만들어 두었던 장승을 갖고 갑니다. 기존에 세워져 있었던 장승을 뽑아내고 상원주장군과 하원당장군을 양쪽에 세운 뒤 솟대와 솔대를 세웁니다. 금줄 사이에 오방신장 위목을 끼우고 양쪽의 솔대에 금줄을 맵니다. 쌍대리 장승제의 특이한 점은 오방신장 위목位目을 쓰는 것입니다. 백지에 동방청제 축귀대장군, 남방적제 축귀대장군, 서방백제 축귀대장군, 중앙황제 축귀대장군이라 쓴 후 금줄에 끼웁니다. 그리고 오방에 맞추어 다섯 개의 상을 차리고 마을 소지와 개인 소지를 올린 뒤 음복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이렇게 장승제를 지내고 나면 새로운 장승이 세워지게 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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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장승제가 끝난 뒤 기존 장승은 어떻게 되는가?

 

장장식_마을마다 장승을 모시는 방법이 다르지만 대개의 마을은 뽑힌 장승을 불태웁니다. 물론 기존 장승에 손을 대지 않고 계속 세우는 곳도 있습니다. 자연적으로 썩을 때를 기다리면서 말이죠. 그런 마을은 장승이 여러 개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국립민속박물관에 전시된 장승 중에는 장승제 이후 장승을 불태우는 마을에서 기증받은 것도 있습니다. 상설전시실 2관 앞에 전시된 쌍계사 장승 역시 그러한 사연이 있지요. 전통에 따라 불태우려던 것을 1966년에 장주근 선생님의 노력으로 박물관에 올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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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사찰장승인 경상남도 하동군 쌍계사 입구에 있던 장승
(사진 1966. 7. 장주근 기증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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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민속박물관 상설전시 2관 <한국인의 일상> 앞의 쌍계사 장승

 

마을 입구에는 항상 장승이 있다. 이정표의 역할과 함께 잡귀와 질병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해주기도 한다. 언뜻 무섭게 보이지만 이는 길을 오고 가는 사람들과 마을을 지켜주기 위함이다. 과거의 전통적인 마을을 재현한 야외전시장을 관람객들에게도 안녕이 깃들었으면 한다.

 

글_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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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댓글이 등록되었습니다.
  1. 황준구 댓글:

    위 사진의 ‘쌍계사’는,-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에 있는 절집입니다. ‘장승’이 아니라 절집의 ‘벅수’라 표현하여야 올바른 표현입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장승’과 ‘벅수’를 확실하게 구분(분류)하시어 표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운영하고 있는 ‘민속아카이브’를 검색하여 보면 짜증날 정도로,- 많은 틀린 정보를 발견할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함량미달’의 박물관 입니다. 박물관뜰에 만들어 세워 놓은 ‘돌벅수'(복제품)들은 실제 현장에 보존되고 있는 ‘실물’들과 닮은꼴은 한점도 발견 할수가 없습니다. 역시 함량미달 입니다. 그래서 ‘입장료’를 받지 않는 모양입니다. 아직도 현관의 출입방법도 ‘왼쪽통행’을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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