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시간을 초월한다. 책은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과 느낌과, 행동한 것들을 모아 다음 시대로 전한다. 그렇게 책은 세월을 넘어 과거의 지혜를 전하며 또 미래의 가능성을 씨앗처럼 품는다. 책은 매력덩어리다. 그런 책을 만드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일까? 얼마나 책에 빠졌기에 읽는 것도 모자라 만들기까지 할까? 출판인 홍지웅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러시아문학을 전공한 홍지웅 대표는 당시에는 낯선 해외 문학 전문 출판사인 열린책들을 창립했다. 처음부터 ‘원전 완역’과 ‘전작 출간’이라는 원칙을 정립해 고수해 왔고, ‘개미’ ‘뇌’ ‘향수’ ‘좀머씨 이야기’ 등 100만부 이상 팔린 밀리언셀러를 6권이나 만들어냈다. 홍지웅 대표는 지난 30년에 대해 특별한 감회는 없다면서도 참 즐겁게 일해 왔다고 말했다.
“괜히 팔불출 같을 때가 있어요. 내가 낸 책을 보면서도 기분이 좋은 걸 보면 이런 사람도 참 드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홍지웅 대표는 자신을 소개할 때 출판사 사장이라는 직함보다는 ‘문화기획자’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 거기에서 문화 전파의 일익을 담당하는 것에 대한 책임감이 드러난다.
“소비 없는 문화는 의미가 없습니다. 예술과 대중의 접점, 그 미묘한 사이를 조율하는 것이 바로 제 역할이라 생각해요. 고급 문화를 대중적으로, 대중 문화를 고급화 시켜 소비하게 만드는 것이 출판인의 소명입니다.”
지난 1986년 러시아 전문 출판사로 문을 열고 열린책들을 시작할 때부터 홍 대표는 남들과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 러시아나 유럽 문학에 주목했고, 국내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가를 발굴해 그 작가의 진가가 대중에게 인정받을 때까지 출간과 홍보를 집중하며 베스트셀러로 키워냈다. 또 한국소설이 역사와 사회 문제에 집중하고 있을 때, 열린책들은 소설적 재미나 낯선 이야기에 가치를 두고 출간했다. 표지, 광고디자인, 마케팅 등도 남달랐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기존에 없었던 걸 하자는 게 우리 생각이었습니다. 비슷한 것은 일단 배제하고 새로운 것, 선례가 되자고 이야기해 왔지요.”
홍 대표가 해외문학에 집중하게 된 계기도 바로 이 독창성의 추구에 있다. 홍 대표는 다양한 장르의 외국 소설이 더해짐으로써 국내 소설의 종류도 풍성해질 수 있었다고 역설한다.
“한국 소설은 대체로 리얼리즘 계열입니다. 일제의 식민지배와 6·25 전쟁, 독재정권 등을 겪으며 100년 역사가 드라마가 됐어요. 주변 인물을 시대에 넣으면 소설이 되는 거죠. 상상력을 동원하는 추리소설이나 사이언스픽션(SF), 유토피아 소설 등의 장르는 사실 발전이 별로 없었어요. 실제가 더 드라마 같았기 때문이죠. 하지만 한 평론가도 그랬지만 우리는 사물을 낯설게 보여주는 것을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사물이나 사람에 대한 것을 다르게 보여주고 낯설게 보여주는 게 예술인데 그런걸 봐야 사람의 품격이 고양될 수 있습니다. 잘 꾸며낸, 잘 짜인 뛰어난 해외 소설을 소개하는 것이 국내 문학에 도움이 되겠다 싶었습니다.”
홍대표의 말에 따르면 출판이라는 것은 그 사회가 필요로 하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정치적이든 역사적이든 대한민국의 최근 100년은 안정되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사람들은 이런 혼란을 극복할 해답을 책에서 추구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기에 출판도 여기에 발맞춰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사회변화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책들이 무엇이냐는 것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일단 우리나라 출판의 역사를 잠깐 이야기 해볼까요? 사실 국내출판의 역사는 100년이 채 안됩니다. 해방이전까지는 제대로 된 출판이 있었다고 하기 힘듭니다. 본격적으로 대중출판이 시작된 것은 해방 이후로 봐야 합니다. 해방 직후부터 60년대까지 출판은 주로 교과서나 학습서 위주의 출판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60년대 이후부터 수출중심의 경제정책이 펼쳐지고 경제발전이 빨라지기 시작하면서 출판도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책은 보편적인 교양인을 만드는 것이 목표가 되었지요. 70년대에 들어서면서 개인에 존엄, 자유 등에 대한 고민들을 물을 수 있는 책과 잡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창비, 문지 등의 잡지와 책들이 등장한 것도 그때입니다. 장르가 다양해진 것은 아무래도 90년대 이후부터지요. 오늘날과 같이 실로 다양한, 미시적인 분야에까지 아우르는 책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이후에서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한없이 매력적인 책이지만 최근 출판계의 부진은 분명 걱정거리다. 하지만 홍지웅 대표는 그것을 걱정거리로만 보지는 않았다. 단순히 사람들이 책을 적게 읽고 혹은 책에서 관심이 멀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보다는 시대의 변화와 다양성이 늘어난 성향에 주목하고 있었다.
“100만 부씩 나오는 베스트셀러가 드물어진 것은 사실이에요. 출판시장이 위축되어가고 있는 것이 영향을 끼친 것도 사실이죠. 그러나 독서의 형태가 달라지는 것이 더 큰 이유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과거 도서시장에는 밀리언 셀러가 많았지요. 현재는 밀리언셀러 보다는 30만부 규모의 책 3권이 존재한다고 보면 됩니다. 그만큼 다양성이 늘어났지요. 이건 바람직한 일입니다. 독자들의 취향은 다양해지고 또 그만큼 책도 다양해졌으니까요. 편향된 취향과 편향된 유행보다는 이렇게 다양성이 존재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책의 다양성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담는 미디어 또한 다양해지고 있다. 인터넷, 스마트폰의 등장 이후에는 E북, 웹소설 등이 등장하고 있다. 이렇게 다양한 형태의 책이 발전하면서 콘텐츠를 담는 형식 또한 다채로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작이야말로 모든 것의 기본이라고 홍지웅 대표는 역설한다.
“항상 시대상에 맞는 형식은 등장하기 마련이죠. 예를 들어 오디오북은 미국에서 굉장히 유행했었습니다. 카세트 테이프가 유행하던 시절이었지요. 미국은 도로가 엄청 길죠? 오디오북은 장시간 드라이브에서 사용하기 용이했습니다. 상황이랑 맞아떨어졌던 거지요. 그렇지만 종이책이야말로 출판의 가장 기본입니다. 영화건 만화건 게임이건 콘텐츠에는 기본적인 베이스가 필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이야기의 창작입니다. 종이책이냐 디지털이냐는 사실 창작물을 어떻게 가공하느냐의 문제입니다. 플랫폼의 변화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결국 시장은 뛰어난 창작에 의해 좌우됩니다.”
갖고 싶은 전시
만약 박물관에 전시를 한다면 어떻겠냐는 물음에 홍지웅 대표는 스스로의 예술관, 출판관을 드러냈다. 책과 예술, 책과 전시는 다르지 않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책도 예술작품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술작품인 만큼 디자인도 좋아야 하는 거죠. 영향력으로만 따지면 웬만한 예술품보다 더 클 거에요. 책에 맞는, 소설에 맞는 격을 찾아줄 필요가 있는 겁니다. 또 사람들이 갖고 싶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큽니다. 50년 뒤에 누군가가 소장하고 싶은 책, 찾아서 수집하는 책을 만들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미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이라는 미술관을 운영하고 있는 홍지웅 대표는 전시 이전에 책과 출판예술, 그리고 건축까지 아우르는 인상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것은 감동하는 자가 주인이라는 것이었다.
“흔히 책을 출판하면 그게 자기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허나 출판사에서 떠나 독자 손에 들어가면 그 책에 담긴 것들은 독자에게 내재화됩니다. 교감이 시작되는 거죠. 그걸 통해 독자는 책의 내용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전시도 마찬가지에요. 전시를 열었다고, 책을 출판했다고 그것을 다 소유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가 그 전시와 혹은 책과 교감을 한다면 그 경험은 온전히 그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산 사람 혹은 본 사람, 감동을 느끼는 순간 그 책과 전시는 그 사람의 소유가 되는 것이죠.”
출판을 넘어 문화기획은 항상 그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단다. 중요한 것은 생각의 문제라고 역설하는 홍지웅 대표는 이순이 넘은 나이에도 어린아이 같은 웃음을 보여줬다. 역시 생각이 젊은 탓일까.
“열린책들의 책에서 혹은 전시에 단 한 명이라도 감동을 느낀다면 거기에 의미가 있지요. 그리고 그런 감동의 경험이 모이고, 그렇게 생각이 바뀌어가면 문화의 품격 자체가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출판인. 문화기획자. 1986년 번역문학 출판사 열린책들을 설립하여 베르나르 베르베르, 움베르트 에코, 폴 오스터 등 당시 우리에게 낯선 작가들을 연이어 소개하여 큰 주목을 받았다. 제1대 서울북인스티튜드 원장, 제3대 한국출판인회의 회장을 역임하였다.